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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는 이날 이 일장기를 보면서 대륙진출의 꿈을 이룬 환희에 빠졌다.
▲ 1910년 8월 29일 경복궁 근정전 앞에 있는 일장기 일제는 이날 이 일장기를 보면서 대륙진출의 꿈을 이룬 환희에 빠졌다.
ⓒ 눈빛<일제강점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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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년하청(百年河淸)'

'백년하청(百年河淸)'이라는 한자말이 있다. 이 말의 유래는 중국의 황허강(黃河江)이 늘 흐려 맑을 때가 없다는 뜻으로, 아무리 오랜 시일이 지나도 어떤 일이 이루어지기가 어려움을 이르는 말이다.

2010년 8월 29일 오늘은 1910년 8월 29일 우리나라가 국권을 일본에게 송두리째 빼앗긴 지 꼭 100년이 되는 날이다. 우리나라 근대사를 조금이라도 살펴보면 나라를 빼앗긴 제1차적인 원인은 우리에게 있음을 알 수 있다. 곧 지도층의 부패와 무능과 무지가 망국에 이르게 했다.

조선조 임금을 비롯한 왕족들의 비리, 사대부와 탐관오리들의 수탈에 더 이상 참을 수 없어 저항한 백성들의 민란에 조정은 관군으로 이를 수습치 못하고 외국군대를 끌어들였다. 그 결과 청일전쟁의 빌미가 되었고, 여기에서 승전한 일본이 기고만장하여 러일전쟁까지 일으켜, 침략자 일본으로 하여금 몽매에도 그리던 대륙진출의 꿈을 이루게 한 것이다.   

1910년 8월 29일 아침, 일제는 500여 년 국권의 상징이던 경복궁 근정전 앞에 일장기를 걸어놓고 일본열도는 조선정벌의 꿈을 이루었다고 이날 밤이 늦도록 환호했다. 일본인들에게는 일천년 꿈이 이루어진 날이었다.  

그런데, 꼭 일백년이 지난 오늘의 대한민국 지도층은 어떠한가. 한 마디로 지도층은 그제나 이제나 조금도 다름이 없는 '백년하청(百年河淸)'이라고 한다면 나의 지나친 편견일까?

대통령을 비롯한 고위 지도층은 걸핏하면 쇠고랑을 차거나 휠체어를 타고 법정을 드나들지 않는가. 그것도 한두 번이지 앞으로도 얼마나 더 그 추한 꼴을 계속 보아야만 할까. 이들은 자기가 죽는 줄도 모르고 불에 뛰어든 부나방 같기도 하고, 제 동족의 시체를 보고도 꾸역꾸역 파리통에 들어가는 파리떼들과 조금도 다름이 없다.

이들은 국난이 오면 가장 먼저 해외로 도망치겠지만 나라 안에 사는 가난하고 힘 없는 백성들은 또 다시 수난의 세월을 보내야 한다.

나는 최근 10여 년 동안 항일유적지를 답사하면서 나라가 빼앗긴 원인과 나라를 다시 찾게 된 연유를 골똘히 공부하고 연구해 보았다. 그러면서 <항일유적답사기> <누가 이 나라를 지켰을까> <영웅 안중근>을, 최근에는 <일제강점기>라는 책을 펴냈다.

1911. 1. 경성(서울)의 제2헌병분대, 일제는 이 헌병들을 앞장세워 식민지 조선을 통치했다.
▲ 일제 헌병들 1911. 1. 경성(서울)의 제2헌병분대, 일제는 이 헌병들을 앞장세워 식민지 조선을 통치했다.
ⓒ 눈빛 <일제강점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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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국민들의 증언

나는 이들 책을 집필하면서 내내 가슴이 아팠다. 나라가 망한 제1차적 원인이 조선조 임금을 비롯한 사대부 지도층의 무능과 무지, 부패에 있었기 때문이다. 그와는 달리 가슴 뭉클한 점은 자료를 뒤적일 때마다 이름 없는 백성들이 독립투사로 일제강점기 내도록 빼앗긴 나라를 찾겠다고 단 하루도 일제 총칼 앞에 항쟁치 않은 날은 없었다는 점이었다.

나라를 빼앗긴 망국민들의 수난은 상상을 초월한다. 나는 해방둥이로 일제강점기를 체험치 못했다. 나의 백 마디 말보다 그때 망국민으로 사셨던 몇 분의 증언과 그때의 사진 몇 점을 경술국치 100돌이 되는 날 아침에 보여드리고 들려드린다.

