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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속노조 기륭전자분회 조합원 윤종희(41)씨가 서울 금천구 가산동 옛 사옥 경비실 옥상에서 농성을 벌이고 있다.
 금속노조 기륭전자분회 조합원 윤종희(41)씨가 서울 금천구 가산동 옛 사옥 경비실 옥상에서 농성을 벌이고 있다.
ⓒ 선대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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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는) 이렇게 말했다네. "크리스토프! 그대가 방금 짊어진 건 어린아이가 아니라 바로 나, 그리스도다. 그러니 그대는 저 강물을 건널 때 사실은 이 세상 전체를 짊어지고 있었던 것이다"라고.

신경숙의 소설 <어디선가 나를 찾는 전화벨이 울리고>(문학동네)에서 윤 교수가 강의실에서 예수를 업고 강을 건너 구원을 받은 성경 속 인물 크리스토프에 대해 말한다. 그는 학생들에게 "여러분은 크리스토프인가? 아니면 그의 등에 업힌 아이인가?"라고 묻는다.

이 대목에서 가장 먼저 떠오른 이들은 8명의 기륭전자 해고자들이었다. 2005년 8월 파견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근무 중 동료와 대화를 나눴다는 이유로 문자로 해고당하는 일이 다시는 없도록 노조를 만들어 파업에 돌입한 지 18일로 1821일째다. 많은 사람들은 이들의 어깨에 "비정규직 싸움의 상징"이라는 '짐'을 얹어놓은 채 시선을 돌린 지 오래다.

그 사이 구로디지털단지(옛 구로공단)에는 3~6개월의 초단기 파견 비정규직이 크게 늘었다. 이에 더해 '친서민 정책'을 앞세운 이명박 정부가 파견직 확대를 준비하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기륭전자 해고자들이 지난 2008년 여름 김소연(41) 금속노조 기륭전자분회장이 94일간의 단식을 진행했던 서울 금천구 가산동 옛 사옥 경비실 옥상에 다시 올랐다. (김 분회장 단식 당시 인터뷰 기사 : "우린 지금 살아남으려고 굶고 있습니다")

'투쟁' 1821일째... "'힘들다'보다는 '다시 해보자'라는 마음이 크다"

김소연 금속노조 기륭전자 분회장이 지난 2008년 8월 14일 오전 서울 가산디지털단지 기륭전자 경비실 옥상에서 65일째 단식 농성 중인 가운데 뼈만 앙상한 모습으로 누워 있다. 김 분회장의 이 단식은 94일간 계속됐다.
 김소연 금속노조 기륭전자 분회장이 지난 2008년 8월 14일 오전 서울 가산디지털단지 기륭전자 경비실 옥상에서 65일째 단식 농성 중인 가운데 뼈만 앙상한 모습으로 누워 있다. 김 분회장의 이 단식은 94일간 계속됐다.
ⓒ 유성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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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합원 윤종희(41)씨 등 기륭전자 해고자 2명이 옛 사옥 경비실 옥상에 오른 것은 지난 14일. 옛 사옥 부지(면적 1만1405㎡)에서 진행되고 있는 아파트형 공장 건설을 막기 위해서다. 이 부지는 최동열 기륭전자 회장이 회사의 최대주주가 된 지 5개월만인 2008년 10월, 설립 2개월도 안 된 코츠디앤디라는 시행사에 405억 원에 팔았다.

노조는 최 회장이 6600㎡를 사전 분양 받는 등 코츠디앤디가 최 회장과 깊은 관계에 있다는 의혹을 제기했다. 이들은 "최 회장이 옛 사옥 부지를 개발해 큰 이익을 얻게 된다"며 "비정규직 문제 해결 없이 이뤄지는 부지 개발을 인정할 수 없다"고 전했다. 반면, 기륭전자 쪽은 "회사와 관련 부지 개발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고, 부지 매각에도 문제는 없다"는 태도를 보이고 있다.

