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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가 취한 척 어깨에 기대어 오는 순간 어떻게 하겠는가? 2초 이상 망설였다면 당신은 아직 멀었다. Sexy Utility…"

 

국내 모 자동차 광고 문구다. 남녀 관계에서 과단성을 보이지 못하는 남성에 대한 원초적 자존심 건드리기다. 오늘날 매체에서는 상업성과 결합한 섹시코드가 난무하고 대중의 성적 상상력을 부추기는 데 거리낌이 없다.

 

 

그러나 현실에서 여성에게 가해지는 순결의 이중 잣대는 여전하고, 성관계 결과 잉태될 수 있는 생명에 대한 고민은 없다. 임신과 낙태의 문제는 대중이 성가시게 느끼는 저출산 문제 대책과 같은 구호로 남겨져 있을 뿐이다. 그리고 출산율 증가 구호만 외치던 정부는 이제야 겨우 현실로서 낙태문제에 대해 돌아보는 모양새다.

 

26일 법무부 형사법개정특별심의위원회에서 '낙태죄' 관련 개정시안이 일부 위원에 의해 거론되었다. 시안 방향성에서 '임신 8주 이내 초기 낙태는 허용하자'는 주장이 힘을 얻고 있지만 이 또한 생명체 기준에 대한 기간 설정에 있어 많은 논쟁을 불러일으킬 것으로 예상된다.

 

개정 논의는 느린 걸음, 닥쳐오는 현실의 벽

 

현실적 낙태 관련 규정이 겨우 구체적 논의의 진입단계에 머무르는 가운데 산술적인 출산율 상승을 위해 정부가 처벌 압박을 가하고 있는 '낙태죄' 문제는 어느 날 당신에게도 닥쳐올 수 있는 문제다.

 

지난 6월 청첩장까지 돌린 상태에서 양가의 불화로 불행한 파혼을 맞은 20대 물리치료사 김아무개씨(가명). 이 여성은 파혼 후에야 자신의 임신 사실을 알게 됐다. 그녀는 한국 사회에서 결혼하지 않고 아이를 기를 만큼 담대하지 못했다. 그런데 임신 사실을 알게 된 남자 집안에서는 아이를 낳아서 자신들에게 보내달라고 했다. 그러나 여성은 이미 남성과 결별한 상태에서 (남자 측의 요구대로라면) 헤어져야 할 아이를 낳기보다 낙태를 선택했다. 남성은 자신의 옛 여자친구를 '낙태죄'로 경찰서에 고발했다. 정부가 낙태 단속을 강화하는 최근 분위기에서 여성에 대한 처벌이 가능해진 분위기를 읽어냈던 것이다.

 

현행 '형법 269조 1항'은 '임신한 부녀가 약물을 이용하거나 기타 방법으로 스스로 낙태한 때에는 1년 이하의 징역 또는 200만 원 이하의 벌금에 처한다'고 나와 있다. '270조 1항'의 경우엔 '의사·한의사·조산원·약제사 또는 약종상(藥種商)이 부녀의 촉탁이나 승낙을 받아 낙태하게 한 때에는 2년 이하의 징역에 처한다'고 규정되어 있다. 한편 함께 아이를 잉태케 한 남성의 경우엔 아예 낙태죄 처벌 대상 항목에 존재하지 않는다.

 

6월 21일 경찰의 출두 명령을 받은 김씨는 당황해서 한국여성민우회에 상담을 요청했다. 김씨의 기소 여부는 조사를 받은 시점인 22일에서 약 2개월 경과한 8월 중순 그 결과가 나오게 된다. 이 사건의 주목도가 높은 이유는 만일 이 여성이 기소당해 처벌받는다면 '낙태죄'로 처벌받는 최초의 여성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여성민우회는 "그간 국내 여성의 3분의 1가량이 현실적 이유로 낙태시술을 받아왔으며, 이 중 60%는 기혼 여성"이라고 밝혔다. 또 "현재까지 낙태죄로 처벌을 받은 여성은 없었으며 여성에 대한 기소는 극히 드문데, 보통 중단이나 유예에 그쳐왔다"고 했다. 경제적 문제나 터울 조정, 남아 선호 등에 의한 낙태는 부부의 암묵적 합의 하에 이뤄지는 경우가 많고, 비혼 여성 낙태의 경우 보통 남성이 아이에 대한 책임을 자처하는 경우가 드물어 문제의 주체에서 벗어난 경우가 많기 때문으로 풀이된다. 결국 낙태는 사회경제적 현실 요건 안에서 암묵적으로, 특히 여성이 감당해야 할 몫으로 지속되어온 셈이다.

 

실제로 지난 3월 민우회에 전화를 걸어온 20대 후반 남성 이아무개씨(가명)의 경우, 비정규직 신분으로 결혼도 하지 않은 여자친구에게 아이가 생기자 경제적 이유로 낙태를 고심했다. 그는 "방이라도 전세로 만든 후 결혼을 하고 아기를 가지려고 했는데, 지금으로서는..."이라며 낙태를 시술할 수 있는 산부인과를 알아보느라 애썼다.

 

지난 5월 상담을 요청해 온 30대 직장인 박아무개씨(가명)는 임신 사실을 알고 난 뒤 상대남자에게 연락을 했지만 아기를 같이 키울 생각이 없어보여 고민에 빠졌다. 사실 박씨는 경제적인 여유도 있고 혼자 양육을 해나갈 자신도 있었다. 그러나 주변의 시선이나 직장생활에서 받을 불이익이 걱정되어 갈등에 빠졌다. 한국 사회에서 미혼모에 대한 부정적 인식이 여전하고, 출산을 강행할 경우 삶의 질과 반경이 위축될 거란 우려 때문이었다.

