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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휴우가 묘지'로 가는 산길.
 '휴우가 묘지'로 가는 산길.
ⓒ 오마이뉴스 장재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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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인 애완동물 묘지. 깔끔하게 정돈되어 꽃 까지 꽂혀있다.
 일본인 애완동물 묘지. 깔끔하게 정돈되어 꽃 까지 꽂혀있다.
ⓒ 오마이뉴스 장재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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탄광에서 죽은 조선인강제징용노동자들의 묘지를 표시하는 돌.
 탄광에서 죽은 조선인강제징용노동자들의 묘지를 표시하는 돌.
ⓒ 오마이뉴스 장재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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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일 강제병합 100년'을 맞아 조선인 강제징용 노동자들의 고난의 현장을 찾아 떠난 '평화역사기행단'은 지난 6월 27일 오후 '휴유가 묘지'를 방문했다. '휴우가 묘지'는 후쿠오카현 타가와군 소에다조 오아자에 위치한 휴유가 성씨의 집성촌 뒷산에 있다.

길가에 버스를 세워 놓고 계단을 따라 올라간 뒤 풀숲을 헤쳐서 100미터 정도 올라가니 묘지가 나왔다. 우리 일행을 안내하던 배성록씨는 우리에게 먼저 자그마한 돌들이 세워져 있는 곳을 보여줬다.

우리는 그것이 바로 조선인 강제 징용자들의 묘인 줄 알고 사진기의 셔터를 눌러댔다. 아니란다. 그것은 바로 애완동물의 묘라고 했다. 다시 조금 올라가니 많은 돌들이 세워져 있었다. 조금 전에 본 애완동물의 묘와 비슷하면서도 좀 더 허술해 보인다.

이곳 저곳에 어지럽게 흩어져 있는 돌들, 바로 그것이 조선인 노동자들의 묘라고 했다. 배동록씨는 연신 우리를 불러대며 그 각 각의 돌들에 준비한 꽃을 꽂고 향을 피워달라고 요청했다. 꽃을 꽂는 어느 돌 옆에는 '한반도기'가 꽂혀있었고, 태극기가 꽂혀 있는 곳도 있었다.

조선인 강제징용노동자들의 묘.
 조선인 강제징용노동자들의 묘.
ⓒ 오마이뉴스 장재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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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인 징용노동자들의 묘지에 국화꽃을 꽂고 있는 '역사평화기행단' 단원들.
 조선인 징용노동자들의 묘지에 국화꽃을 꽂고 있는 '역사평화기행단' 단원들.
ⓒ 오마이뉴스 장재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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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는 배씨의 설명이 이어졌다.

인근 후르카모 탄광에 끌려온 조선인 강제 징용자들은 죽어서도 사람의 대접을 받지 못했다. 죽은 조선인들의 시체는 그대로 아무렇게나 버려졌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조선인 노동자들은 자신들이 돈을 내어 시신을 화장해 이곳 '휴우가묘'에 몰래 묻었다.

일본인들은 동료들의 장사를 지내는 것도 허락하지 않았다. 밤에 몰래 나와서 자신들의 돈을 들여서 묻어야 했다. 시신 한 구 뉘일 땅도 없어서 남의 묘지에 묻어야 했다. 당시 이곳은 휴우가 집안의 애완동물 공동묘지였다. 그리고 그것을 표시하기 위해 애완동물들처럼 돌을 세웠다. 이렇게 이곳에 묻힌 조선인 노동자가 모두 37명이나 된다고 했다.

이곳은 그동안 잘 알려지지 않았다. 남의 묘에 몰래 묻었으니 그럴 수밖에. 그러던 중 1974년 일본의 양심적인 인사들이 조선인강제연행진상조사를 진행하면서 당시 탄광노동자 중 유일한 생존자였던 김귀동(현재는 사망)씨의 증언에 의해 이곳이 처음 알려지게 됐다.

이러한 설명을 듣던 강제 징용 노동자 김한수 씨가 울음을 터트리고 말았다.