17일 오전에 만난 윤종희씨는 흰색 한복을 입고 있었다. 2008년 단식 이후 처음이다. 그는 "이 옷을 입으면서 죽음을 각오했다, 해결되지 않으면 다시 내려가지 않겠다"며 "단식을 준비하고 있다"고 말했다. 윤씨의 이런 목소리는 사회에 아직 충분히 전달되지 못하고 있다. 그에게 물었다.

- 이번에는 잘 해결될까요? 2008년 김 분회장이 94일 동안 단식을 해 사회적 이슈가 됐지만, 결국 해결되지 못했잖아요.
"당시에는 '정말 어렵구나'라는 것을 느꼈죠. 허탈감에 빠졌던 것도 사실이고요. 그래도 주위에서 우리를 잊지 않고 있더라고요. 그리고 우리의 싸움이 정당하잖아요. 우리가 물러서면 희망을 찾을 곳이 없어져요."

- 오는 24일이면, 파업에 들어간 지 정확히 만 5년이 됩니다. 힘들지 않나요? (첫 파업 당시 관련 기사 : 생산직 평균 임금이 64만1850원)
"초등학교 5학년과 유치원생이었던 아이들이 지금은 고등학교 1학년과 초등학교 4학년이 됐어요. 아이들이 '힘내라', '다치지 말라'고 문자메시지를 보내줘요. 고맙죠. 저 텅 빈 공장을 보고 있으면, 고향처럼 되돌아가야 할 것 같은 느낌이 들어요. '힘들다'라기보다는 '다시 해보자'라는 생각이 더 커요."

17일 낮 서울 금천구 가산동 옛 기륭전자 사옥 앞에 있는 컨테이너 박스 안에서 해고된 금속노조 기륭전자분회 조합원들이 점심을 먹고 있다.
 17일 낮 서울 금천구 가산동 옛 기륭전자 사옥 앞에 있는 컨테이너 박스 안에서 해고된 금속노조 기륭전자분회 조합원들이 점심을 먹고 있다.
ⓒ 선대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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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상에서 내려와 조합원들이 4년째 지내고 있는 컨테이너 박스로 들어서자, 조합원 유흥희(41)씨가 점심을 준비하고 있었다. 이곳 벽에 붙어 있는 2008년 단식 당시의 신문 기사가 눈에 띄었다. '기륭전자에 관심을 가져야'라는 제목의 신문 칼럼이 누렇게 바랜 채 곧 떨어질 것처럼 벽에 붙어 있었다.

약봉지와 법원에서 보내온 우편물이 책상 위에 수북이 쌓여 있었다. 이에 대해 유씨는 웃으며 "오랜 기간 투쟁하다보니 집시법 위반 등으로 전과 10범이 됐다, 2년 전에 경비실 옥상에 올라가 단식한 것은 현재 재판이 진행 중"이라며 "많은 조합원들이 약을 달고 살 정도로 건강이 좋지 않다, 긴 투쟁의 훈장 아니겠느냐"고 말했다.

"아이들에게 이런 세상 물려주고 싶지 않아"

점심시간이 지나 김소연 분회장을 만났다. 2008년 단식 때보다 살이 쪘지만 여전히 마른 모습이었다. 목은 쉬어 있었다. 국회 토론회에 다녀오는 길이라고 했다. "현대자동차의 사내하청은 불법파견으로, 불법파견 노동자도 2년 이상 근무하면 원청회사인 현대차가 정규직으로 고용한 것으로 봐야 한다"는 지난달 22일 대법원 판결에 대한 토론회였다.

그에게 후폭풍이 일고 있는 이번 판결이 기륭전자 등 불법 파견 문제 해결에 도움이 되지 않겠느냐고 물었더니 "그렇지 않다"라는 대답이 돌아왔다. 김 분회장은 "불법 파견 비정규직 노동자에게 큰 희망을 주는 판결이지만, 대기업을 제외한 대부분의 제조업 파견직은 2년 미만 근무자인 탓에 이들에게 큰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밝혔다.

실제, 지난 2008년 4월 대법원이 부당해고 무효소송을 낸 기륭전자 해고자들에게 "기륭전자가 해고의 당사자가 아니다"라는 판결을 내린 것도 이들이 2년 이상 근무를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회사는 불법 파견에 대한 벌금 500만 원을 납부했을 뿐, 해고자들은 구제받지 못했다.

