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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이>에서 최 숙빈 역을 맡은 배우 한효주.
 <동이>에서 최 숙빈 역을 맡은 배우 한효주.
ⓒ MB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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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 희빈(이소연 분)에 대한 동이 최 숙빈(한효주 분)의 태도가 질적으로 변모하고 있다. 최 숙빈과 장 희빈의 숙명적 대결을 다루고 있는 MBC 드라마 <동이>에서, 이제까지 동이가 장 희빈에게 맞섰던 것은 '장 희빈이 불의를 저지르고 있다'이라는 인식 때문이었다.

그런데 8월 10일 제42부를 기점으로 동이는 '아버지를 억울한 죽음으로 내몬 장본인'이라는 인식에 기초하여 장 희빈에게 맞서고 있다. 

드라마 속에서 동이의 아버지 최효원(천호진 분)은 천민 비밀결사인 검계의 수장으로서 고위 관료들을 살해했다는 혐의로 관군에게 죽임을 당했다. 그러나 그것은 억울한 죽음이었다. 퇴계 이황을 정신적 지주로 삼은 정파인 남인당의 거두 오태석(가상의 인물)이 장 희빈과의 제휴 하에 자신들의 정치적 살인행위를 검계 조직의 소행으로 뒤집어씌웠던 것이다. 그런 오태석과 장 희빈의 비행이 제42부에서 낱낱이 드러났다.

라이벌 장 희빈이 자신의 아버지를 죽음으로 내몬 장본인이라는 사실을 알고, 평소 침착하던 동이는 중용을 잃고 "장 희빈을 용서할 수 없다"며 분노를 터뜨렸다. 부모를 죽인 자는 한 하늘을 이고 함께 살 수 없는 불구대천(不俱戴天)의 원수라 했다. 동이는 장 희빈에게 그런 증오심을 품고 있다. 이는 장 희빈을 저승으로 몰아넣게 될 동이의 장래 행보에 대해 사전에 정당성을 부여해주는 드라마적 장치라 할 수 있다.

'동이' 최숙빈은 왜 장희빈을 증오하게 됐을까

실제 역사 속에서도 최 숙빈은 장 희빈을 증오했다. 그런 증오를 낳은 2가지 계기가 있었다. 첫 번째 계기는 드라마 <동이>의 내용과 유사하지만, 두 번째 계기는 아직까지 드라마에서 제시되지 않았다.

최 숙빈이 장 희빈에게 증오심을 품게 된 첫 번째 계기는 인현왕후 폐위였던 것으로 판단된다. 숙종시대의 역사를 기록하고 있는 이문정의 <수문록>에 따르면, 숙종을 처음 만난 날에 최 숙빈은 숙종에게 자신이 인현왕후를 모신 적이 있다고 말했다. 한편, 구한말 궁중 여인들의 입을 통해 김용숙의 <조선조 궁중풍속 연구>에 실린 고종황제의 증언에 따르면, 최 숙빈은 본래 침방(바느질 부서) 소속의 궁녀였다고 한다.

바느질 도구를 앞에 놓고 있는 침방나인. 사진은 경기도 수원시 화성행궁에 있는 밀랍인형.
 바느질 도구를 앞에 놓고 있는 침방나인. 사진은 경기도 수원시 화성행궁에 있는 밀랍인형.
ⓒ 김종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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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문록>과 고종황제의 증언을 종합하면, 본래 침방나인이었던 최 숙빈은 나중에 인현왕후의 시녀가 되었다가 왕후의 폐위와 함께 침방나인으로 복귀했던 것으로 판단된다. 인현왕후 집안의 노비였다가 왕후와 함께 시녀로 입궁한 여인들은 왕후의 폐위와 함께 당연히 궐 밖으로 나갔지만, 최 숙빈처럼 처음부터 궁궐에 있었던 시녀들은 그렇게까지 할 필요는 없었던 것이다.

그런데 소설이라고도 하고 전기(傳記)라고도 하는 작자 미상의 <인현왕후전>에 의하면, 최 숙빈처럼 처음부터 궁궐에 있다가 인현왕후의 시녀가 된 궁녀들 중에서 3명이 폐위된 왕후를 따라 안국동 사저로 나갔다고 한다. 굳이 하지 않아도 될 일을 했으니, 그 세 명의 궁녀야말로 열혈 충성파라 할 수 있다.

물론 최 숙빈은 그 세 명 중에는 끼지 않았다. 하지만, 그는 자신이 섬기던 인현왕후에 대한 의리를 저버리지 않고 궁궐에서 남몰래 왕후의 생일 밥상을 차려놓고 기도를 올리는 충성심을 발휘하기도 했다. 한밤중에 촛불을 켜놓고 그런 행위를 하다가 숙종에게 발각되어 그와 인연을 맺게 된 것이다. 장 희빈이 중전이던 시기에 궁궐에서 남몰래 인현왕후의 생일을 기념했으니, 왕후의 폐위를 계기로 최 숙빈이 장 희빈에게 얼마나 증오심을 품었는지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최숙빈, 임신 상태에서 결박을 당하다

<수문록>에 따르면, 숙종을 처음 만난 날에 최 숙빈은 숙종에게 자신이 인현왕후에게 은혜를 많이 입었다고 말했다. 그처럼 자신에게 은혜를 베푼 인현왕후를 폐위시킨 장본인이라는 이유 때문에 장 희빈을 증오했을 수도 있다. 그에 더해, 힘겨운 침방 생활을 겨우 끝내고 중궁전의 시녀로 승격했는데 장 희빈 때문에 도로 침방으로 돌아가게 되었기 때문에 그에 대한 분노가 한층 더했을 수도 있다.