"불쌍한 사람들, 나라를 잘못 만나서 뼈까지도 이렇게 제대로 묻히지도 못하고 동물들 묻히는 곳에 묻혀있다니…. 어떻게 이럴 수가 있나…. 죄송합니다. 너무 늦게 와서 죄송합니다. 언젠가는 우리 정부가 당신들을 우리나라로 모셔갈 겁니다. 정말 죄송합니다."

"세상 어느 하늘아래 이렇게 못된 나라가 있을 수 있나. 일본 정부는 이것을 보고도 같은 인간으로서 반성이 되지 않느냐. 반성하고 뉘우쳐야 한다. 다시는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해야 한다. 이제는 평화를 말해야 한다."

지켜보는 우리 모두가 울었다. 눈물을 멈출 수가 없었다. 가슴이 아려왔다.

다시 배씨가 설명을 덧붙였다.

"이국 타향 머나먼 이곳에 끌려와 수많은 사람이 죽었다. 수백 미터 아래 갱도에서 밤낮없이 석탄을 캐내다가 죽음을 당했다. 그럼에도 회사는 이들을 위해 아무것도 해 주지 않았다. 자기들의 돈을 들여서 화장을 해 이 곳에 묻었다. 그 것도 남의 묘에…."

그러면서 배씨는 노래 한 소절을 불렀다. 타령이다.

"우리고향 경상북도인데/ 나는야 어째서 어~~ 쏙바로 왔느냐/ 일본 탄촌 좋다고 누가 말했느냐/ 일본 탄광 와보니 배고파 못살겠네/ 숱 파려면 배고파 죽겠는데 그 말만 하면 몽둥이 맞았네/ 15세 소년은 몸이 아파서 하루 놀다가 몽둥이 맞았네/ 몽둥이 맞고서 굴 안에 끌려갔다 천정이 떨어져서 이 세상과 이별했네/ 아이고 죽은 사람을 옆에 두고 석탄을 파내려니/ 나라 뺏긴 민족은 이렇게 설움인가/ 여기 저기 죽어가도 초상 치르는 것은 한 번도 못 봤네…."

설명을 들으며 오열하고 있는 강제징용 노동자 김한수 씨.
 설명을 들으며 오열하고 있는 강제징용 노동자 김한수 씨.
ⓒ 오마이뉴스 장재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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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를 안내하던 배동록 씨가 땅에 주저앉아 통곡을 하고 있다.
 우리를 안내하던 배동록 씨가 땅에 주저앉아 통곡을 하고 있다.
ⓒ 오마이뉴스 장재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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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강제 징용 노동자 안룡환씨에게 이 신세한탄 타령을 배웠다고 했다. 모두 다 하려면 30분이나 걸린다고 하면서 일부만 불러줬다. 타령을 부르던 배씨는 땅바닥에 주저앉아 비석대신 세워져 있는 돌을 쓰다듬고 울부짖었다.

"살아서도 죽어서도 개고양이 만도 못한 대접받고, 돌 한 개만도 못한 대접 받는 이런 일이 어떻게 있을 수 있나. 여러분 기억하세요. 잊지 마세요. 이제는 우리가 일본과 함께 나아가야 합니다. 다시는 이런 일이 되풀이 되지 않아야 합니다. 아리랑을 함께 부릅시다."

아리랑을 부르는 동안 우리는 손을 잡고 함께 울었다. 가슴이 너무 아팠다. 우리를 취재하던 NHK카메라 기자도 슬쩍 눈물을 훔치고 있었다.

돌아오는 버스에서 배씨는 1992년 한국에서 태평양전쟁희생자유족회 광주지부에서 이곳을 방문했을 때 이들의 유골을 한국으로 가져가 천안 '망향의 동산'에 안치하겠다고 했는데 그러지 말라고 했다고 말했다. 그는 이대로 남기는 게 좋다. 그 역사를 잊지 않도록 이대로 두고 많은 사람들이 와서 그 날의 역사를 배우게 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 뒤 우리는 타가와 석탄박물관을 찾아갔다. 이 박물관 뒤편 언덕에는 조선인 강제징용희생자 위령비가 서 있다. 이 위령비는 이 지역 각 절 등에 흩어져 있는 조선인 노동자들의 유골을 모아 안치했던 곳으로 현재는 천안 망향의 동산으로 유골을 모두 보내고 이제는 추모비만 남겨져 있다고 했다.