일제는 병탄 후 1910년부터 1918년까지 조선 토지조사사업을 벌였다.
▲ 일제의 토지조사사업 일제는 병탄 후 1910년부터 1918년까지 조선 토지조사사업을 벌였다.
ⓒ 눈빛<일제강점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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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새 아이들은 모를 기라. 우리 그때 먹을 게 없어가 칠기(칡)뿌리, 요새 칠기 약해 먹는 거. 그거 익히(익혀) 빠사(빻아) 가지고 가루 내가 먹고 그래 했십니다. …… 송진도 벗겨 먹고, 봄날에 나물 올라오면 나물 가지고 말이지. 그래가 보리 빠사 가지고, 호박 이파리 여가(넣어) 죽 끓여 그것도 먹고, 안 먹은 거 없어요,

그 당시에. 우리 참 어릴 때부터 죽 내려오는 과정은 지금 사람들은 그거 잘 모릅니다. 알 수가 없지요. 요새 학생들 카는데 그러더라고. 어렵게 살았다고 카마 "와 라면 끓여 먹지" 이칸다 카는 그런 말한다 카는데(하는데), 지금 이십대 십대들은 모르지, 알 수 없지. 그 모릅니더. 우리 아들도 손자도 잘 모릅니다. 왜정시대 그때는 참 전부 왜놈들 뭐 할 때 소나무 뭐 떼고 오너라, 기름 없다꼬 산솔[관솔] 띠가 오너라 카미 그런 거. 참 못살 정도지.
― 정해주(1926년 6월 9일생) 증언,  눈빛출판사 <일제강점기> 523쪽

글 때(일제강점기) 좋은 데(직업, 일)는 일본 사람들이 다 있었어. 지서장이나 주임, 교장 같은 건 일본사람들이 다 했지. 일본 사람들은 군, 면소재지에 살았어. 농사도 좋은 데(곳)는 일본 사람들이 지었어. 어릴 때 식량이 곤란해서(부족해서) 만주 쪽 쌀이 한국으로 많이 들어왔어. 만주대두(콩), 좁쌀도 많이 먹었어. 한국에 사는 사람들이 곤란하니까(어려우니까) 자꾸 만주로 많이 갔어요. 만주 가면 농토도 흔하고 마음대로 농사를 지을 수 있었다. [영월에서도] 어렵게 살았지.
― 최대봉(1921년 12월 20일생)  <일제강점기> 523쪽

일제는 식민지 착취기관인 동양척식회사를 설립하여 조선의 식량과 자원을 빼앗아 갔다.
▲ 공출미 수탈 현장 일제는 식민지 착취기관인 동양척식회사를 설립하여 조선의 식량과 자원을 빼앗아 갔다.
ⓒ 눈빛<일제강점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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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는 일본놈 정치에 우리가 사는데, 심지어 쌀도 배급 안 타 먹었나. 그래 쌀도 우리 뭐시기 농사지(지어) 가지고 전부 안 바치나. 그래가 그거를 가지고 한 명에 육합썩 배급을 주는 거 그거 배급 타 가지고 먹었는데, 농사 많이 짓는 사람은 공출을 바치고, 그래도 쪼매 남는 게 있으이끼네 보태 가지고 먹었지만은, 없는 사람은 배급 탄 거만 가지고 먹느니라꼬 힘들었다. 그러이끼네 우리 한국 사람은 그때 힘이 없고 일본놈이 시키는 대로 이래하다가 보이끼네 그래 살 수밖에 없었지.
― 김순현(1925년 2월 15일생) 증언, <일제강점기> 561쪽

'왕꼬누(亡國奴)'의 비애

천막 속에는 1인용 목침대가 있어 여기에서 군인들을 상대하게 되어 있었습니다. 그날 밤 저는 국부의 통증이 너무 심해 잠을 제대로 자지 못했습니다. 저는 이곳에서 '하루에'라는 이름으로 불렸습니다. 그 후 이곳에서 약 4개월 동안 군인들을 상대했습니다. 처음에는 저를 이곳으로 끌고 온 '고바야시'만 상대했었는데, 사흘 뒤부터는 다른 군인들도 받게 되었습니다. 군인들은 매일 찾아왔고, 평일에는 4-5명 정도, 주말에는 10명 이상을 상대했지요. 주말만 되면 마치 사형집행일 같이 생각되었습니다.

