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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자친구랑 섹스 하죠? 다리가 너무 예뻐요. 조개 무진장 드시네, 정말. 나는 다른 조개 먹고 싶은데."

 

혹시 강용석 의원의 또 다른 성희롱 발언이냐고? 비슷하지만 아니다. 그럼 이건 어떤가.

 

"교육계는 굉장히 엄격하고 고지식한 곳이에요. 내가 한번이라도 최 선생에게 선배 대접 받으려고 무게 잡은 적 있어요? 그런 사고방식으로는 여기서 살아남지를 못해요."

 

 

아나운서 모략하고, 대통령 운운하며, 타당 여성 국회의원 비하한 강용석 의원 못지않다. 영화 <연애의 목적>의 고등학교 선생 이유림(박해일)이 저 발언의 주인공이다. 다른 점이 있다면, 다소 사적인 후배 교사와의 술자리였고, 좀 더 직접적으로 키스와 잠자리를 읍소했다는 점이다.

 

<불편해도 괜찮아>(국가인권위원회 기획, 창비 펴냄)의 저자 김두식 교수는 꽤나 많은 관객들이 본 이 대중영화에 대해 "이 두 사람의 관계는 점수를 매기고 점수를 받는 권력 관계"라고 비판한다. 또 사실상 강간에 가까운 장면이 포함된 영화를 두고 "유혹이라고 표현하며 발칙 유쾌한 연애의 밀고 당기기로 묘사하는 사람들은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는 건지 모르겠다"고 일갈한다.

 

법학자이자 인권활동가인 김두식 교수가 건드리는 인권 이야기는 이렇게 친숙하면서도 거침없다. 심지어 성실한 영화 친구이자 리뷰어 마냥 인권을 소재로 한 영화를 보고 싶도록 만드는 저력을 지녔다. 반면 한국사회의 불편한 이면은 쿡쿡 후벼 판다. 꽤나 아프다.

 

그런데 그 불편함이 인권감수성의 시작이라고 말한다. 심지어 "'불편의 세계'에 눈을 뜨면, 이전에 보지 못한 새로운 세상을 보게 될 것이다"라고 유혹한다. 이 <불편해도 괜찮아>를  읽다 보면 어느새 고개를 끄덕이며 한국사회와 인권에 대해 다시금 성찰하고 있는 자신을 만나게 된다.

 

인권 의식의 시작, 사춘기 딸과 눈높이를 맞추는 것처럼

 

김두식 교수는 드라마 <네 멋대로 해라>에서 '서로를 긍휼히 여기는 마음'으로 상대방을 정직하게 사랑하는 복수(양동근)와 전경(이나영)에게 감명을 받았다고 한다. 그리고 '지랄'을 입에 달고 살았던 사춘기 딸에게 전화를 걸어 "아빠가 이 드라마를 보면서 함께 이야기 하고 싶은 게 있었는데…"라고 전화했던 경험을 고백한다. 

 

그러면서 "목표했던 대학을 가지 못하면 평생 열등감에 빠져 살기 쉽다. 네가 그런 열등감에 빠지지 않을 자신만 있다면 공부 안 해도 괜찮다"며 자신 또한 학벌은 중요하지 않다고 목소리를 높여왔지만, 결국 듣기 좋은 말로 딸을 압박했을지도 모를 자신을 돌아본다.

 

사실 인권의식의 시작은 김 교수와 딸의 이야기처럼 눈높이를 타인의 시선에 맞추는 것으로 출발한다. 김 교수는 "차별하는 입장을 이해하게 되면 그 입장 때문에 생긴 내 마음의 불편을 감수하는 일이 한결 수월해지고, 대신 차별하는 사람들에 대해 이전에 느끼지 못했던 불편을 느끼게 된다"고 설명한다.

 

그러한 불편에 대해 학습시켜 주며, 또한 그러한 불편을 쉽게 완화시켜 주는 것으로 김 교수가 선택한 것이 대중적인 화법의 영화와 드라마 80여 편이다. 청소년, 성소수자, 장애인, 양심적 병역거부자 등 소수자의 인권을 비롯해 종교, 여성폭력, 표현의 자유, 인종차별, 제노사이드(인종청소)에 이르기까지. 김 교수는 이렇게 미시적으로 보이는 사안에서부터 거대담론에 이르기까지 인권감수성을 길어 오르기 위해 종횡무진한다.

 

초콜릿 복근에 열풍을 일으켰던 영화 <300>에서 장애인과 동양에 대한 편견을 읽고, 드라마 <내 이름은 김삼순>과 <미안하다, 사랑한다>에서 뺨 때리는 한국 드라마 속 여성에 대한 폭력을 감지하며, 파격적인 정사신으로 화제가 됐던 <색, 계>에서 검열이 작동하는 한국 사회의 표현의 자유를 회고한다.

 

<헌법의 풍경>, <불멸의 신성가족> 등에서 선구적으로 법조계 현실을 내부 고발했던 김 교수는 그러나 섣불리 인권의 중요성을 강조하거나 짐짓 훈계조로 인권의식을 설파하지 않는다. 사춘기 딸과의 에피소드로 책을 시작한 것처럼, 쉽게 접할 수 있는 영화이야기 속 인권에 대한 시선을 전달하는 동시에 담담하게 경험담과 자기 고백을 녹여낸다. 인권감수성의 출발인 '다른 사람의 입장 되어보기'를 한 권의 책을 통해 몸소 실천해 보이고 있는 셈이다.