우리는 석탄박물관도 돌아봤다. 석탄과 관련한 모든 기록이 남겨져 있었다. 밀납인형으로 재현된 채탄 과정은 얼마나 채탄작업이 힘든 작업이었는지 간접적으로 알져주고 있었다. 남의 나라 땅에 강제로 끌려와서 캄캄한 굴 속에서 죽어가야 했을 우리의 선조들의 한숨이 들리는 듯 했다.

타가와 석탄박물관 뒤편 언덕에 세워진 조선인 강제징용희생자 위령비의 한국인 희생자 이름들.
 타가와 석탄박물관 뒤편 언덕에 세워진 조선인 강제징용희생자 위령비의 한국인 희생자 이름들.
ⓒ 장재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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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가와 석탄박물관 뒤편 언덕에 세워진 조선인 강제징용희생자 위령비.
 타가와 석탄박물관 뒤편 언덕에 세워진 조선인 강제징용희생자 위령비.
ⓒ 오마이뉴스 장재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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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강제징용 노동자의 후손 '배동록씨'
조선인 강제노동자의 후손 배동록 씨.
 조선인 강제노동자의 후손 배동록 씨.
ⓒ 오마이뉴스 장재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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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를 '휴우가 묘지'로 안내한 배동록씨는 평생 한복을 입고 사는 열혈 조선인이다. 그의 아버지는 1940년 경 경상남도에서 살다가 강제 연행되어 일본 후쿠오카현 키타큐슈 야하타제철소에서 일했고, 1942년 그의 어머니도 아이 넷을 데리고 아버지를 찾아 일본에 건너와 아버지와 함께 제철소에서 노동을 해야 했다.

1943년에 배동록씨를 낳은 그의 어머니는 해산 3주 만에 부두에 쌓인 철광석 더미를 화물차에 실어 올리는 중노동을 했다. 당시 이 제철소에는 6000명의 조선인 노동자들이 일을 하고 있었다. 그의 아버지 배봉곤씨는 1981년 사망했고, 그의 어머니 강금순씨는 얼마 전 세상을 떠났다. 세상을 떠나기 전까지 강금순씨는 일본에 있는 소학교 등을 돌면서 조선인 강제노동자에 대한 내용을 '강연' 해왔다.

하루 12시간씩의 중노동을 했지만, 일본이 패전한 후 회사는 단 한 푼의 보상도 하지 않은 채 해고를 해 버렸다. '야채 장사'를 하면서 남의 나라에서 7남매를 키운 강씨는 일본의 배타적인 분위기 속에서도 한국인의 뿌리를 잊지 않고 당당하게 살아왔다.

그러한 부모님의 정신을 물려받아 배동록씨도 한국인으로서 당당하게 일본사회에서 살아가고 있다. 늘 한복을 입고 살면서 가슴에는 어머니 강씨의 '문감'을 걸고 다닌다. 이 문감은 어머니가 일했던 제철소 하청업체가 발행한 일종의 신분증으로 뒷면에는 자신이 태어나기 전 가족사진이 실려 있다.

이 문감을 가슴에 걸고 다니면서 그는 조선인 강제징용 노동자들의 진실을 알리는 활동을 해 오고 있다. 또한 '강제연행을 생각하는 모임'에 참여해 다른 일본인 및 재일교포들과 함께 다양한 활동을 하고 있다.

배씨는 "어머니는 늘 말씀하시기를 '철광석과 함께 묻혀 화물차 속에 떨어져 그 괴로움에서 벗어나고 싶었다'고 했다"면서 "이러한 식민지 지배 하에서 겪어야 했던 조선인 노동자들의 노예 같은 삶의 진실을 결코 잊어서는 안 된다"고 말했다.



태그:#조선인강제징용노동자, #한일강제병합100년, #징용노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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