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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천역 내일로 숙소. 오전 8시가 좀 넘어서, 알람도 울리기 전에 일어났다. 어제 워낙 많이 걸어서 몸은 약간 찌뿌듯한데 그래도 무지 잘 잤다는 느낌이 든다. 개운하다.

'룸메이트'는 벌써 일어나 나갈 준비를 마치고 있다. 그래도 차 시간 때문에 9시나 되어야 나갈 거란다. 아침식사는 어떻게 할 거냐고 물었는데 뚜렷하게 정해놓은 건 없다고 해서 구내식당에 같이 가자고 했다. 숙소 문에 2500원에 식당을 이용할 수 있다고 안내문이 붙어 있는 걸 봤기 때문이다.

본래 야간근무하는 코레일 직원들이 지내는 시설에서 방 몇 칸을 내어 준 것이 제천역 내일로 숙소다. 집 같은 곳이어서인지 구내식당은 아주머니들도 친절하고 음식도 기대 이상이었다. 아침부터 기분이 날아갈 듯했다. 어제에 이어 오늘도 가뿐한 하루가 되리라는 예감이 든다. 날씨도 좋다.

오전 10시 15분, 단양 구인사로 가는 260번 버스. 어제 막걸리를 한 잔 했던 역전시장 앞에서 차를 탔다. 제천역에서 기차를 타고 단양으로 넘어갈 수도 있지만 어차피 단양역은 관광지나 시내와는 멀리 떨어진 곳에 있기 때문에 택시비만 더 들 거였다.

그런데 맙소사, 버스요금이 4300원이란다. 당연히 천 원 안팎일 줄 알았는데. 이제 수중에 남은 돈은 1000원 하고 몇 백원. 불안불안하다. 카드를 못 쓰는 곳도 많을 텐데, 구인사에서 다른 곳으로 이동이나 할 수 있을까? 아무리 가난한 여행자라도 막상 지갑에 현금이 얼마 없으면 마음이 편치 않다. 거기에 더해 버스는 굽이굽이 굽은 시골길을 오르락내리락 하며 묘기라도 부리듯 달린다. 멀미가 난다.

여행자를 꿈꾸게 하고 추억하게 하는 구인사

대한불교 천태종의 총 본산으로, 전국에 말사가 300여개나 된다고 한다.
▲ 소백산 구인사 대한불교 천태종의 총 본산으로, 전국에 말사가 300여개나 된다고 한다.
ⓒ 박솔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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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시간 넘게 달려서 구인사에 도착했다. 비칠비칠 어지러운 몸을 이끌고 버스에서 내렸다. 내리자마자 보이는 의자에 앉아 숨을 돌리고 나니, 이 절이 얼마나 큰지 알게 된다. 절 안에 시외버스 터미널이 있었던 것! 동서울터미널에서 직접 구인사까지 오는 버스가 있을 정도다. (동서울터미널→구인사 직행 버스 1시간 간격으로 하루 12회 운행, 3시간 소요. 요금 1만3900원)

게다가 절 안에 우체국과 ATM 기기까지 있었다. 전재산 1000원 신세이던 나로서 ATM 기기는 무진장 반가웠는데 뭔가 어색한 느낌을 떨칠 수는 없었다. 요즘 절들이 옛날같지 않다는 건 알고 있지만 ATM 기기가 있다니. 절 안에서 뽑아든 빳빳한 지폐들을 지갑에 쑤셔넣으니 마음이 편해졌다. 절 때문인가, 돈 때문인가.

큰 절답게 건물들도 모두 웅장하고 화려하다. 부처님의 위엄이 느껴지는 듯.
 큰 절답게 건물들도 모두 웅장하고 화려하다. 부처님의 위엄이 느껴지는 듯.
ⓒ 박솔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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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이 왜 이렇게 큰가 했더니 대한불교 천태종의 총본산이란다. 그러니까 총본산이라는 얘기는, 가톨릭으로 치면 바티칸이 있고 또 그 밑에 국가별로 또 지역별로 교구가 나누어져 있듯이 대한불교 천태종에 관한 한 단양 구인사가 우두머리라는 뜻. 구인사가 거느리고 있는 새끼 절들, 말사가 300여 개나 된단다.

