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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년 6월14일~25일까지 필리핀 이주과정 전반에 관한, 한국으로의 이주노동을 중심으로 한 실태 조사 과정에서 겪은 이야기를 정리해 보고자 한다. 이 글은 단순히 이주노동자들의 이야기를 다루는 것이 아니라, 이주와 관련하여 출국 전, 이주노동 현장, 귀국 후까지 이주과정 전반을 살펴보고, 아시아에서 이주노동이 차지하는 위치와 보다 나은 세상을 만들기 위해 향후 어떤 정책이 개발되어야 하는지 등에 대한 고민을 담아보고자 한다.

이번 실태 조사는 기자 외에 아산외국인노동자센터 우삼열 소장, 박종우 활동가, 결혼이주여성인 안나, 의정부 엑소더스 이인화 간사가 동행했다.... 기자 주

한국에서 수많은 이주노동자를 만나면서 손이 잘리고, 다리가 잘리고, 심지어 사망을 한 경우도 상담을 하고 유해 송환을 책임지기도 했다.

그 문제들은 오랜 세월이 지나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기 쉽지 않았다. 그러면서도 피해 당사자와의 일대일 만남을 통해 그들이 당하는 상처 혹은 문제들이 가족의 상처요 문제라는 생각에는 미치지 못하고 있었다. 그저 한 개인의 상처요, 문제겠지 하고 넘어가기 십상이었다. 오래 상담을 하다 보면 사건이 있을 때마다 '아, 또 한 명의 피해자가 있구나'하며 탄식하는 수준에서 멈춰 버리곤 했다.

알란 에스떼떼, 네 손가락을 잃고 가족과 하염없이 울다

오른손 엄지 손가락을 제외한 네 손가락을 잃은 알란과 그의 아내
▲ 인터뷰하고 있는 알란 오른손 엄지 손가락을 제외한 네 손가락을 잃은 알란과 그의 아내
ⓒ 고기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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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그런 타성에 경종을 울린 이가 있었다. 1971년생으로 두 딸을 두고 있는 '알란 에스떼떼'. 알란과의 만남은 지난 6월 14일부터 25일까지 있었던 필리핀 이주노동자 실태조사 과정에서였다.

알란은 우리를 만나기 위해 부인과 함께 마닐라에서 북쪽으로 버스를 타고 여섯 시간 넘게 걸리는 팡가시난(Pangasinan)이라는 곳에서 찾아왔다고 했다. 그 먼 거리를 마다않고 찾아와 준 알란의 이야기는 듣는 이의 귀밑을 벌겋게 하기도 했고, 순간 어딘가가 뜨거워지게 만들었다. 

알란은 2006년에 외국인 고용허가제를 통하여 한국에 갔다. 처음 한국에서 일했던 곳은 충남 아산에 위치한 판넬 공장이었다. 공장 시설은 안전하고 깨끗했고, 동료직원들은 친절했다. 다만 문제가 있었다면 일이 너무 많아서 일요일도 격주로 휴무한다는 것이었다. 일요일 종교 활동을 희망했던 알란은 1년 계약 기간이 끝났을 때, 매주 예배당에 갈 수 있도록 허락해 달라고 회사에 요구했다. 그러나 회사는 많은 직원들 가운데 예외를 둘 수 없다고 했다. 결국 알란은 회사의 동의를 얻어 부천에 있는 프레스 공장으로 옮겼다.

옮긴 회사는 기숙사 시설이나 공장 환경이 기존보다 열악했다. 그렇게 옮긴 회사에서 나름대로 성실하게 일하며 적응하던 알란은 2007년 9월에 오른손 엄지손가락을 제외한 모든 손가락이 잘리는 사고를 당했다. 알란은 사고 당시 날짜를 정확히 회상하며, 이렇게 말했다.

