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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가사키시 미쓰비시 조선소가 내려다보이는 언덕에서 1945년 당시 일하던 장소를 설명하고 있는 조선인 강제 징용 노동자 김한수(92) 씨.
 나가사키시 미쓰비시 조선소가 내려다보이는 언덕에서 1945년 당시 일하던 장소를 설명하고 있는 조선인 강제 징용 노동자 김한수(92) 씨.
ⓒ 오마이뉴스 장재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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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일 강제병합 100년'을 맞아 조선인 강제 징용 노동자들의 고난의 현장과 아픈 기억을 찾아 떠난 '평화역사기행단'은 6월 29일 규슈 나가사키시로 향했다.

일본 대기업 미쓰비시가 시작된 도시, 원자폭탄이 떨어졌던 도시, 2만 명에 달하는 조선인 강제 징용 노동자가 있던 도시로 가는 길에는 계속해서 비가 내렸다.

우리가 처음 도착한 곳은 1945년 당시 조선인 강제 징용자 김한수(92)씨가 미쓰비시 조선소에서 일하면서 머물렀던 기숙사가 있던 자리다. 이곳은 나가사키 복전촌에 위치한 미쓰비시 본전료로서 이른바 '함바'로 불리던 곳이다.

버스에서 내려 100m 이상을 걷다가 드디어 자신의 기억과 일치하는 한 장소를 발견한 김한수씨는 당시의 혹독했던 기억이 떠오르는지 눈물을 글썽이며 입을 뗐다.

"여기가 그곳이여, 그러니께 우리가 이 개울을 건너서 있었고, 한 동에 90명쯤 되는 조선인 들이 있었지, 그런 동이 4개가 있었어… 저쪽 산 위에는 대나무 밭이 있었고, 그 옆에 일본사람 밭이 있었어. 일본인들이 거기 밭에 고구마를 묻어뒀는데 겨울이 되니까 그 고구마가 썩어서 밭에다가 버렸더라구. 그런데 다 썩은 게 아니고 조금씩은 괜찮은 부분도 있어서, 그것을 내가 주워서 장화에다가 넣어 가지고 와서 삶아먹었지… 배가 고파서… 얼마나 배고팠는지 몰라."

김씨는 자신과 같이 미쓰비시 조선소에서 일하던 조선인 노동자가 당시 1800명이나 됐다고 말했다. 그리고 공장까지 가는 길은 산을 넘어서 40분 정도 걸렸는데, 매일 아침 걸어서 갔다고 했다. 또 각 동에는 반장이 있었는데, 한국인이었다고 한다.

이 반장들의 이름을 야스다, 가네무라, 가네야마(창씨개명한 이름들)였다고 생생히 기억하고 있는 김씨는 이 조선인 반장들이 더욱 악독했다고 했다. 그들은 사정없이 때리고 욕을 해댔다. 그 반장들이 아침에 줄을 맞춰서 인솔해 회사 정문에 데려갔고, 밤에 데려왔다. 야근이 있으면 혼자서 돌아와야 했다. 감시는 심하지 않아서 도망가는 사람도 있었다.

미쓰비시 조선소를 다시 찾은 강제 징용 노동자

 조선인 강제 징용 노동자 김한수(92) 씨. 정면으로 보이는 하얀색 건물들이 미쓰비시 조선소 건물이다.
 조선인 강제 징용 노동자 김한수(92) 씨. 정면으로 보이는 하얀색 건물들이 미쓰비시 조선소 건물이다.
ⓒ 오마이뉴스 장재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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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다시 미쓰비시 조선소가 보이는 언덕으로 이동했다. 철조망 사이로 보이는 공장을 바라보는 김씨는 손짓을 하면서 당시의 현장을 자세히 설명해 냈다.

"이쪽 하얀 건물에 일본인들 기숙사가 있었고, 저쪽으로 내려가면 해안선이 구부러져 있었고… 그리고 그 끝쪽으로 가다가 내가 일하던 곳이 있었는데, 지금은 저 건물들이 들어서서 잘 보이지 않네…."

