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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5년 8․15 해방을 전후해 '좌우합작'과 '남북연합'을 동시에 추진했던 몽양 여운형은 좌우파로부터 끊임없는 공격을 받았다. 좌파로부터는 "기회주의자"나 "친미파"로, 우파로부터는 "빨갱이"나 "친소파"라는 공격에 시달린 것이다.

여운형이 한 극우파 청년으로부터 암살당한 지 63주년 되는 19일, '몽양 추모 63주기 학술심포지엄'(몽양 여운형선생 기념사업회' 주최)의 발제자로 참석한 신동진 다큐멘터리 감독은 여운형이 이렇게 좌우 양쪽에서 공격을 받은 이유를 이렇게 설명했다.

"첫째, 분단을 막기 위해 중도적인 입장에서 좌우합작운동을 추구했었기 때문이고, 둘째는 그의 폭넓은 사상과 행동이 냉전시대의 좁은 좌우 프리즘으로만 조명되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당시 좌우파가 공통으로 여운형을 공격하는 '아이템'이 있었다. '여운형이 친일파'라는 주장이 그것이다. '여운형 친일론'은 60년이 넘은 지금도 보수성향 언론과 학자들에 의해 되풀이되고 있다.

지난해 12월 15일자 <조선일보>는 '친일(親日)명단서 빠진 여운형, 친일행적 또 나와'라는 제목의 기사를 실었다. 정진석(한국언론사) 한국외대 명예교수가 제공한 몇 가지 자료들을 근거로 여운형이 친일활동을 했다고 보도한 것. 이어 자료를 제공한 정 교수는 월간 <신동아> 1월호(2010년)에  '여운형의 친일과 조선중앙일보 폐간 속사정-좌우 가리지 말고 똑같은 잣대 들이대야'라는 글을 기고했다.

'일제 밀정'이 창간한 신문의 '전향서' 보도는 믿을 만한가?

몽양 여운형 선생(1886~1947). 몽양 여운형 선생(1886~1947).
 몽양 여운형(1886~1947).
하지만 지난 2003년 '잊혀진 지도자 몽양 여운형'(KBS 방영)을 제작한 신동진 감독은 이날 학술심포지엄에서 발표한 '몽양 폄훼론의 허구'에서 정 교수와 <조선> 등을 비롯한 보수진영의 '여운형 친일파'라는 주장을 조목조목 반박했다.

신 감독은 YTN 기자와 KAL858기 진상규명시민대책위 사무국장, 국정원과거사진실규명위 조사관을 지냈고, '동강내셔널트러스트 1년의 기록'과 'KAL858기 실종자 가족들의 호소' 등의 다큐멘터리를 연출했다.

현재까지 '여운형 친일론'의 근거로 제시된 것은 ▲전향서 ▲학병 지원 권유문 ▲김동인의 수필 ▲미 군정 G-2 문서 ▲북한 노획문서 ▲금전수수설 등이다.

먼저 '전향서'와 '친일내용'이 담겼다는 한시를 살펴보자. '전향서'(진술서)는 여운형이 1943년 2월 6일 일본인 검사 스기모토 가쿠이치에게 제출한 것이고, 이 전향서 말미에 문제의 한시가 덧붙여 있다. 이는 정 교수가 처음 공개한 것처럼 <조선일보>에 소개된 자료들이다.

여운형은 전향서에서 "나는 조선민족의 관념을 완전히 청산하고 적신으로 되어서 총독의 명령에 복종하야 당국에 협력하야서 국가를 위하야 활동하랴고 생각함으로서 좌(左)에 맹세합니다"라고 적었다. 이어 전향서 말미에 적힌 한시의 내용은 이렇다.

'포연탄우 속에 문필도 보답하고 / 나라 위해 이 한 몸 바치기를 청하네 / 천억이 결성하여 공영을 이루는 날 / 태평양 물에 전쟁의 티끌을 씻으리'

정 교수와 <조선> 등은 이러한 자료들을 근거로 여운형이 친일활동을 했으며 민족문제연구소가 발간한 <친일인명사전>에서 그의 명단을 제외한 것은 형평성에 어긋난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신 감독은 "정진석 교수가 공개한 이 자료는 둘 다 원본이 아니다"라며 "그런 내용이었다고 1946년 2월 17일자의 <대동신문>이 보도한 기사"라고 반박했다. 문제는 '여운형의 전향서 등을 보도한 <대동신문>이 믿을 만한 매체인가' 하는 점이다.