위와 같이 인현왕후 폐위를 계기로 장 희빈에게 증오심을 품게 된 것으로 보이지만, 이 당시의 감정은 장 희빈을 죽여 버리고 싶을 정도의 것은 아니었다. 그런 감정이 생길 이유가 없었다.

그런데 장 희빈을 죽이고 싶을 정도의 증오심이 생긴 결정적 계기가 있었다. 그 일은 최 숙빈이 숙종을 만난 이후에 발생했다. 정확히 표현하면, 그 일은 숙종과 잠자리를 하고 나서 최 숙빈의 신체에 변화가 생긴 이후에 발생했다.

장 희빈(이소연 분).
 장 희빈(이소연 분).
ⓒ MB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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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문록>에 따르면, 궐내에 임신한 궁녀가 있다는 첩보를 입수한 중전 장 희빈은 그 궁녀를 잡아들일 것을 지시했다. 이렇게 해서 최 숙빈은 장 희빈에게 끌려갔고 그 앞에서 결박을 당했다. 임신 상태에서 결박을 당한 것이다.

결박을 당한 상태에서 최 숙빈이 어느 정도의 린치를 당했는지는 사료 속에서 확인할 수 없다. 하지만, 때마침 숙종이 중궁전에 나타나 장 희빈을 제지하지 않았다면 뱃속의 태아가 어떻게 됐을지 알 수 없는 일이다.

<수문록>에 의하면, 숙종의 갑작스러운 출현에 당황한 장 희빈은 다급한 나머지 최 숙빈에게 큰 항아리를 덮어씌워 상황을 은폐하려 했다고 한다. 그러다가 숙종의 엄명에 눌려 항아리 속의 주인공을 숙종에게 보여주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장 희빈이 최 숙빈을 항아리로 가리려 했다는 것은 최 숙빈의 신체에 구타 흔적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그런 흔적이 없었다면 그냥 결박을 풀어주는 것으로써 상황을 모면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이는 숙종이 나타나기 전까지 장 희빈이 최 숙빈에게 신체적 폭력을 가하고 있었음을 의미하는 것인 동시에, 뱃속의 태아 역시 그만큼 위험에 처해 있었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숙종의 갑작스러운 출현이 최 숙빈은 물론 태아까지도 함께 구한 셈이다.

유산 경험할 뻔한 뒤, 증오심을 불태운 최숙빈

이처럼, 하마터면 장 희빈 때문에 첫아이를 잃을 뻔했던 경험은, 최 숙빈이 장 희빈에게 뿌리 깊은 증오심을 품도록 만든 결정적 계기가 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훗날 최 숙빈이 아무 증거도 없이 자신에 대한 장 희빈의 살인미수를 숙종에게 보고하여 장 희빈을 중전 자리에서 끌어내린 데에 이어, 역시 아무 증거도 없이 인현왕후에 대한 장 희빈의 저주행위를 숙종에게 보고하여 장 희빈을 죽음으로 몰아넣은 사실에서 알 수 있듯이, 최 숙빈은 장 희빈에 대해 죽이고 싶을 정도의 증오심을 갖고 있었다. 최 숙빈의 첫아이를 위험에 빠뜨린 장 희빈의 행동이 그런 엄청난 보복을 불러일으킨 것이다.

지금까지 살펴본 바와 같이, 장 희빈에 대한 최 숙빈의 증오는 2단계의 과정을 거쳐 발전했다. 처음에는 자신의 상전을 폐위시킨 장본인이라는 이유에서 증오심을 품게 되었지만, 이때만 해도 장 희빈을 불구대천의 원수로까지 여기지는 않았다.

하지만, 장 희빈 때문에 태아를 잃을 뻔한 경험을 한 이후로 최 숙빈은 장 희빈에게 불타는 증오심을 품게 되었다. 그것은 장 희빈과는 도저히 같은 하늘을 이고 살 수 없다는 그런 증오심이었다. 이런 증오심이 장 희빈에 대한 최 숙빈의 가혹한 보복을 낳은 결정적 요인이라고 볼 수 있다.


태그:#동이, #최숙빈, #장희빈, #숙종, #수문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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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imjongsung.com.일제청산연구소 연구위원,제15회 임종국상.유튜브 시사와역사 채널.저서:대논쟁 한국사,반일종족주의 무엇이 문제인가,조선상고사,나는 세종이다,역사추리 조선사,당쟁의 한국사,왜 미국은 북한을 이기지못하나,발해고(4권본),패권쟁탈의 한국사,한국 중국 일본 그들의 교과서가 가르치지 않는 역사,조선노비들,왕의여자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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