어느 날 밤 저와 다른 여자 한 명은 모포를 들고 산이 있는 쪽으로 끌려갔습니다. 거기에는 웅덩이가 있었고, 보초 서고 있는 군인 몇 명이 있었습니다. 이들은 가지고 있던 총을 옆에 놓고 우리에게 덤벼들었어요. 일을 끝낸 후 저는 아랫배가 너무 아파 걸을 수조차 없었습니다. 
- 강덕경(1929-1997) 증언, <일제강점기> 618쪽

<일제강점기> 표지, 사진과 도표, 증언으로 보고 듣는 일제 강점기 35년. 768쪽
 <일제강점기> 표지, 사진과 도표, 증언으로 보고 듣는 일제 강점기 35년. 768쪽
ⓒ 눈빛출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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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배속된 곳은 최전선인 만다레였습니다. 위안소 건물은 10명가량의 군인들이 와서 지었는데, 가마니로 칸막이를 해놓아서 키가 큰 사람은 옆방을 들여다볼 수 있었습니다. 방안에는 이불과 베개만이 놓여 있었어요. 이곳에는 위안소가 세 군데 있었고, 위안부는 모두 조선여자들이더군요.
위안소에서는 아침 9시부터 일(?)을 하였는데, 8시부터 일을 시작할 때도 있었습니다. 요금은 사병 1원 50전, 하사관 2원, 대위, 중위, 소위는 2원 50전, 대령, 중령, 소령 등 영관급은 3원이었습니다.

한 번 하는데 1시간씩 시간이 정해져 있었지만 1시간 동안 여러 명의 군인들이 드나들었습니다. 밖에서 차례를 기다리며 줄 서 있는 군인들이 "야! 빨리 하고 나와, 빨리!"라고 재촉했기 때문에 병사들은 방에 들어오기가 무섭게 일을 치르곤 했습니다.

사병들은 귀대시간이 있기 때문에 빨리빨리 처리하고 돌아가야 했지만, 장교들에게는 시간제한이 없었습니다. 그들은 새벽 1시, 2시까지  위안소에 있다 가곤 했습니다.

한 사람이 하루에 30-70명씩을 상대해야 했습니다. 군인들의 외출일이 부대마다 달랐기 때문에 우리들은 매일같이 교대해 오는 그들을 상대해야 했습니다. 조선인 군인, 군속들도 위안소에 오곤 하였습니다. 조선인 군속들은 '포로감시원'으로 끌려온 사람들이었는데, 같은 민족인 우리들이 불쌍하다고 함께 울기도 했습니다.

1주일에 한 번씩 방 소독을 했고, 군의관이 와 검진을 했습니다. 임질 같은 병에 걸리면 입원은 생각하지도 못하고 위안소의 자기 방에 누워 낫기를 기다려야 했습니다.
- 문옥수(1924-1996) 증언, <일제강점기> 624쪽

미드키나에서 일본군과 함께 있다가 포로가 된 한국인 위안부들
▲ 한국인 위안부들 미드키나에서 일본군과 함께 있다가 포로가 된 한국인 위안부들
ⓒ 눈빛 <일제강점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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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어린 시절 상해에서 보냈는데, 중국 애들이 우리 조선아이들과 같이 놀다가도 자기들이 불리하다 싶으면 우리들에게 '왕꼬누(亡國奴)'라고 놀렸어요. 심지어는 "왕꼬누니깐 할 수 없군!"이라고 우리의 아픈 점을 마구 헤집었어요. 그러면 우리 조선아이들이 힘을 합쳐 중국 아이들을 패주곤 했지요. 때로는 우리들에게 맞은 중국아이 부모들이 아이를 앞세우고 집으로 와 "남의 나라에 와 얹혀살면서 남의 귀한 자식을 이렇게 만들어 놓을 수 있느냐"라고 우리 부모에게 항의했어요.

그들 중국인의 마음속에는 늘 '왕꼬누이니깐 할 수 없다'는, 우리를 깔보는 잠재의식을 가지고 있는 듯 했어요. 그런 모욕을 당한 부모들은 중국인들에게 허리 굽혀 잘못을 빌곤 했지요. 중국인들이 물러가면 어머니는 뒷방으로 들어가 문을 잠근 채 우시곤 했습니다.
-  이종찬(우당 이회영 손자)의 증언  

누가 이 할머니의 눈물을 닦아드릴까? 하지만 이 할머니는 끝내 이 세상을 떠났다.
▲ 위안부 할머니의 눈물 누가 이 할머니의 눈물을 닦아드릴까? 하지만 이 할머니는 끝내 이 세상을 떠났다.
ⓒ 눈빛 <일제강점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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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그:#일제강점기, #망국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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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사 은퇴 후 강원 산골에서 지내고 있다. 저서; 소설<허형식 장군><전쟁과 사랑> <용서>. 산문 <항일유적답사기><영웅 안중근>, <대한민국 대통령> 사진집<지울 수 없는 이미지><한국전쟁 Ⅱ><일제강점기><개화기와 대한제국><미군정3년사>, 어린이도서 <대한민국의 시작은 임시정부입니다><김구, 독립운동의 끝은 통일><청년 안중근>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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