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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포를 떠난 청년 백범은 해남군 화산면 관두산 밑의 관동마을을 둘러보고 해남 이진사가 주선한 배편으로 고금도로 간다. 해남에 머물 때 다음과 같은 일화를 통해 당시의 사회 모습을 엿볼 수 있다.

"백범이 이진사 집에 머물 때 함께 지내던 객이 대여섯 명 되었고 그중에는 그 집에서 손님 노릇한 지가 8, 9년 된 자도 있었다고 한다. 손님이 일을 하면 주인이 가난해진다는 미신이 있어, 객들은 손가락 하나 쓰지 않고 주인과 같은 대우를 받았다. 당시는 아무리 대재산가라도 양반이 아니면 감히 밖으로 사랑문을 열지 못하였다. 왜냐하면 과객이 숙박을 청할 때 주인이 '간밤에는 어디서 유숙하였소?' 하는 말에, 만일 유숙한 집이 양반의 집이면 두말없지만, 중인의 집에서 잔 것 같으면 그 손을 타이르고, 반면에 상인이 과객을 맞아 재워 주게 되면 양반이 사사로이 잡아다가 형벌을 주는 등 별별 괴악한 습속이 많았기 때문이라고 한다."

해남 윤씨 집안의 사랑에서 유숙할 때는, 밤이 저물었는데 사랑문 앞 말뚝에 어떤 사람을 묶어놓고 가혹한 형벌을 가하며 주인이 추상같이 호령하였다.

"너 이놈, 죽일 놈, 양반이 작정하여 준 품삯대로 받는 것이 아니라 네 마음대로 올려 받느냐?"

벌을 받는 사람은 극구 사죄를 청했다. 백범은

"양반이 작정한 품삯은 얼마이고 상놈이 제 마음대로 올려받은 것은 얼마나 되오?"

하고 주인에게 물었다.

"내가 금년에는 동네 품삯을, 년은 두 푼, 놈은 서 푼씩 정하였는데, 저놈이 어느 댁 일을 하고 한 푼 더 받았기 때문에 징계하여 다스리는 것이오."

백범은 다시 물었다.

"노상의 행인들이 주막에서 먹는 음식값도 한 끼에 최하가 5, 6푼인데, 하루 품삯이 밥 한 상 값의 반액에도 못 미치면 혼자 살림도 유지해 나가기 어렵거든 하물며 집안 식구들을 데리고 어찌 생활을 하겠소?"

주인은 그래도 할 말이 있다.

"설사 한 집에 장정이 년놈 합하여 두 명이라 하면, 매일 한 사람씩이라도 양반집 일을 안 할 때가 없고, 일을 하는 날은 그놈의 집 식구가 다 같이 와서 밥을 먹소. 그러니 품삯을 많이 지불하여 상놈 집에 의식주가 풍족하게 되면 자연히 양반에게 공손치 못하게 될 것 아니오? 그래서 그같이 품삯을 작정하여 주는 것이오."

해남에서 여러 날 머물렀던 선생은 이곳에 뿌리 깊은 반상의 차별이 있는 것을 보고 크게 놀란다. 그는 어렸을 적부터 해주의 서촌에서 난 것을 늘 한탄하였는데, 당시 해남의 반상차별을 보고서 '양반의 낙원은 삼남(三南)이요 상놈의 낙원은 서북(西北)이다. 그나마 내가 해서의 상놈으로 난 것이 큰 행복이다'라고 했다.

백범은 고금도에서 충무공의 전적지를 둘러보는 등 임진왜란 때 조선을 침략한 왜구에 맞서 싸웠던 애국선열들의 유적지를 돌아보며 앞으로 걸어가야 할 인생행로를 계획했다.

완도 등지를 구경하고 장흥을 거쳐 보성으로 들어갔다. 보성군 득량면 삼정리 쇠실마을에는 안동 김씨 집성촌이 있었는데 종씨인 김광언 댁에서 약 40여 일 정도 머물면서 처음으로 콩잎죽을 쑤어서 먹는 경험을 하게 된다. 당시 백범은 김광언 댁 사랑에 묵으면서 밤에 일꾼들과 덕담을 나누고<동국사기> 등 글을 가르쳤다고 한다. 선생이 이곳을 떠날 때 동갑이던 선씨의 부인으로부터 필낭을 선물 받았다고 한다.