<대동신문>은 해방 후인 1945년 11월 이종형이 창간한 신문이다. 한국 근현대사 권위자인 서중석 성균관대 교수에 따르면, 이종형은 '전형적인 친일파'였다. 그는 "만주에서 동만, 연길 일대의 토공군(討共軍)사령부의 고문 겸 재판관으로서 한국의 혁명투자 250명을 체포·투옥"했고, "조선총독부 경무국 보안과장과 조선군참모장, 헌병사령부 특고과장 밑에서 끄나풀이 되어 해외에 망명중인 지사와 가족들을 잡아"간 '일제 밀정'이었다. 

이종형은 그런 '친일전력' 때문에 "1949년 (화신백화점 소유주) 박흥식에 이어 반민법 법정에 섰던" 인물이다. 그가 1948년 제헌의회의 '반민족행위처벌법' 제정을 결사적으로 반대했음은 물론이다.

정 교수로부터 자료를 받아 '여운형이 친일행위를 했다'고 보도한 <조선일보>조차도 1949년 1월 11일자 기사('자숙하라! 친일군상')에서 이종형을 이렇게 평가했다.

"(1949년) 1월 8일 해외로 도피하려던 화신백화점 소유주 박흥식이 백화점 현관에서 체포됐다. 그를 시작으로 관동군 촉탁출신 이종형, 중추원 참의를 지낸 최린, 경찰 노덕술, 지식인 최남선·이광수 등이 속속 검거됐다. 그들의 혐의는 '일제하의 친일행위'였다."

"여운형이 한문은 했지만 한시를 많이 썼다는 기록은 없어"

신 감독은 "이처럼 많은 독립운동가들을 색출하고 목숨을 앗은 친일파 중의 친일파 이종형이 자신이 경영하던 <대동신문>을 통해 여운형의 친일행각을 그처럼 부각시켰던 이유는 무엇일까"라고 스스로 물은 뒤 이렇게 답했다.

"여운형 같은 민족지도자도 친일을 했다고 해야 자신의 친일행각을 희석시킬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이는 이종형 이후에도 친일파의 후손이거나 그 관련자로 추정되는 폄훼론자들이 지난 60여 년간 여운형의 친일론을 계속 물고 늘어져온 것과 같은 이유다."

신 감독은 "폄훼론자들이 근거로 제시한 <대동신문>의 자료는 정치적으로 매우 편향되고 자의적인 신문이었다는 점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며 "따라서 진술서 마지막에 적혀 있었다고 <대동신문>이 보도한 여운형의 '한시'는 과연 여운형이 쓴 것인지 확인할 수조차 없다"고 주장했다.

신 감독은 "왜냐하면 여운형은 한문을 했지만 한시를 많이 썼다는 기록은 없으며 그가 남긴 것으로 알려진 한시는 평생에 서너 편밖에 전해지지 않고 있기 때문"이라며 "('친일한시'를 남겼다는) 1943년 감옥에서 '건국동맹'을 결성하려고 마음먹었던 그가 친일행각의 흔적이 남는 한시를 지었다는 것은 믿어지지 않는 일"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정 교수는 2010년 1월호 월간 <신동아> 기고글에서 "<대동신문>의 공격에 대해 당시 여운형이 반론을 제기했다는 흔적은 현재까지 찾을 수 없다"며 "<대동신문>은 우익 논조의 신문이었는데 기사가 사실이 아니었다면 여운형측에서 가만히 있지 않았을 것"이라고 거듭 '여운형 친일론'을 제기했다.

이와 관련, 신 감독은 "현 시점에서 보면 그럴 듯한 논리 같지만 해방 직후 첨예했던 좌우대립 현상을 전혀 고려하지 않은 주장"이라며 "당시는 언론도 좌우 대립으로 서로를 공격했는데 좌파신문에도 우파 인사들을 인신공격한 기사도 많았지만 우파쪽에서 이를 반격한 사례는 없다"고 반박했다.

신 감독은 "만일 진짜로 존재했다면 여운형의 최대 정적이던 한민당쪽에서 공개하지 않았을 리가 없다"며 "하지만 지난 60년간 여운형을 폄훼하기 위해 내놓은 자료는 매번 <대동신문>일 뿐이었다"고 꼬집었다.

'학병 지원 권유문' 기사 조작설 제기돼... "<경성일보>의 모략이었다"

'여운형 친일론'의 또다른 근거는 학병 지원 권유문이다. 정 교수의 주장에 따르면, 여운형은 1943년 11월 9일과 11일 두 차례에 걸쳐 '학도여, 전열로'와 '반도동포에게 호소한다'라는 제목의 학병 지원 권유문을 <경성일보>에 실었다. 그 가운데 일부를 소개하면 이렇다.