 

이처럼 사회경제적 여건 속에서 낙태를 필요로 하는 목소리는 줄지 않고 있는 가운데 낙태 고발 정국을 이용한 범죄도 나타나고 있다.

 

지난달 20일에는 낙태 시술 병원을 알아보던 20대 여성이 낙태를 시술해주겠다고 접근한 남성에게 성폭력을 당하고 가족들은 금품 요구 협박을 받는 일이 벌어졌다. 이는 성에 대해 보수적인 한국사회의 특성에 낙태를 처벌 대상으로 규정한 정부 정책이 결합해 낙태의 신체적 당사자가 되는 여성들이 협박과 인권 침해에 쉽게 노출되기 때문에 나타난 결과다.

 

"낙태율을 반으로 줄여도 출산 증가에 도움이 된다"?

 

여성계는 최근의 낙태 고발 정국이 정부의 저출산 문제 해소 대책과 연결되어 있다고 본다. 실제로 지난해 2월, 전재희 보건복지부 장관은 <뉴시스>와 한 인터뷰에서 "낙태율을 반으로 줄여도 출산 증가에 도움이 된다"는 발언을 한 바 있다. 민우회는 이 발언과 관련, 6월 24일자로 인권위에 전재희 보건복지부 장관을 대상으로 하는 진정서를 제출한 상태다. 전 장관의 발언이 보건복지부의 '불법인공임신중절예방 종합계획'이나 미래기획위원회의 '저출산 종합대책' 안에 들어 있는 '낙태방지정책'과 함께 어긋난 낙태 관련 정책 기조를 담고 있다고 봤기 때문이다.

 

'불법인공임신중절예방 종합계획'은 낙태 시술기관에 대한 신고체계 마련, 생명 존중의 사회 분위기 조성 등의 내용을 담고 있다. 민우회는 이러한 내용들이 불가피한 임신에 대한 검토 없이 사회에 무조건적 낙태 처벌 분위기를 조성한다고 봤다. 또 낙태문제를 생명 존중 분위기 조성 문제로 몰아가면서 개인 도덕의 문제로 치환하면 복지, 노동정책, 성문화와 밀접하게 연관돼 있는 근본적 낙태문제 해결책과 거리가 멀어진다고 분석했다.

 

이러한 분위기에 의해 낙태를 필요로 하는 여성들이 느끼는 압박의 체감도가 이전보다 강해진 것이 사실이다. 여성민우회 김희영 활동가는 "이전에는 성폭행 임신의 낙태는 여성단체와 상담한 내용만 있으면 시술이 가능했지만 현재는 피해자의 의사와 관계없이 고소장이라는 성폭행 물증을 병원에 제출해야만 시술이 가능하다"며 "여성의 몸에 있어 낙태 시술 결정은 한시가 급한 것인데 조사와 고소장 제출 등 절차단계를 복잡하게 만들어 (저출산 문제 해결책으로 활용하려는) 정부에 유리하게 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민우회는 진정서를 통해 "1960년대 국가는 인구조절정책의 일환으로 낙태를 종용해 임대아파트 입주권을 제공하거나 낙태를 일종의 '피임법'처럼 퍼뜨렸던 시기도 있었다"며 "그럼에도 2010년 프로라이프의사회의 주장을 국가가 적극 수렴한 것은 '저출산'이라는 국가 현실과 결부돼 여성을 출산의 도구로 보는 하나의 관점을 관통하고 있다"고 밝혔다.

 

관련 소식을 접한 한 누리꾼은 "자기 자신이 자식을 낳아 기를 수 있는 사람인지 아닌지를 스스로 결정할 수 있는 인간이, 제대로 키울 능력도 없고 아무 생각 없이 그냥 생기는 대로 (아이를) 낳는 사람보다 낫다고 생각한다"며 "(아이가) 태어나면 다 제대로 사느냐"고 반문했다. 다른 누리꾼은 "사회는 여성이 아니라 여성의 자궁이 필요한 거네요"라며 필요에 따라 달라지는 정부 태도에 일침을 가했다.

 

진정서 내용과 관련해 김희영 활동가는 "그동안은 낙태로 처벌받는다는 인식이 없었는데, 국가가 형벌권을 가지고 이 문제를 법의 테두리 안에 넣는다면 인권침해가 될 것"이라며 "낙태는 현실적 '관계'의 문제이며, 한국의 낙태율이 높은 이유는 아이를 기를 수 있는 사회적 토대가 부족하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또 "사회적 인식 변화나 공동 육아 환경 조성 등이 자연스럽게 출산율을 높일 수 있는데 낙태 자체의 처벌이 출산율을 높일 것이라는 것은 (국민을) 무시하는 발상"이라고 주장했다.

 

인권위 홍보협력과 윤설아 사무관은 "민우회가 제출한 진정서에 대해 현재 조사 중이며, 진정 내용이 '불법인공임신중절예방 종합계획'이라는 정책을 대상으로 하는 만큼 통상 인권위 조사에 소요되는 3개월여의 기간보다 장기화될 소지가 높다"고 밝혔다.

덧붙이는 글 | 오마이뉴스 12기 인턴기자입니다.


태그:#낙태죄, #보건복지부, #여성민우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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