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 프로야구 올스타전이 열렸던 지난 7월 24일에는 경기에 앞서 뜻깊은 행사가 열렸다. '삼성 라이온즈 레전드 올스타'들이 그라운드에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김시진 투수(넥센 히어로즈 감독)와 이만수 포수(SK 와이번스 2군 감독)를 비롯한 '대구의 영웅'들이 그 때 그 유니폼을 입고 각자의 포지션에 자리하며 팬들의 향수를 자극했다.

그리고 올스타전의 흥분이 채 가라 앉지도 않은 26일 오후, 대구가 자랑하는, 아니 한국 프로야구가 자랑하는 또 한 명의 '전설'이 은퇴를 선언했다. 바로 '파란 피가 흐르는 사나이' 양준혁이다.

'프로 적응 기간' 생략한 '괴물 타자' 양준혁

 양준혁은 프로에 입단하자마자 '적응기간'을 건너 뛰었다.

양준혁은 프로에 입단하자마자 '적응기간'을 건너 뛰었다. ⓒ 삼성 라이온즈

양준혁은 영남대 시절부터 대학야구 최고의 강타자로 이름을 날렸지만, 신인 드래프트에서 삼성의 부름을 받지 못했다.

투수 보강에 열을 올렸던 삼성에서 계명대의 좌완투수 김태한을 지명했기 때문이다(양준혁과 김태한은 대구상고 동기다).

양준혁은 2차 지명에서 쌍방울 레이더스의 지명을 받았지만, 그는 쌍방울에 입단하지 않고 돌연 군입대를 택했다.

당시 1년에 불과했던 2차지명 보유권 규정을 교묘하게 이용했다는 비판도 있었지만, 그만큼 고향팀에 대한 양준혁의 애정이 강했다는 증거이기도 하다.

결국 양준혁은 다음 해 삼성에 1차지명을 받고, 1993년부터 프로무대에 뛰어 들었다. 많은 대형신인들이 입단 초기 프로 무대에 적응하지 못해 고전하는 경우가 많지만, 양준혁에게 그런 과정은 필요 없었다.

양준혁은 첫해부터 타율 .341 23홈런 90타점 82득점으로 타격 3관왕(타율, 출루율, 장타율)을 차지해 버린 것이다. 그 해 홈런과 타점 타이틀을 차지한 또 한 명의 '괴물' 김성래가 없었다면 2006년의 류현진보다 훨씬 앞서 신인왕, MVP에 동시 등극하는 선수가 탄생했을 것이다.

이후 양준혁에게는 거칠 것이 없었다. 입단 후 6년 동안 타격왕 3회, 최다안타 2회, 장타율 2회, 출루율과 타점왕 각 1회에 오르며 프로야구 최고의 타자로 군림하게 된다.

투수 보강 원했던 삼성의 선택에 따른 3년의 방황

 99년엔 해태로의 트레이드를 거부하며 선수 생활에 큰 위기를 맞기도 했다.

99년엔 해태로의 트레이드를 거부하며 선수 생활에 큰 위기를 맞기도 했다. ⓒ 삼성 라이온즈

그러나 삼성은 1985년 통합우승을 제외하면 단 한 번도 한국시리즈 우승을 차지하지 못했다. 리그최강을 자랑하는 타선에 비해 투수력이 2% 부족했기 때문이다.

이에 삼성은 1999년 해태 타이거즈의 특급 마무리 임창용을 데려 오기 위해 양준혁을 트레이드 명단에 올렸다. 고향팀에 입단하기 위해 프로 진출을 1년이나 늦췄던 양준혁으로서는 삼성 구단에 배신을 당한 기분이었을 터.

양준혁은 기자회견을 열어 트레이드 거부 의사를 밝히며 해외 진출을 모색하기도 했지만, 김응용 감독(현 심성 사장)의 설득으로 우여곡절 끝에 해태 유니폼을 입었다.

무너져 가는 '해태 왕조'에서 의욕이 생길리 만무했지만, 양준혁의 야구는 조금도 변하지 않았다. 양준혁은 그 해 타율 .323 32홈런 105타점으로 자신의 시즌 최다 홈런과 타점 기록을 경신한다.

