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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장면
 자장면
ⓒ 조종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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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 맛있다."

남편과 둘이 집 앞 골목에서 자장면을 시켰다. 둘이서 밖에 볼일을 보고 들어오다가 점심때를 놓치기도 했고, 열에 달궈진 후텁지근한 집에 들어가서 따로 밥을 챙기는 일도 망설여졌다. 직접 가서 먹으면 500원이 할인된다는 중국집은 우리 집에서 불과 20여 미터 밖에 떨어져 있지 않다.

"이 동네 이사온 지 일년이 됐는데 여기 오기는 첨이다. 에어컨 들어오는 데서 먹으니까 더 맛있다. 우리 자주, 아니 가끔 와서 먹을까? 동네 경제도 생각해야쥐~ "

자장면을 마주 놓고 먹으면서 나는 어린애처럼 쫑알댔다. 자장면을 먹고 있으니 뭔가 '별일'이 있는 날 같았지만, 찜통 같은 날씨에 수박을 실은 트럭에서 여느 때처럼 마이크소리가 골목을 누비는 그저 그렇고 그런 한여름 날이었다. 여기까지는 그런 줄 알았다.

자장면 두어 젓가락 남겨놓고 울린 휴대전화

점심 때가 지나서 그런지 손님은 우리뿐이었다. 부부가 꾸려나가는 중국집은 따로 배달원을 두지 않고 주인 아주머니가 직접 오토바이로 배달한다. 주방에서는 아저씨가 주문 음식에 맞춰 요리하느라고 바쁘다. 자장면 두어 젓가락을 남겨놓고 남편의 휴대전화가 울렸다.

"아, 네. 아, 그래요. 네, 네…."   
"어디?"

단순하고 건조한 통화를 끝낸 남편에게 물었다. 그다지 유쾌한 내용으로 짐작되진 않았다. 겸연쩍게 웃는 남편은 별 일 아닌 듯, 남 얘기 하듯 말했다.

" 'a대학' 조교한테 전화가 왔는데 다음 학기 강의가 어렵게 됐대. 하긴 점수를 그렇게 줬으니 뭐, 학교에서야 좋아할 리가 없겠지."
"그래서, 당신을 잘랐구나."

지난 6월 중순쯤부터 대학교는 종강이 시작되었다. 그즈음 해서 남편은 시간강사로 출강하는 학교마다 학생들 시험지를 한 가방씩 들고 왔다.

수북이 쌓인 시험지에 점수를 매기고, 안방 가득 점수별로 쫙 펼쳐놓은 시험지를 보는 일은 일년에 두 번씩 벌어지는 우리 집 연례행사다. 그 점수를 컴퓨터에 입력하는 남편을 보면서, 며칠을 잡아먹는 저 시간도 시간강의를 하는 강사들에게는 시간당 보상을 해줘야 하는 거 아닐까 생각하지만, 혼자 깊은 숨을 들이쉬며 그저 남편을 안쓰러운 마음으로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출석도 안 하고, 시험지에 문제만 써냈는데 어찌 점수를 주나"

<강원일보>에 실린 시간강사를 '메뚜기족'에 비유한 칼럼
▲ 시간강사와 메뚜기족 <강원일보>에 실린 시간강사를 '메뚜기족'에 비유한 칼럼
ⓒ 강원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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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편이 조교로부터 전화를 받고나자 얼마 전, 남편이 어떤 학생과 전화통화를 했던 게 생각났다.

"아니, 자네가 아무리 축구선수라도 그렇지. 출석도 안 하고, 시험지에 문제만 써냈는데 무슨 근거로 내가 점수를 주나? 그렇게는 할 수 없어. 음, 안 돼!"

남편은 단호했다. 옆에서 듣기만 했는데 학생이 무엇을 요구하는지 훤하게 알 수 있는 내용이었다. 이와 비슷한 전화는 이번뿐만이 아니다. 남편이 강의를 시작한 20여 년 가까이  내내 있어왔다.