"(전략) 나는 대동아전쟁에 대해서 극히 엄숙한 생각을 해보았다. 그리하여 이 전쟁에서 조선의 가야 할 길을 내선관계에서 결론을 이끌어냈다. (중략) 일본은 자국을 수호하는 것보다는 유구한 3000년의 역사와 그 영예를 가진 아시아 전체를 해방하기 위한 것이다. (중략) 그래서 청년은 바다와 육지가 이어지는 세계를 향해 총을 들고 나가지 않으면 안된다. (후략)"

하지만 신 감독은 "정 교수가 제시한 이 자료는 <경성일보> 기사 그 자체가 아니라 그런 기사가 실렸었다고 주장한 1946년 2월 10일자 <대동신문>의 기사"라며 "그 신문에 <경성일보> 기사였다는 동판사진과 그에 따른 기사가 실려 있다"고 지적했다.

신 감독은 "앞에서 폄훼론자들이 근거로 제시한 <대동신문>의 정파적 성격과 그 신문을 만든 이종형에 대해 알아보았듯이 <대동신문>의 자료는 정치적으로 매우 편향되고 자의적인 면이 있었다는 점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와 함께 여운형으로부터 구술을 받아 <여운형 투쟁사>(1946년)를 쓴 이만규는 "(학병 지원 권유문은) <경성일보>의 모략이었다"고 '기사조작설'을 제기했다. 특히 1943년 당시 <경성일보> 사회부 기자였던 조반상의 증언도 이러한 '기사조작설'을 뒷받침한다. 1946년 2월 13일자 <민주중보>에는 그와 관련된 증언이 실려 있다.

"총독부는 여운형에게 학병 권장 유세할 것을 권했다. 그러나 여운형은 건강문제를 핑계로 거절한 뒤 총독 면담 6-7분 만에 밖으로 나왔다. <경성일보> 사회부 차장이던 일본인 기자가 이 모습을 보고 여운형 집을 쫓아가 여운형의 총독 회견 기사를 냈다. 그 다음날 다시 여운형을 찾아가 학병에 대한 견해를 물었다. 이때 나는 통역으로 동석했다. 여운형은 '학병은 지원제도이므로 나가고 안 나가고는 본인들의 의사에 달려 있고 나로서는 의견을 말할 바가 못된다'며 회의적인 태도를 취했다. 일본인 차장이 여운형의 서명을 받고 싶다고 하자 여운형이 서명해주었다. 그리고 그 다음날 사실무근의 기사가 나갔다." 

윤해동 성균관대 동아시아학술원 교수도 "(<경성일보>) 기사는 분명 여운형의 자의에 의한 것이 아니었다"며 "1942-43년경부터 항일단체 결성을 준비하고 있었으며, 1944년 8월에 지하운동단체인 건국동맹을 결성하는 것을 보더라도 그것은 맹백한 일이었다"고 주장한 바 있다.

그런데 여운형이 <경성일보>에 기고했다는 학병 지원 권유문은 1944년 <경성일보>에서 펴낸 단행본 <반도학도출진보>에 다시 실렸다. '여운형 친일론'을 주장하는 쪽에서는 여기에 덧붙여진 '여운형씨 수기'라는 부제를 근거로 '진본'을 주장하고 있다.

신 감독은 "단행본에 인쇄된 여운형의 친필서명은 다른 데 있었던 것을 얼마든지 동판사진으로 떠서 인쇄할 수 있는 것이기 때문에 그 친필서명의 인쇄가 있다 하여 그것이 곧 여운형의 진짜 글이었다는 증거는 될 수 없다"고 주장했다.

이어 심 감독은 "<반도학도출진보>가 일본어였다는 사실을 지적해두고자 한다"며 "중국에서 공부한 여운형은 약간의 일본어는 이해할 수 있었지만 장문의 수기를 그것도 유려한 일본어로 써낼 만한 실력은 갖추고 있지 않았다"고 말했다.

심 감독은 "그는 해방 전에도 일본 총독이나 고관과 회담을 가질 때에는 반드시 조선어 통역관을 대동했다"며 "따라서 장문의 수기가 여운형 자신이 직접 쓴 것이었다고 받아들이기는 어렵고, 썼다 하더라도 일단을 일본인 또는 일본어를 아는 조선인의 손을 거쳤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고 주장했다.