- 제조업 직접생산공정업무는 파견 대상이 아니잖아요. 불법 파견이더라도, 이들에 대한 구제가 불가능한가요?
"파견법에는 제조업의 직접생산공정에도 일시적으로 인력확보가 필요하면 파견노동자를 사용할 수 있도록 돼 있어요. 사용자들은 이를 악용해 계속 파견노동자를 사용하죠. 대부분 3~6개월 초단기 파견이에요. 불법 파견이지만 2년 이상 근무하지 않아 구제할 방법이 없어요. 사용자가 벌금만 내면 돼요. 한 달에 잔업과 특근 60시간을 해도 월 120만 원 받는 이들의 고통이 계속되고 있는 상황이죠."

- 그렇지만, 이명박 정부는 친서민 정책을 전면에 내세우고 있잖아요. 어떻게 보세요?
"고용노동부는 제조업 등에 대해 파견을 확대할 계획을 세우고 있어요. 비정규직을 확대하겠다는 것인데, 이게 어떻게 친서민 정책인가요. 사회의 가장 밑바닥에 있는 사람들의 모습을 보면 알잖아요. 기륭전자가 2008년 단식 당시 교섭에서 우리를 외면했던 것도 이명박 정부의 압력 탓이라고 봐요."

대화 도중 여러 차례 언성을 높였던 김 분회장은 벽에 붙은 아이 사진을 보며 활짝 웃었다. 조합원들의 아이들이다. 긴 투쟁기간 동안 조합원들이 결혼해 아이를 낳았고, 이제 그 아이가 걸어 다닌다. 아직 결혼하지 않은 그는 "사진을 보면, 부모가 아이들에게 이런 세상을 물려주고 싶지 않은 마음을 알 것 같다"고 말했다. 

김소연(41) 금속노조 기륭전자분회장이 17일 오후 서울 금천구 가산동 옛 사옥 앞에 있는 컨테이너 박스에서 조합원 자녀들의 사진을 보며 웃고 있다.
 김소연(41) 금속노조 기륭전자분회장이 17일 오후 서울 금천구 가산동 옛 사옥 앞에 있는 컨테이너 박스에서 조합원 자녀들의 사진을 보며 웃고 있다.
ⓒ 선대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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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나를 죽이는 투쟁할 수도... 관심 가져 달라"

김 분회장에게 "기륭전자 해고자들이 비정규직 싸움이라는 짐을 홀로 지고 있는 것 아니냐"고 물었다. "원망은 없다"면서 "지금도 고통 받고 있는 수많은 비정규직 파견 노동자들을 생각해서 더 많은 관심을 가져줬으면 좋겠다는 바람뿐"이라고 밝혔다.

그는 2008년 단식 기간에 기자와 만나 "우리 사회는 야만의 사회가 됐다, 사람이 죽어 가는데 관심이 없다"고 분노했다. 현재 상황은 그때보다 더 안 좋다. 이날 김 분회장은 "상황에 따라 나를 죽이는 투쟁을 다시 할 수밖에 없다"며 "내년 2월 '투쟁 2000일 문화제' 같은 건 하고 싶지 않다"고 말했다.

김 분회장의 말에 <어디선가 나를 찾는 전화벨이 울리고>의 한 대목이 다시 떠올랐다. 윤 교수는 학생들에게 "여러분은 온갖 고난을 헤치며 강을 건너는 크리스토프인 동시에 그의 등에 업힌 아이"라며 강을 가장 잘 건너는 법에 대해 말한다. 이는 소설의 주제이기도 하고, 작가가 독자에게 하고 싶은 말이기도 하다.

서로가 서로에게 크리스토프가 되어주는 것이네. 강을 건너는 사람과 강을 건너게 해주는 사람이 따로 있는 게 아니라네. 때로는 크리스토프였다가 때로는 아이이기도 하며 서로가 서로를 강 이편에서 저편으로 실어 나르는 존재들이네.


태그:#기륭전자, #불법 파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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