자전거 여행에는 아주 나쁜 4차선 신설 국도

영산호 하구언에 있는 삼호대교를 건너 49번 국도를 타고 영암방조제를 건넜다. 구성삼거리에서 806번 국도를 타고 가다 덕호리와 노송리 사이의 반송삼거리에서 진도와 해남을 연결하는 77번 국도로 가로 질러가는 지방도를 타고 77번 국도를 탔다.

고천암방조제를 지나 화산면으로 들어서며 오른쪽에 있는 관동마을로 들어섰다. 관동마을은 관두산 아래에 있는 아주 조그만 마을이다. 예전에는 이곳 앞에서 배가 떠났다고 한다. 그런 것으로 보아서 백범은 여기서 배편을 이용하여 고금도로 갔을 것이다. 인터넷신문 '우리힘닷컴'과 해남신문사에서 나를 맞아주었다.

관동마을을 감싸고 있는 관두산
 관동마을을 감싸고 있는 관두산
ⓒ 이규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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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번 국도를 타니 완도군청까지 갈 수 있었다. 군청에는 전남지부 회원과 완도신문사 사람들이 기다리고 있었다.

다음 날 77번 도로를 타고 완도와 신지도를 연결하는 신지대교를  건너 송곡항으로 갔다. 바로 눈앞에 보이는 고금도로 가는 배는 자주 있었다. 고금도에 도착하여 830번 도로를 타고 국가지정문화제인 묘당도 이충무공유적지로 갔다. 묘당도는 고금도에 딸린 섬으로 그 거리는 20리 안팎이었다.

이곳은 정유재란(1597년) 때에 이충무공이 본영을 설치하고 왜적을 물리쳤던 곳이다. 이충무공이 노량해전(1598년)에서 왜군과 싸우다가 적의 유탄에 맞아 순국하자 공의 유해를 이곳에 일단 봉안하였다가 고향인 충남 아산의 묘역으로 옮겼다. 명나라의 장수가 공의 전사를 애석히 여겨 여기서 서혈하고 귀국하였다는 비석이 남아 있다고 했다. 그러나 그러한 비석은 찾을 수 없었다. 길에서 만난 동네 사람 말이 관리가 제대로 되지 않아 나라에서 모두 가져갔다고 한다. 

충무공 이순신 장군 가묘 유허
 충무공 이순신 장군 가묘 유허
ⓒ 이규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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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곳 충무사는 본시 명군의 도독 진린이 관우을 배향했던 곳이다. 현종 때 그 곁에 암자를 지었고 순조 때(1801년)에 암자의 이름을 옥천사라 고쳤다. 그러나 일제강점기에 수난을 당해 제사도 끊기고 말기에는 관우의 상까지도 바닷물에 던져졌으나 불상만은 건져 다른 사찰로 옮겨졌다. 해방 후 관왕묘 옛 자리에 충무사를 새로 짓고 충무공을 모셔 제사를 지내고 있다.

고금대교를 건너 마량을 지나 23번 국도를 타고 강진으로 올라갔다. 2번 국도를 타고 장흥을 거쳐 보성으로 들어갔다. 새로 만들어진 전국의 4차선 국도는 정말이지 자전거 타는 데는 너무 안 좋다. 마을과 사람들로부터 격리되어 있고 매우 빠른 속도로 달리는 자동차의 소리 때문에 마음 편하게 달릴 수 없었다. 보성 인근에서 구도로를 탔다. 좀 돌았지만 마을을 볼 수 있고 사람들을 볼 수 있었다.

정신없이 물 마시는 사이 가 버린 마을 주민

보성군청을 지나고 다시 2번 국도를 타고 득량면으로 들어갔다. 그곳에는 '김구 은거의 집'이 있는 쇠실마을의 주민 한 분이 마중을 나와 있었다. 삼정리에 들어서니 마을 주민들이 모두 나와 환영을 해주셨다. 안타까운 것은 내가 물을 하염없이 마시며 정신을 차리고 있는 동안 하나 둘 빠져나가 함께 기념촬영을 못 한 것이다.

문화재로 지정된 ‘백범 김구 은거의 집’
 문화재로 지정된 ‘백범 김구 은거의 집’
ⓒ 이규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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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구 은거의 집'이 있는  쇠실마을은 입구에서 조금 더 올라가야 했다. '백범 김구 선생 은거 기념관'에서 전남동부지부 회원들이 너무도 반갑게 맞이해준다. '백범 김구 선생 은거 기념관'은 동네 분들이 정성을 다해 백범 선생 탄신 130주년에 건립한 것으로 다음과 같이 적혀 있다.