김씨는 또 "저쪽 끝에는 가미가제 잠수함을 만드는 곳이 있었어… 내가 반장에게 물어봤더니 묻지 말라고 하더구먼… 그놈들이 그랬다구"라고 덧붙이기도 했다.

1945년 8월 9일 오전 11시 2분, 김씨는 공장에서 이데기(부공장장쯤 되는 일본인)씨의 회중시계를 고치던 중 '번뜩'하는 푸른빛을 보았다고 했다. 그리고 갑자기 이데기씨가 '적이다'라고 소리치면서 뛰기 시작했고, 그 뒤를 따라 도망을 쳤는데, 철문이 떨어져 김씨를 덮쳤다.

잠시 정신을 잃었다가 깨어났고, 자신을 붙잡는 무언가(철문)를 계속해서 뿌리치면서 밖으로 튀어나갔다. 밖은 온통 시체와 부상자로 덮여 있었다. 까맣게 타버린 시체들, 팔다리가 떨어진 사람, 눈알이 빠져나온 사람들, 말 그대로 '지옥'이었다.

김씨도 목덜미에 큰 상처를 입는 등 심각하게 다쳤다. 그로 인해 김씨가 입었던 하얀색 옷은 온통 피범벅이 되었다. 그렇지만 널브러진 시체와 사경을 헤매는 수많은 부상자들에 비하는 아무것도 아니었다.

생각하기도 싫은 그 장면. 그러나 우리가 꼭 기억해야 하는 그 장면. 핵의 위험을 결코 간과해서는 안 되는 그 장면을 김씨는 그렇게 기억하고 있었다(김한수 씨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이전 기사 참고 "우리는 인간 이하의 노예생활을 해야 했다").

김씨는 원폭이 있던 첫날, 이데기씨를 찾으러 나가사키 시내에 나갔다고 했다. 시내의 언덕에 그의 사택이 있었기에. 그러나 그 사람을 찾지는 못했다. 대신, 초토화된 시내를 보았다. 시체가 나뒹굴었다고 했다. 끔찍했다고 했다. 그래서 무서워서 다시 시내에 나가지 않았다고 했다.

그리고 그 다음날에는 자신을 괴롭힌 반장을 잡기 위해 돌아다니기도 했다고 했다. 잡아 죽이고 싶었다고 했다. 그러나 찾지 못했다.

일본 공장 책임자는 조선인 노동자들을 모아 놓고 "할 말이 없다"는 말로 모든 것을 끝냈다. 돌아가라는 말도 없었고, 그렇다고 계속 남아 있으라는 말도 없었다. 사실 그 당시 모두 파괴된 상황에서는 그 말밖에 할 말이 없었을 것이다.

돈은 구경도 해 보지 못하고 그렇게 노동과 폭력에 시달리다 원폭 피해자가 된 김씨는 두 달 가까이 나가사키에서 보냈다. 부상자 구호와 치료활동도 했고, 딱히 또 할 일도 없이 그렇게 나날을 보내다가 아주 어렵게 목선을 구해서 한국으로 돌아왔다. 자신과 함께 일하던 그 수많은 조선 노동자 중 오로지 자신 혼자만 돌아왔다고 했다.

나가사키 시립 원폭자료관과 폭심공원

 나가사키 시립 원폭자료관에 전시된 영상자료. 영상에서는 원자폭탄이 터지는 장면이 흘러나오고, 그 옆에서 원자폭탄이 떨어진 시간이 표시되어 있다.
 나가사키 시립 원폭자료관에 전시된 영상자료. 영상에서는 원자폭탄이 터지는 장면이 흘러나오고, 그 옆에서 원자폭탄이 떨어진 시간이 표시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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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가사키 시립 원폭자료관의 전시자료. 원폭으로 인한 처참한 상황이 사진으로 기록되어 있다.
 나가사키 시립 원폭자료관의 전시자료. 원폭으로 인한 처참한 상황이 사진으로 기록되어 있다.
ⓒ 오마이뉴스 장재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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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우리는 발길을 옮겼다. 그곳은 나가사키 시립 원폭자료관이다. 이 자료관에는 원폭 당시의 처참했던 사진과 물건 등이 전시되어 있다. 유리는 녹아내렸고, 철도 녹아내렸다. 건물이란 건물은 모두 불타고 무너졌다. 거리에는 시체가 뒹굴었고 시신은 까맣게 타 버렸다.