"<M*공업>에 들어갈 당시 회사는 작업장에 안전장치가 설치되어 있지 않다는 것을 말하지 않았습니다. 회사에서 프레스를 이용하여 기계 부품을 만드는 일을 하였습니다. 그러다가 2007년 9월 11일에 사고를 당했습니다. 프레스에 안전장치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이주노동자가 종교는 무슨... 일요일에도 일해"

신앙 활동을 자유롭게 하기 위해 조건이 좋은 회사를 떠나 일하다 산재를 당했다는 알란은 "한국에서 일하는 동안 돈을 벌 수 있었고 저와 가족은 희망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크게 다치게 되어 앞으로 일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일을 하지 못하기 때문에 제가 받은 보상금으로 사리사리 스토어(구멍가게)를 운영하며 살아야 합니다. 그래도 딸들은 이제 다 컸고, 가족이 함께 하잖습니까?"라며, 그나마 원망스러운 마음을 달래려 했다. 

그러나 옆에 앉아 있던 부인은 남편이 사고 상황을 이야기할 때 줄곧 옆에서 눈물을 훔치고 있었다. 부인은 "저는 아주 큰 충격을 받았습니다. 당시 열다섯 살이던 첫째 딸애도 큰 충격을 받고 마냥 울었습니다. 남편이 네 손가락을 잃는 사고 이후 국제전화 통화를 할 때마다 우리 부부와 아이들은 그렇게 하염없이 울곤 했습니다"라고 말했다. 부인은 울음을 그치기 위해 심호흡을 크게 해 봤지만, 눈물은 그치지 않았다. 

필리핀 귀국 이후 원망이 많이 사라지긴 했다. 하지만, 알란은 일하다가 다친 자신에 대해 M*공업이 입원 당시 별다른 관심을 보여주지 않았다는 것에 대해서는 매우 서운하게 생각했다. 그나마 위로가 되는 것은 자신의 산재 처리에 소극적이었던 회사를 대신해, 부천에 소재한 이주노동자 지원단체에서 많은 도움을 줬고, 결국 보상을 받을 수 있었다는 것이었다.

필리핀 공항에서 볼 수 있는 안내판으로, 알란도 이 창구를 통해 출국했을  것이다.
▲ 필리핀 해외노동자 전용 입구 필리핀 공항에서 볼 수 있는 안내판으로, 알란도 이 창구를 통해 출국했을 것이다.
ⓒ 고기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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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으로 이주노동을 떠나기 전에는 지프니 운전을 했다는 알란. 그는 이제 조그마한 구멍가게인 사리사리 스토어를 열어 적은 돈이나마 벌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다행히도 알란이 사는 팡가시난 지역은 해안가에 위치해 해수욕과 낚시를 즐기러 찾아오는 외지인들이 많이 있어 큰돈은 아니더라도 가족의 생계는 꾸릴 수 있을 거라고 한다.

신앙 생활을 위해 좋은 조건의 회사를 마다하고 회사를 옮겼다가 사고를 당했으면, 하나님에 대한 원망도 있을 법한데, 알란은 그런 원망은 없었다. 그저 작은 소망을 담아 미래를 개척하려고 했다. 그런 그의 발버둥에 안타까워하면서도 가족은 그의 가장 큰 힘이 되고 있었다.

알란이 당한 문제는 결국 "너희는 돈 벌러 왔으니, 군소리 말고 일이나 해라. 일요일, 휴일에 특근해서 많은 돈 벌 수 있으면 행복한 거 아니냐. 외국까지 와서 굳이 종교 생활하는 것보다는 돈 벌 수 있는 기회가 있을 때 일해라"라는 태도로 강제근로를 시키면서도, 오히려 시혜를 베푸는 양 너무나 당당한 우리사회의 폭압성을 여실히 보여주는 것이었다. 알란의 상처는 세상에는 돈보다 중요한 게 있다는 사실을 무시하는 사회가 얼마나 잔인할 수 있으며, 얼마나 많은 피해자를 만들 수 있는지를 보여주고 있다.


태그:#이주노동, #필리핀, #산재, #고용허가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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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별과 편견 없는 세상, 상식과 논리적인 대화가 가능한 세상, 함께 더불어 잘 사는 세상을 꿈꿉니다. (사) '모두를 위한 이주인권문화센터'(부설 용인이주노동자쉼터) 이사장, 이주인권 저널리스트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저서 『내 생애 단 한 번, 가슴 뛰는 삶을 살아도 좋다』, 공저 『다르지만 평등한 이주민 인권 길라잡이, 다문화인권교육 기본교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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