여행을 다니면서 여러 절들을 꽤 다녀본 편인데 단순히 규모가 크다는 것 외에도 구인사는 정말 특별했다. 작은 절들에 소박하고 단아한 아름다움이 있다면 구인사는 묘하게 이국적이고, 화려하고 진취적인 풍모다. 정말 딴 세상 같다. 공기가 다르달까, 이 세상의 것이 아닌 듯하다.

코끼리 모양의 기단이 특이한 3층 석탑 안에는 인도에서 직접 모셔온 부처님의 진신사리가 모셔져 있다고 한다.
▲ 사리탑 코끼리 모양의 기단이 특이한 3층 석탑 안에는 인도에서 직접 모셔온 부처님의 진신사리가 모셔져 있다고 한다.
ⓒ 박솔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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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장실을 표시하는 픽토그램이 합장하고 있는 모습이 귀엽다.
 화장실을 표시하는 픽토그램이 합장하고 있는 모습이 귀엽다.
ⓒ 박솔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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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렸을 때 TV에서 본 단편 만화가 어렴풋이 떠올랐다. 부모를 잃고 떠돌며 고생하던 소녀가 버들도령인가 하는 소년을 따라 동굴 속으로 들어가자 그 안에는 괴로움도 아픔도 없는 세계인 무릉도원이 펼쳐져 있다. 도령이 주는 천도복숭아를 받아먹고 소녀는 그 안에서 행복하게 영영 산댔나, 아니면 엄마를 찾아 다시 험난한 세상으로 나왔댔나…

또 생각나는 건 세계의 신화와 전설 이야기 중국편. 가난한 남자가 동물들을 도와주고 그들의 보답으로 하동이라는 신비의 세계에 이르게 되는데 옅은 안개가 산자락을 감싸고 강이 흐르고 그 위에는 무지개다리가 놓여 있다. 마치 에덴 동산인 양 나무마다 과실이 주렁주렁 달려 먹을 것 걱정 없는 세상. 그 남자는 그곳에서 부인을 얻어 행복하게 살았댔나, 아니면 원래 부인이 그리워서 말리는 이들도 뿌리치고 고향으로 돌아갔는데, 이미 자기 부인과 가족들은 다 늙어 죽고 아들의 손자의 손자의 손자가 살고 있는 것만 볼 수 있었댔던가…

모든 내용을 기억하지는 못하지만 어린 시절에 보았던 그 장면 장면의 각인은 꽤나 강렬하다. 그렇게 각인된 간접 경험들이 비슷하게 느껴지는 현장에 와서 재생되는 것이다. 여행자를 꿈꾸게 하고 추억하게 하고 상상하게 하는 장소는 어디든지 훌륭한 여행지다.

딴 세상 같은, 하나의 독자적 마을 공동체 같은 느낌을 주었던 구인사
 딴 세상 같은, 하나의 독자적 마을 공동체 같은 느낌을 주었던 구인사
ⓒ 박솔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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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침 점심 공양 시간이기에 기웃기웃 하다 눈치껏 식당을 찾아 들었다. 무말랭이와 김치, 고추장에 보리밥. 기름기 없는 소박한 식단이다. 고기 맛에 길들여진 내 입에 꿀맛이었다고 하면 거짓말이고, 다만 담백해서 한 끼 허기를 속이기에 적당했다. 템플스테이를 하시는지, 보살님들이 많았다. 스님보다도 보살님들이 더 많은 것 같았는데 그래서 구인사는 절이라기보다는 세상을 등진 이들이 모여 만든 하나의 마을 공동체 같은 느낌이 들었다.