공식적으로 일본 정부가 밝힌 나가사키 원폭 사망자 수는 7만3884명이었다. 또 히로시마는 11만8661명이다. 그리고 3개월 이내에 사망한 중상자가 나가사키가 7만4909명, 히로시마는 7만9130명. 결과적으로 나가사키에서는 약 15만 명, 히로시마에서는 19만 명 정도가 사망했다.

이 자료관에는 이러한 원폭으로 인한 폐허 이외에도 원폭이 만들어진 과정과 미국이 이를 투하하기까지 결정 과정, 그리고 피폭자들의 참상 등이 전시되어 있다.

 나가사키 시립 원폭자료관의 전시물. 원폭 이후의 도시 모습.
 나가사키 시립 원폭자료관의 전시물. 원폭 이후의 도시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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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원자폭탄이 떨어진 일본 규슈 나가사키시의 폭심공원. 이곳 상공 500미터에서 폭탄이 터졌다. 당시 이곳은 주택가였으며, 현재는 공원으로 꾸며졌다. 사진을 찍는 순간에도 한 시민이 찾아와 희생자들을 추모하는 묵념을 하고 있었다.
 원자폭탄이 떨어진 일본 규슈 나가사키시의 폭심공원. 이곳 상공 500미터에서 폭탄이 터졌다. 당시 이곳은 주택가였으며, 현재는 공원으로 꾸며졌다. 사진을 찍는 순간에도 한 시민이 찾아와 희생자들을 추모하는 묵념을 하고 있었다.
ⓒ 오마이뉴스 장재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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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조금 걸어서 바로 아래쪽에 있는 폭심공원으로 이동했다. 말 그대로 원자폭탄이 투하된 그 지점이다. 폭심공원 가운데에는 검은색 돌기둥이 서 있다. 그곳이 바로 폭탄이 떨어진 곳이다. 실제로는 그곳 상공 500m 위에서 폭탄이 터졌다고 한다.

이곳에서는 자신도 피폭자이면서 '나가사키 증언 모임'에 헌신적으로 참여해 온 모리구치 마사히코(71)씨가 해설자로 나섰다. 그는 우선 폭심지의 탑 기단부에 쓰여 있는 '원폭순난자명봉안(原爆殉難者名奉安)'이라는 글귀에 대해 설명했다.

나가사키시가 14만9000여 명의 피폭자 명단을 이 글귀가 새겨진 돌함에 넣었는데, 문제는 '순난(殉難)'이라는 글귀라는 것. '순(殉)'자는 순교, 즉 신앙과 신념 등을 위해 스스로 목숨을 버리는 것을 의미하는데, 여기에 있는 희생자들은 그러한 순교자들이 아니라는 것이다.

"이들이 어떻게 순교자인가? 일본 천황을 위해, 나라를 위해 스스로 목숨을 버린 자들이 될 수 있나? 조선에서 끌려온 강제 징용 노동자들이 일본을 위해 목숨을 버린 순교자라고 어떻게 버젓이 이렇게 글귀를 새겨 놓을 수 있나…."

모리구치씨는 당시 천주교 도시였던 나가사키의 특성에 따라 그런 글귀가 들어갔다고 했다. 히로시마에서는 그런 글귀가 사용되지 않았다. 1만5000명의 천주교 신자 중 8500명이 죽었기에 그 같은 특성이 반영된 것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분명 옳지 않다고 문제 삼았다.