미 군정 '여운평 친일론' 자체 검증... 일본측 인사들 "몽양은 애국자"

혜화동로타리  몽양 여운형 선생이 암살된 곳
▲ 혜화동로타리 몽양 여운형 선생이 암살된 곳
ⓒ 김수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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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으로 '여운형 친일론'의 유력한 근거로 제기되는 자료가 미 군정 정보참모부 문서(G-2 Periodic Report)다. 정 교수는 "정보보고서는 여운형을 여러 해 전부터 한국인들 사이에 친일파로 널리 알려진 정치가(well-known to the Korean people as pro-Japanese collaborator and politician)로 평가했다"고 주장했다.

그런데 'G-2 문서'가 해방 직후인 1945년 9월 12일에 작성됐다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하지 중장을 사령관으로 하는 미 제24군단이 서울에 들어온 때가 9월 9일이었고, G-2(정보참모부)가 서울에 사무실을 열고 정보수집 업무를 시작한 때가 9월 11일이었다.

이러한 시대적 상황을 헤아린다면 정 교수가 '여운형 친일론'의 근거로 제시한 G-2 문서는 하루 만에 작성된 셈이다. 신 감독은 "정 교수의 논리에 따른다면 G-2는 정보업무를 시작한 지 하루 만에 독자적인 조사를 거쳐 여운형이 '친일파'라는 판단을 내렸다는 것이 되는데 이게 상식적으로 가능한 일인가?"라고 문서의 신뢰도에 의문을 나타냈다.

신 감독은 G-2에서 면담했던 한국인들의 면면을 분석한 뒤, "G-2가 접촉했던 이 명단에는 단 한 명의 좌파도 없다"며 "그렇게 된 이유는 명단에 6번이나 이름이 올라 있는 오긍선 때문이었다"고 주장했다.

세브란스 교장을 지냈던 오긍선은 하지 사령관의 보좌관이었던 조지 Z. 윌리엄 중령을 통해 G-2와 접촉했고, 이들에게 자신이 알고 있던 한민당 인사들을 소개했다.

신 감독은 "G-2는 이들을 통해 자기들이 진주한 한국의 실정을 취재했다"며 "한민당의 중심세력인 이들은 해방직후 건준을 세워 정국을 앞서 나갔던 정치적 라이벌 여운형을 '친일파'로 몰았고, G-2는 이들의 의견을 들어 '여러 해 전부터 한국인들 사이에 친일파로 널리 알려진 정치가'라고 기록했던 것"이라고 주장했다. 

물론 미 군정은 '자체 검증'에 나서기도 했다. 이는 대중적 지도자로 인기를 모으고 있던 여운형의 약점을 잡기 위한 것이기도 했지만, 한민당 등 보수우파 진영에서 '여운형 친일론'을 계속 제기한 데 따른 조치이기도 했다.

하지 사령관의 정치고문이자 미소공동위에 파견나와 있던 레너드 버치 중위는 1946년 8월 하지 사령관에게 제출한 보고서에서 "여운형은 전쟁기간을 통해 일본의 최고급 관헌들과 극비밀의 관계를 맺고 있었다고 한다"면서 "사령부는 능력있는 장교를 일본에 보내 도오죠, 코이소 및 전 총독 아베와 전직 경찰간부들로부터 모든 정보를 얻을 수 있도록 (맥아더 사령부에) 요청해 조사를 하는 것이 마땅하다"고 제안했다.

버치 중위는 현지 조사관으로 미 군정 외무부에 근무하고 있던 찰스 오리오단 소령을 추천했고, 하지 사령관은 "타당한 제안이다, 여운형에 대한 무엇(약점)인가를 잡아냈으면 좋겠다"고 동의했다. 찰스 오리오단 소령의 조사결과는 1947년 3월 7일자 미 군정 기록에 남아 있다. 이것은 당시 G-2 책임자였던 존 N. 로빈슨 대령이 작성한 것이다.

"여운형의 일본 관련설에 대해 찰스 오리오단이 일본에서 조사한 결과는 부정적이다. 뒷받침할 만한 증거가 하나도 없었다. 오리오단이 면접한 사람들은 거의 모두 그런 의문이 생겼다는 것에 놀라움을 표시했다. 그들은 여운형을 조선의 훌륭한 애국자의 한 사람으로 생각하고 있다. 로빈슨 대령."

미 군정이 여운형을 의심하게 된 것은 1940년과 1941년 두 차례에 걸친 일본행과 관련돼 있다. 여운형은 당시 일본에서 우익정객인 오오카와, 고노에, 이 두 사람과 다나카 육군성 소장, 우가끼 전 조선총독 등을 만났다. "여운형은 전쟁기간을 통해 일본의 최고급 관헌들과 극비밀의 관계를 맺고 있었다"는 미 군정의 인식은 여기에 뿌리를 두고 있다.