지금이야 남편이 자기 휴대전화로 직접 전화를 받을 수 있지만, 휴대전화가 없던 시절엔 시험만 보면 나는 전화 노이로제에 걸릴 정도였다. 그게 귀찮아서 나는 '웬만하면' 학생들 점수 너무 야박하게 주지 말라고 말할 정도였다.

시험이 끝날 때마다 한보따리씩 갖고 오는 학생들의 시험 답지를 옆에서 볼라치면 대학마다 조금씩 차이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읽으면서 감동이 일고 이름이 궁금해지는 학생이 있는가 하면, 아예 이름만 써놓고 백지상태 그대로 낸 답지도 있다. 그런가 하면 무슨 얘기를 써놨는지 도무지 대학생이라고는 믿기 어려울 정도의 무성의한 답지도 부지기수다.

한 학기에 400만 원 넘어 500만 원 육박하는 비싼 등록금을 내고, 어떤 자세로 공부하는 학생들일지는 짐작하기 어렵지 않지만, 학생이 '내가 학교 이미지를 높이는데 성적은 알아서 줘야 하는 것 아닌가' 하는 태도와 분위기로 시간강사에게 성적 요구를 한다는 건 어이가 없다. 어쩌면 이런 분위기 자체를 학교에서 조장하고 있는 건 아닐까 싶기도 하다.

남편은 그런 학생들에게 낙제점수인 'F학점'을 주었다. 이건 학생을 가르치는 선생으로서 당연하고 올바른 점수이다. 남편이 담당한 과목을 듣는 60명 학생 중에서 20여 명에게 'F학점을 내리 쏘았으니' 30%가 넘는 낙제점수에 학교에서도 '이게 뭔가?' 했을 것 같다. 그렇다고 F학점이 지당한 학생들에게 '융단폭격(시험답안에 관계없이 좋은 점수를 주는 것)'을 한다는 건, 남편의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았을 것이다.

축구선수라고 했던 학생의 전화를 받은 그 다음날, 남편은 학교측으로부터 전화를 받았다. 어떻게 점수 조정이 안 되겠느냐는 얘기였다. 뿐만 아니라 '윗선'에서도 문자가 왔단다. 학생들 점수가 나쁘면 졸업과 취업에도 문제가 있고, 학교 이미지에도 좋은 영향을 줄 수 없다는 거였다. 남편은 그렇게 해줄 수 없다고 말했다. 그리고 우리 부부가 모처럼 동네 중국집에서 맛있게 자장면을 먹고 있는 시간에, 학교의 조교로부터 전화를 받은 것이다.

조교의 전화 한 통화로 끝, 참 깔끔하죠?

남편이 7, 8년 동안 성실하게 강의를 해왔던 'a대학'의 강의가 이제 끊어졌다. 그것도 학교의 결정권자로부터가 아닌, 조교를 통해 일방적으로 '해고'가 된 것이다. 그렇다고 이런 사정을 누구한테 하소연할 수 있으랴. 교원자격 없는 시간강사인 만큼 복잡하게 부딪칠 것 없이 조교의 말 한마디로 깨끗하게 정리가 되는 현실, 일반 일용잡부만도 못한 시간강사의 현실이 아닐 수 없다. 

남편의 전공은 철학이다. 'a대학'에선 주로 교양과목을 담당했고 지난 학기엔 일주일에 2시간씩 한달 8시간을 강의했다. 지역의 사립대인데 강사료가 시간당 3만 원도 채 안 되어서 한 달 수입이 23만 얼마였다. 학생들이 잘 모이지 않는 철학과에서 남편의 '짜고' 소신껏 매긴 점수는 학교로서 그리 달갑지 않았으리라.

"당신 잘렸는데, 자장면 참 맛있네."
"하하, 그래, 당신 말대로 가끔, 자주 오자!"

남편의 웃음 너머로 희끗한 흰머리가 선명하게 다가온다. 우린 자주, 아니 가끔이라도 '동네경제' 생각하며 자장면을 먹을 수 있을까?   


태그:#시간강사, #자장면, #철학, #소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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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에게 가면을 줘보게, 그럼 진실을 말하게 될 테니까. 오스카와일드<거짓의 쇠락>p1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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