모리구치씨의 설명에 따르면, 당시 조선인 사망자 수는 1만278명이다. 이는 민간인들이 조사해서 집계한 수치다. 일본 정부는 결코 이를 인정하지 않으려 했고, 이러한 자세한 조사도 하지 않았기에 민간에서 조사한 것. 또 조선인 피폭자는 2만1634명이었다.

 나가사키와 히로시마에 떨어진 원자폭탄으로 사망한 사람들 숫자. 왼쪽 위부터 희생자수, 3개월 이내 사망한 중상자 수(여기까지는 공식집계), 그 아래는 민간에서 집계한 조선인 희생자 수와 중상자 수. 오른쪽 칸은 히로시마 희생자 수. 사진 속 인물은 모리구치 마사히코(71) 씨.
 나가사키와 히로시마에 떨어진 원자폭탄으로 사망한 사람들 숫자. 왼쪽 위부터 희생자수, 3개월 이내 사망한 중상자 수(여기까지는 공식집계), 그 아래는 민간에서 집계한 조선인 희생자 수와 중상자 수. 오른쪽 칸은 히로시마 희생자 수. 사진 속 인물은 모리구치 마사히코(71) 씨.
ⓒ 오마이뉴스 장재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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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가사키 폭심공원에 설치된 '봉안함'. 이곳에는 14만9000여 명의 원폭 희생자 명단이 들어 있다.
 나가사키 폭심공원에 설치된 '봉안함'. 이곳에는 14만9000여 명의 원폭 희생자 명단이 들어 있다.
ⓒ 오마이뉴스 장재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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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폭이 떨어지던 당시 6세였던 모리구치씨는 7km 정도 떨어진 곳에 갔다가 1주일 만에 돌아왔다고 한다. 그래서 직접적인 피해는 면했지만 피폭자가 됐다.

"원자폭탄이 떨어진 지 65년이 지났다. 두 번 다시 같은 잘못을 하지 않겠다고, 전쟁은 하지 않겠다고 했다. 그러나 65년이 지난 지금도 일본 국민 대다수는 그러한 생각을 하고 있지 않다. 과거의 잘못을 반복하지 않으려면 과거를 돌아보고, 반성하고, 직시해야 한다, 그런데 일본은 그것이 부족하다."

모리구치씨는 그렇게 일본의 상황을 설명했다. 그러고는 일본은 자신이 일으킨 전쟁의 참상과 원폭에 대한 진실을 사실 그대로 교육해야 한다고 역설했다.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의 원폭 기억 속에는 우리가 당한 것뿐만 아니라 우리가 무엇을 했는가도 담아야 한다. 그러나 일본의 교육은 그렇지 않다. 일본의 기억 속에는 침략의 역사가 지워져 있다. 당시 조선인, 중국인 강제 징용 노동자들이 어떤 상황이었는지에 대해 말해야 한다."

조선인 원폭 희생자 추도비와 '오카 마사하루 목사 평화자료관'

 폭심공원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있는 '나가사키 원폭 조선인 희생자 위령비'.
 폭심공원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있는 '나가사키 원폭 조선인 희생자 위령비'.
ⓒ 오마이뉴스 장재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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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다시 이동한 곳은 '나가사키 원폭 조선인 희생자 위령비.' 나가사키 원폭 피해의 참상을 알리고 피폭자들 구호 활동을 해 오던 오카 마사하루 목사는 1979년 157구의 조선인 노동자들의 유골이 '성효원'이라고 하는 절에 모셔져 있다는 것을 알았다.

원폭이 떨어진 후 일본인의 시신과 유골은 잘 수습되었고 명단이라도 정확히 파악됐지만, 조선인들은 그렇지 못했다. 그저 쓰레기처럼 뒹굴고 파묻혔다. 살아남은 조선인들이 친구 등의 유골을 일부 수습해 '성효원'에 모신 것이다.