온달과 평강이 사랑하던 곳, 온달관광지

구인사와 온달관광지는 도보로 약 20-30분 거리다.
 구인사와 온달관광지는 도보로 약 20-30분 거리다.
ⓒ 박솔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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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릉도원 같은 곳에서 절밥을 얻어먹고 내리막길을 따라 걷는다. 다음 목적지는 <태왕사신기>, <천추태후>, <연개소문> 등의 드라마 촬영지로 알려진 온달 관광지. 삼국시대 고구려의 영토로서 고구려와 신라 간 치열한 영토전쟁이 벌어졌던 영춘면에 소재한다. 온달산성, 온달동굴을 비롯 온달장군과 평강공주의 전설을 주제로 조성한 테마파크와 전시관, 드라마 세트장 등을 한데 묶어 온달 관광지라고 부른다.

구인사와 거리가 멀지 않아 읍내로 나가는 버스를 타면 5분 정도만에 온달관광지에 도착할 수 있다. 하지만 지방을 다니다보면 늘 봉착하는 문제, 배차 간격. 그렇게 먼 것도 아니니까 그냥 걷기로 했다. 한 시간에 몇십 킬로미터를 갈 수 있는 차를 탈 때와 시속 4km나 될까 말까 하는 느린 속도로 걸을 때 보이는 것은 또 다를 터이기도 하고.

그러나 무거운 배낭을 매고 햇볕 피할 그늘도 없는 아스팔트길을 한낮에 걷기는 만만치 않았다. 더구나 집에서 막 나서 다리에 힘이 넘치던 어제와는 다르다. 호젓한 걷기여행의 즐거움을 느끼는 한편으로 나는 자꾸 뒤를 돌아보기 시작했는데, 차를 좀 얻어탈 수 없을까 생각해서였다.

여전히 용기가 안 났는지 아니면 그래도 걸을만 해서 그랬는지, 손 한 번 못 흔들어보고 열심히 눈빛으로 텔레파시만 전송했다. 그러나 차들은 무심히도 내 옆을 지나쳐 갔고, 이러다 도착하겠다 생각이 들 무렵 기적적으로(!) 트럭 한 대가 내 옆에 섰다.

"타세요~"

반갑고 고마운 마음 가득 안고 차에 올라탔다. 차에는 젊은 남자 셋이 타고 있었는데 '친구들끼리 차 가지고 여행 다니는 중인가?' 생각했다. 알고 보니 운전하시는 분은 구인사 근처 식당에 계신 분이고 나머지 둘은 나와 같은 내일로 여행자들로 온달관광지를 가는 길인데 그 식당에서 밥을 먹었단다. 차로는 금방인 곳, 걸어가면 한참이니까 부러 태워다 주시는 거라고. 좋은 분이구나, 생각하는데 시원하게 닦인 구인사로를 내달린 지 이삼 분이나 됐을까, 온달관광지에 도착해 인사를 하고 내렸다.

온달관광지 내에 재현된 온달산성 세트장
 온달관광지 내에 재현된 온달산성 세트장
ⓒ 박솔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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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청년과 함께 온달관광지에 입장했다. 입장료는 5000원. 부러 관광지로 조성해 놓은 테마파크라 그런지 값이 좀 나간다. 하지만 온달산성과 온달동굴 관람이 포함된 가격이니 썩 비싸다고 볼 수는 없다. 단양 내의 다른 동굴인 고수동굴과 천동동굴도 입장료가 각각 5000원씩이다. (온달관광지 입장료 카드결제 가능)

웅장하고 신비한 사찰의 아우라에 압도된 뒤 본 드라마 세트장은 감동받을 정도는 아니어서, 그냥 이렇게 지어 놓았구나, 드라마에서 본 건물이네 하는 생각만 났다. 평일인데다 본격 관광철이 되기 전의 비수기라서 사람은 많지 않았고 최근에 드라마 촬영을 한 것도 아니어서 완벽하게 관리되고 있다는 느낌은 아니었다.