 

결국 우리가 만들어온 한국사회라는 '괴물'

 

그러나 <불편해서 괜찮아>의 화살은 아무리 서구 저편, 역사 저 멀리로 쏘아 보낸다 해도 결국 한국사회의 현실로 되돌아온다. 사실 이 불편함은 인권에 대한 무지함을 학습 받고 강요받으면서 살을 부대끼고 살아온 '한국사회'의 '우리'가 함께 만들어온 것일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이런 식이다. 중학생 딸과 마찬가지로 교복을 입고 학교에 다닌 김 교수는 획일적인 종교적 신념에 대해 까발리는 <다우트>를 통해 결국은 '통제'와 '규율'을 이야기한다. 이러한 문제의식은 <발레교습소>라는 현실감 넘치는 우리 영화를 거쳐 교복과 체벌, 일제고사가 엄연히 존재하는 한국의 교육 현실을 돌아보게 만든다.

 

또 1980년대 영국 보수당의 폭압에 스러져갔던 탄광촌을 배경으로 한 <빌리 엘리어트>와 <브래스트 오프>의 이야기를 따라가다 보면,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현실과 최저임금제와  삼성반도체 공장에서 백혈병을 얻어 죽어간 우리네 노동자들을 떠올릴 수밖에 없다. 물론 김 교수는 울산 현대자동차에 근무하는 식당 아줌마들의 파업을 그린 <밥·꽃·양>, 홈에버 여성노동자들의 투쟁을 조명한 <외박> 등을 소개하는 친절함도 잊지 않고 있다.

 

그러니까 사실 <불편해도 괜찮아>는 우리 안의 미시적인 불편함으로부터 시작해 한국사회 곳곳에 포진한 폭력과 마주해야 한다고 독려한다. 그런 과정을 거쳐야만 비로소 국가에 의해 자행되는 궁극의 폭력인 제노사이드가 결코 역사 속 혹은 남의 나라 이야기가 아니라는 통찰에 이르게 된다는 뜻이기도 하다.

 

우리는 종종 '틀림'과 '다름'을 무의식 차원에서 잘 못 내뱉곤 하는 자신들을 발견하곤 한다. 다름을 인정하지 않는 사회 배후에는 정치적, 경제적, 종교적 이익을 누리는 기득권층이 있다고 얘기하는 김두식 교수의 부드러운 목소리는 여전히, 앞으로도 유의미할 것으로 보인다.

 

"결국 차이를 인정하고 함께 사는 것 이외에는 다른 길이 없습니다. 그걸 알고 나면 한결 마음이 편해집니다."

 

인권 감수성을 고취해 줄 <불편해도 괜찮아> 중 뽑은 '강추' 영화

- 제1장 네 멋대로 해라 : 청소년 인권

<날아라 펭귄> 임순례 2009, <발레교습소> 변영주 2004, <다우트> 존 패트릭 샌리 2008

- 제2장 왜 이렇게 불편할까? : 성소수자 인권

<여고괴담 두 번째 이야기> 김태용, 민규동 1999, <로드무비> 김인식 2002, <후회하지 않아> 이송희일 2006, <밀크> 구스 반 산트 2008

- 제3장 뺨따귀로 사랑 표현하기 : 여성과 폭력

<똥파리> 양익준 2009, <안토니아스 라인> 마를린 호리스 1995, <가족의 탄생> 김태용 2006

- 제4장 공주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을까? : 장애인 인권

<오아시스> 이창동 2002, <포레스트 검프> 로버트 저메키스 1994

- 제5장 한국의 <빌리 엘리어트>는 언제 나올까? : 노동자의 차별과 단점

<빌리 엘리어트> 스티븐 달드리 2000, <브래스트 오프> 마크 허먼 1996, <밥·꽃·양> 임인애, 서은주 2002, <외박> 김미례 2009

- 제6장 1년에 600명의 청년들이 교도소에 가는 나라 : 종교와 양심에 따른 병역거부

<밀양> 이창동 2007, <방문자> 신동일 2006, <용서받지 못한 자> 윤종빈 2005, <바시르와 왈츠를> 아리 풀먼 2008

- 제7장 영화 화면을 자르는 사람들 : 검열과 표현의 자유

<색, 계> 리 안 2007, <반두비> 신동일 2008, <친구 사이> 김조광수 2009

- 제8장 누가 앵무새를 죽였는가? : 인종차별의 문제

<앵무새 죽이기> 로버트 멀리건 1962, <커포티> 베닛 밀러 2005, <박치기> 2004, <거류> 김소영 2000

- 제9장 그냥 다 죽이면 간단하지 않나요? : 차별의 종착역, 제노사이드

<호텔 르완다> 테리 조지 2004, <타인의 삶> 플로리안 헨켈 폰 도너스마르크 2006, <체인질링> 클린트 이스트우드 2008, <카운터페이터> 슈테판 루조비츠키 2007

 

*(제목, 감독, 년도 순)


태그:#김두식, #불편해도괜찮아, #인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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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작업 의뢰 woodyh@hanmail.net, 전 무비스트, FLIM2.0, Korean Cinema Today, 오마이뉴스 등 취재기자, 영화 대중문화 칼럼니스트, 시나리오 작가, 각본, '4.3과 친구들 영화제' 기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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