2000년 시즌을 앞두고 다시 LG트윈스로 트레이드 됐지만, 2001년 .355의 타율로 생애 4번째 타격왕에 오르며 건재를 과시했다. 그라운드 안팎에서 갖은 고초와 마음고생을 겪었지만 양준혁의 프로 정신은 언제나 한결 같았다.

FA가 되자마자 다시 고향으로 돌아온 양준혁

 한결같은 표정만큼이나 늘 한결같은 활약을 펼친 양준혁

한결같은 표정만큼이나 늘 한결같은 활약을 펼친 양준혁 ⓒ 삼성 라이온즈

2001 시즌이 끝나고 양준혁은 드디어 자유계약 선수(FA) 자격을 얻었다. 데뷔 후 한 번도 3할 타율을 놓친 적 없는 거물이었지만, 선수협회 참가 경력 때문에 기피인물이 돼 있었다.

그러나 해태 시절 인연을 맺었던 김응용 당시 삼성 감독이 팀에 강력하게 양준혁 영입을 요청했고, 결국 양준혁은 3년의 방황 끝에 다시 고향팀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컴백 첫해 양준혁은 처음으로 3할 타율에 실패하며 프로 입단 후 최악의 시즌(타율 .276 14홈런 50타점)을 보냈지만, 팀원들을 잘 다독이며 삼성의 첫 한국시리즈 우승을 이끌었다.

이후 양준혁은 5차례나 3할 타율을 기록하고, 경기출장, 타수, 안타, 홈런, 타점, 득점, 사사구, 루타 등 도루를 제외한 거의 모든 부문의 통산 기록을 모조리 갈아 치우며 프로야구를 대표하는 최고의 강타자로 명성을 떨쳤다.

삼성도 2002년에 이어 2005, 2006년에도 한국시리즈 우승을 차지하며 전성기를 맞는다. 양준혁이 데뷔 후 처음으로 100경기 이상을 뛰지 못했던 2009년, 삼성은 15년 만에 포스트시즌 진출에 실패하게 된다(당시 41세였던 양준혁의 타율은 무려 .329였다).

그런 양준혁이 2010 시즌 올스타전이 끝난 직후 돌연 은퇴를 선언했다. 이제는 마지막으로 기억될 올스타전 홈 관중들 앞에서 양준혁은 멋진 3점 홈런을 터트렸다.

'양신', 연인의 품에서 은퇴를 택하다

전성기가 지난 것은 분명하지만, 양준혁은 여전히 .387의 준수한 출루율을 기록하고 있던 수준급 타자다. 삼성에서도 양준혁이 선수생활 연장을 원한다면 조건없이 그를 풀어 주겠다고 약속도 했다.

그러나 양준혁은 자신이 세운 위대한 기록들을 계속 이어가는 대신 '가장 오래된 연인(삼성)의 품에서 그만 둘 수 있는 행복'을 선택했다. 그러면서 이대호(롯데 자이언츠)나 김현수(두산 베어스) 같은 후배들에게 자신을 넘으라고 애정 어린 조언도 아끼지 않았다.

프로 야구에는 많은 신이 존재한다. 입단 후 5년 동안 세 번이나 팀을 한국시리즈 우승으로 이끈 '해태 왕조의 마지막 황제' 이종범은 '종범신', 4년 연속 최하위라는 암울한 시기에도 묵묵히 거인 마운드를 지켰던 손민한은 '민한신'으로 불린다.

이종범과 손민한 모두 광주와 부산 야구팬들의 신으로 불리기 부족함 없는 '영웅'들이다. 양준혁 역시 대구의 야구팬들을 통해 '양신'이라는 별명이 붙었지만, 양준혁이라면 '대구팬의 신'이 아닌 야구팬 모두의 신이라 해도 부족함이 없을 듯 하다.

비록 지금은 1군 엔트리에서 제외됐지만, 아직 양준혁은 현역 선수다. 그가 언젠가 다시 1군에 돌아오게 되면 그의 작은 몸짓 하나라도 잘 기억해 두자. 내년이 되면 분명 위풍당당한 '양신'의 모습이 그리워질 것이기 때문이다.

 연인의 품에서 그만 둘 수 있어 행복하다는 양신

연인의 품에서 그만 둘 수 있어 행복하다는 양신 ⓒ 삼성 라이온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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