그래도 온달 오픈세트장은 흔히 생각하는 드라마 세트장처럼 가건물로 대충 세워놓은 게 아니라 진짜 왕궁터라고 해도 믿을 만큼 견고하게 지어져 있어서 한 번쯤 둘러볼 만했다. 역사 드라마에 관심이 많은 이에게는 특히 재미난 구경거리가 될 것이다.

한여름인데 춥네! 피서가 따로 없는 동굴 탐험

드라마를 거의 안 보는 나에게 더욱 인상깊었던 건 삼국시대에 실제로 고구려와 신라 간에 영토다툼을 했던 현장인 온달산성과 천연기념물 제261호로 지정돼 있다는 온달동굴 쪽이었다.

온달동굴 내부. 안전모를 쓰고 이 길을 따라 조심조심 들어가야 한다.
 온달동굴 내부. 안전모를 쓰고 이 길을 따라 조심조심 들어가야 한다.
ⓒ 박솔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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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전모를 쓰고 입장한 동굴 안은 캄캄했다. 조명을 밝게 해 놓으면 동굴 안에 서식하는 희귀 생명체들에게 해가 되기 때문에 그렇단다. 온달동굴은 그렇게 크지 않은 편이라서 20~30분 정도에 다 둘러볼 수가 있는데 조금만 더 있었다면 정말 추워서 견디지 못했을 것이다. 그래도 한여름인데, 동굴이라고 해서 얼마나 추울까 싶지만 정말 춥다! 꼭 긴팔 옷을 챙기는 것이 좋다.

온달동굴 안에서 발견할 수 있는 코끼리 형상
 온달동굴 안에서 발견할 수 있는 코끼리 형상
ⓒ 박솔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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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굴 안에는 온달과 평강, 거북이, 코끼리 등 다양한 형상을 한 종유석과 석순들을 볼 수 있었다. 그야말로 자연이 조각한 예술이다. 다리 밑으로는 물이 흐르는데 어두워서 잘 보이지 않았지만 무진장 맑다는 것만은 확실히 알 수 있었다.

동굴을 둘러보고 나와 여름 햇살을 "따뜻하다"고 느끼면서 이번에는 온달산성에 올랐다. 온달산성이라고 쓰인 입구를 지나 계단을 따라 올라갔다. 그런데 결론적으로 고백하자면 온달산성까지 도착하지는 못했는데, 돌로 쌓은 성이 보이는 곳까지 가려면 1시간 이상 가파른 산을 올라야 하기 때문이었다. 30분쯤 올라가다가 표지판을 보고 그 사실을 알게 됐는데, 이미 동굴에서 느낀 서늘함은 멀리 사라지고 땀을 뻘뻘 흘리고 있었다.

삼국시대 고구려와 신라 간 영토전쟁이 벌어졌던 현장, 온달산성으로 올라가는 입구
 삼국시대 고구려와 신라 간 영토전쟁이 벌어졌던 현장, 온달산성으로 올라가는 입구
ⓒ 박솔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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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달산성 가는 길에서 내려다본 마을의 풍경
 온달산성 가는 길에서 내려다본 마을의 풍경
ⓒ 박솔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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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방도 무겁도 다리도 아파 되돌아오게 되었지만 산 위에서 내려다 본 경치가 충분히 멋져서 그닥 아쉽다거나 하는 생각도 안 들었다. 이미 볼 건 다 본 기분이었달까?

온달관광지에서 바라다보이는 남한강 줄기
 온달관광지에서 바라다보이는 남한강 줄기
ⓒ 박솔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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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이는 글 | 下편으로 이어집니다. 더 많은 사진과 정보는 기자의 블로그에 있습니다.



태그:#단양, #구인사, #온달, #평강, #온달관광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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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이 없는 곳이라도 누군가 가면 길이 된다고 믿는 사람. 2011년 <청춘, 내일로>로 데뷔해 <교환학생 완전정복>, <다낭 홀리데이> 등을 몇 권의 여행서를 썼다. 2016년 탈-서울. 2021년 10월 아기 호두를 낳고 기르는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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