"민족의 큰 스승이신 백범 선생께서 이곳을 찾으신 때는 1898년 5월(음)이었다. 김두호라 칭한 23세의 젊은 선생은 김승묵(자: 광언) 댁에서 달포여를 머물며 동국역대라는 국사책을 중심으로 시대상을 논하였다. 실은 명성황후를 시해한 일인들에 대한 적개심으로 치하포에서 일본인 쓰치다 중위를 죽이고 사형을 언도 받아 인천감옥에서 복역 중 후일을 위해 탈옥을 감행하여 피신을 위해 삼남 지방으로 내려오신 길이었다. 떠나실 때에야 '내가 일본사람을 죽이고 피해 다닌다'는 말을 하고 동국역대 표지에 이별의 아쉬움을 '이별난'이라는 시로 남기고, '내가 죽지 않으면 연락을 하겠다'며 떠나셨다.

그 후 40여성상을 생사도 알 수 없었던 터에 해방 후 환국한 선생께서 1946년 가을 이곳을 찾으시어 옛날을 회상하시고 은혜에 감사하였고 가가호호에 대형 존영과 휘호 등을 하사하시어 지금껏 소중히 간직하고 있다. 1990년에 주민들의 열화같은 호응과 보성군의 도움으로 은거비를 세웠으나 내용이 빈약했던 바 2006년에야 주민들의 숙원사업으로 은거 기념관을 지을 것을 건의하여 전라남도의 후원 및 서울 백범 선생 기념사업회의 도움으로 본 기념관의 준공을 보게 되었다. 이 시설은 모든 국민과 특히 이 고장 청소년들의 산교육장화로 선생의 정신 계승 및 국가 발전에 기여하게 될 것이다."

위에서 언급한 '이별난'이란 시를 지금 김구 은거의 집 주인이 내준다. 한시이나 번역된 것은 다음과 같다.

이별하기란 어렵구나 참으로 이별은 어려운데
이별한 곳에서 일가의 정이 솟구쳐
꽃나무 한 가지를 꺾어 절반씩을 나눠
한 가지는 종가댁에 남겨두고 한 가지는 가지고 떠납니다.
넓은 천지에 살아서 또 만날 것인지
이 강산을 버리고 떠나기도 또한 어려운 일인데
네 사람이 함께 한 달여 동안 한가로이 놀고 지내다
이별을 아쉬워하며 덧없이 떠납니다.
먼 훗날 이것을 보시게 되면 혹시 오늘의 나를
회상할까 생각되어 정표로 남겨 두고
멀리멀리 떠나갑니다.

쇠실마을은 보성에서도 깊은 골짜기에 속한 안동 김씨의 집성촌으로, 큰길가에서 들어가 앉아 있어서 잘 보이지 않았다. 당시 몸과 마음이 모두 지쳐 있던 백범 선생이 오랜만에 편히 쉬며 앞날을 위한 힘을 축적하기에 적당한 곳으로 보였다. 청년 백범은 1898년 여름 무렵 이곳 김광언 댁에서 40여 일 동안 은거하면서 동네사람들에게 우리의 역사를 가르치고 독립의식을 고취하다 다른 곳으로 옮겨갔다.

어지럽던 시대 그의 은거를 도왔던 마을 사람들에 대한 고마움은 광복 후 1946년 9월 보은을 방문을 하면서 더욱 빛나게 된다. 후손들은 그때의 일을 자랑스럽게 여기며 김구선생이 건네준 역사책과 글을 보존하고 있다. 마을에서 내려다보는 풍경은 마음을 편안하게 해준다.

김광언의 증손자인 집주인 김태만 선생은 당시의 상황을 상세하게 설명하며 백범 선생이 떠난다고 했을 때 이웃의 가난한 마을 주민이 한 마리밖에 없는 씨암탉을 잡아 대접하여 처음으로 고기 맛을 보았다고 전한다.

쇠실마을에서 마을 주민 및 전남동부지부 회원과 함께
 쇠실마을에서 마을 주민 및 전남동부지부 회원과 함께
ⓒ 이규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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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그:#백범, #은거의 집, #관동마을, #쇠실마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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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학을 통해 사회를 분석한 <오지랖 넓은 수학의 여행>, 역사가 담긴 자전거기행문 <미안해요! 베트남>, <체게바를 따라 무작정 쿠바횡단>, <장준하 구국장정6천리 따라 자전거기행> 출간. 전 대전환경운동연합 의장, 전 민족문제연구소 운영위원장, 현 배재대 명예교수, 피리와 클라리넷 연주자로 활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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