이와 관련 송재헌씨는 1985년 연세대 석사논문('몽양 여운형에 대한 사회사상적 연구')에서 "여운형이 친일에의 유혹이나 압력 및 협박을 피하는 방법은 독특한 데가 있었다"며 "그것은 일본의 고관들을 사귀어둠으로써 일제의 경찰이 감히 손을 못대도록 만드는 방법이었다"고 분석했다.

"2000만엔 수수설 여운형이 남간 재산은 38평 한옥 한 채뿐"

앞서 언급한 G-2 문서에는 '일본이 패망하기 직전 여운형은 조선총독으로부터 2000만엔을 받았다'는 내용이 포함돼 있다. 또한 1948년에 씌여진 <주한미군사>와 <한국민주당소사>에도 2000만엔 수수설이 언급돼 있다. 총독부의 치안권 이양과정에 개입했던 최하영(전 조선총독부 농상과장)도 "그 당시 총독부는 건준에 450만 달러 정도의 자금을 내놓았다"고 회고한 바 있다(1968년). 이러한 거액 수수설도 '여운형 친일론'의 근거로 제시돼 왔다.

신 감독은 "조선총독으로부터 거금을 수수했다는 설은 당시 한민당 계열에서 계속 여운형을 음해한 주요 내용의 하나였기 때문에 하지 사령관은 여운형을 처음 만났을 때 '당신은 Jap(일본) 돈을 얼마나 먹었느냐?'는 무례한 질문을 던지는 계기가 됐다"고 지적했다.

특히 신 감독은 '2000만엔 수수설'과 '450만 달러 수수설'은 모두 같은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는 "<주한미군사>에 실린 2000만엔은 미 제24군단 G-2가 수집한 정보를 군 사관(史官)이 다시 정리한 자료"라며 "<한국민주당소사>의 2000만엔과 소스가 같은 것으로 보인다"고 주장했다.

신 감독은 "그것이 한민당의 브리핑에 의한 것이었다는 점은 가령 해방 직전 송진우가 거절하자 정무총감 엔도오가 치안권을 여운형에게 넘겨주었다는 한민당 주장이 그대로 미군 자료에 반영되어 있다는 점으로도 입증된다"며 "당시 미군은 미국 대학에서 높은 교육을 받은 한민당 계열의 여러 지식인들이 유창한 영어로 들려주는 조선의 정치상황을 액면 그대로 받아들였던 것 같다"고 지적했다.

또한 '450만 달러 수수설'과 관련, 신 감독은 "450만 달러는 당시 2000만엔을 달러로 환산한 액수로 볼 수 있다"고 주장했다. 당시 한국에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던 일본 육군의 무기 관련 환율이 1달러당 4엔이었다는 점을 헤아리면 450만 달러는 대략 2000만엔이 된다는 얘기다.   

신 감독은 "총독부에서 들었다면 의당 2000만엔이라고 했을 것인데 왜 그것을 굳이 450만 달러라 했을까"라고 의문을 나타내면서 "이는 그 이야기를 들은 소스가 총독부가 아닌 미군정이었기 때문"이라고 추정했다.

신 감독은 "총독부 농상과장을 하던 최하영은 미군이 서울에 진주하자 곧바로 미 군정 농상국 고문에 취임했다"며 "따라서 최하영이 언급한 450만 달러의 소스는 미 군정이고, 미 군정의 소스는 한민당이었으므로 2000만엔-450만 달러 수수 설은 모두 그 출처가 동일한 한민당이었다는 결론을 내릴 수 있다"고 말했다.

또한 신 감독은 "당시 2000만엔은 정무총감이라 할지라도 내놓기가 쉽지 않을 만큼의 큰 돈이었다"며 " 8·15의 시점에서 조선은행 발행고는 총 49억 7000만 엔에 지나지 않았기 때문에 당시 2000만엔의 가치를 지금의 화폐발행고 30조 원에 투영·환산해보면 대략 1200억원에 달하는 거금이 된다"고 주장했다.

신 감독은 "사후에 그가 남긴 재산이라곤 <조선중앙일보> 시절 주주들이 증여해 죽을 때까지 살았던 계동의 38평짜리 한옥 한 채뿐이었다"며 '거액 수수설'을 거듭 반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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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0년 전남 강진 출생. 조대부고-고려대 국문과. 월간 <사회평론 길>과 <말>거쳐 현재 <오마이뉴스> 기자. 한국인터넷기자상과 한국기자협회 이달의 기자상(2회) 수상. 저서 : <검사와 스폰서><시민을 고소하는 나라><한 조각의 진실><표창원, 보수의 품격><대한민국 진보 어디로 가는가><국세청은 정의로운가><나의 MB 재산 답사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