오카 마사하루 목사는 '나가사키 재일조선인 인권을 지키는 회'를 만들고 기금을 모아 이들 조선인 희생자들을 기리는 납골당을 만들려고 했다. 그런데 '민단'에서 이들의 유골을 고국으로 모두 가져가면서 납골당이 아닌 이러한 작은 비를 세우게 된 것이다. 이들은 지금도 매년 8월 9일이 되면 이곳에서 추모식을 열고 있다고 했다.

이를 설명하는 모리구치씨의 떨리는 목소리에서 슬픔이 그대로 묻어났다. 그 슬픔은 듣는 우리들에게도 전해졌다. 우리는 추모의 묵념을 하면서 희생된 선조들을 생각했다. 그저 모든 이에게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그리고 우리는 다시 '오카 마사하루 기념 나가사키 평화자료관'을 찾아갔다. 언덕 위에 자리 잡은 이 기념관의 취지는 다음과 같다.

"일본의 침략과 전쟁의 희생자가 된 외국인들은 전후 50년이 되도록 아무런 보상도 받지 못한 채 버림받아 왔다. 일본이 가해의 역사를 숨겨 왔기 때문이다. 가해자가 피해자에 대하여 사과도 보상도 하지 않는 무책임한 태도만큼 국제적인 신뢰를 배신하는 행위는 없다. 여기 이 평화 자료관은 일본의 무책임한 현 상태를 고발하는 데 전 생애를 바친 고 오카 마사하루씨의 유지를 계승하여 시민의 손으로 설립되었다…."

이 자료관에는 일본의 아시아 침략에 관한 내용과 그로 인한 조선과 중국 등의 피해사례가 자세히 소개되어 있다. 특히 한국인 강제 징용 현황, '종군위안부', 난징 대학살 등 일본인의 잔학한 만행이 사진과 함께 자세히 설명되어 있다. 또 조선인 피폭자에 대한 소개와 증언, 전후 보상에 대한 자료 등도 전시되어 있다.

이 자료관은 순수한 시민의 도움으로 세워졌다. 정부가 세운 '평화기념관'은 원폭 피해에 대해서만 설명하고 있다고 판단한 오카 마사하루 목사는 일본이 전쟁을 통해 저지른 만행도 함께 소개해야 한다고 생각해 이 자료관을 만들기로 기획했다. 그러나 오카 목사가 급작스럽게 숨졌고, 남은 9명이 보증을 서서 이 기념관을 만들었다.

이들은 매달 10만 엔씩을 25년 동안 갚겠다고 했는데, 아직도 10년이 남았다고 했다. 그러나 이 기념관이 지난 15년 동안 유지될 수 있었던 비결은 모든 것이 자원봉사로 운영되기 때문이라고 했다. 우리 일행은 이곳을 나오면서 자발적으로 후원금을 내놓았다.

 '오카 마사하루 기념 나가사키 평화자료관'.
 '오카 마사하루 기념 나가사키 평화자료관'.
ⓒ 오마이뉴스 장재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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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카 마사하루 자료관에 전시된 전시물. 이곳에서는 조선인 강제 징용 노동자들에 대한 기록을 전시하고 있다.
 오카 마사하루 자료관에 전시된 전시물. 이곳에서는 조선인 강제 징용 노동자들에 대한 기록을 전시하고 있다.
ⓒ 오마이뉴스 장재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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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카 마사하루 자료관에 전시된 전시물.
 오카 마사하루 자료관에 전시된 전시물.
ⓒ 오마이뉴스 장재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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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카 마사하루 평화자료관에서 만난 다카자네 야스노리 이사장은 우리 일행에게 이렇게 말한다.

"김한수씨를 비롯한 수많은 조선인 강제 징용 노동자들의 청춘을 파괴한 책임을 일본은 분명히 져야 한다. 일본이 자신들의 전쟁을 위해 다른 나라에 이러한 크나큰 해를 입혔다는 것에 대해 지금 일본인들은 반성해야 한다. 일본은 지금 역사교과서에 이러한 침략의 역사를 기록하지 않고 있다. 반성하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미래지향이라는 일본의 말을 우리는 믿지 않는다. 과거에 대한 반성 없이는 미래가 있을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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