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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야의 초대 왕후가 될 인도 출신의 허황옥(서지혜 분).
 가야의 초대 왕후가 될 인도 출신의 허황옥(서지혜 분).
ⓒ MB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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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왕국 가야의 건국과정을 다루고 있는 MBC 드라마 <김수로>. 현재 이 드라마에서는, 출세에 대한 의욕을 상실한 채 건달 생활을 하고 있는 젊은 김수로(지성 분)의 삶을 다루고 있다.

그런 김수로를 사랑하는 두 명의 여인이 있다. 하나는 인도 여인인 허황옥(서지혜 분). 상인인 아버지 허장상을 따라 김해 땅에 온 허황옥은 우연히 알게 된 김수로를 남몰래 짝사랑하고 있다. 또 하나는 신라 여인인 아효(강별 분). 신라 공주인 아효는 김해 땅에 첩보활동을 하러 왔다가 우연한 기회에 김수로와 사귀게 되었다.

<김수로> 드라마는 픽션이지만, 허황옥은 실존인물

김해시 구산동에 소재한 허황옥의 무덤 앞에 있는 비석. 비문 왼쪽에 허황옥을 지칭하는 ‘보주태후’(普州太后)란 글귀가 있다.
 김해시 구산동에 소재한 허황옥의 무덤 앞에 있는 비석. 비문 왼쪽에 허황옥을 지칭하는 ‘보주태후’(普州太后)란 글귀가 있다.
ⓒ 김종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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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같은 드라마 속의 내용은 거의 다 허구에 지나지 않는다. 김수로가 가야를 건국하기 이전에 허황옥이 이미 이 땅에 왔다는 이야기나, 김수로가 신라 공주 아효와 사랑을 나누었다는 이야기는 모두 다 픽션이다.

단, 한 가지는 사실이다. 허황옥이란 인도 여인이 있었고 그 여인이 김수로의 왕후가 되었다는 이야기만큼은 역사적 사실에 부합한다. 이 부분은, 가야의 역사를 다루고 있는 <가락국기>의 내용과 일치한다. 고려시대에 편찬된 이 책에는 허황옥이 아유타(阿踰陁)의 공주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렇다면, 허황옥의 출신지인 아유타는 어디에 있었을까? 가야인들은 그곳이 남천축국(인도의 고대왕국)이나 서역(중국 서쪽)의 어느 나라에 있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가야인들이 그렇게 생각했다는 점은, 1646년에 허목이 쓴 '보주태후릉 비음기'에 기록되어 있다. 보주태후릉이란 보주태후(普州太后)라고 불린 허황옥의 무덤을 가리킨다. 이 무덤은 현재 김해시 구산동의 수로왕비릉에 있다.

또 비음기(碑陰記)란 무덤에 있는 비석의 뒷면에 쓰인 글귀를 가리킨다. 이처럼 이미 오래 전부터 한국인의 조상들은 가야의 초대 왕후인 허황옥이 인도 여인일 것이라고 생각했다.

놀라운 것은 허황옥이 인도와 가야를 연결하는 매개체였음을 보여주는 물증이 오늘날 아시아 곳곳에 존재한다는 점이다. 대체 어떤 증거일까?

이 문제에 관한 한, 고고인류학자인 김병모의 견해가 현재로서는 가장 유력하다. 그래서 이 글에서는 학설이 대립할 경우에는 김병모의 주장을 채택하여 스토리를 완성하도록 하겠다.

납릉심문 쌍어문, 인도반도 등지에도 있네?

김해여객터미널에서 출발해 해반천(海畔川)이란 개천을 건너 동쪽으로 걸어가다 보면, 도로 왼쪽에 사적 제73호 수로왕릉(김해시 서상동 소재)이 보인다. 숭화문(崇化門)이라고 쓰인 수로왕릉의 정문을 지나 가락루(駕洛樓)라는 망루를 통과하면 납릉심문(納陵心門)이라고 쓰인 문이 나온다. 그 문을 통과하면 김수로의 무덤이다.

수로왕릉 안의 납릉심문(納陵心門)에 새겨진 쌍어문. 붉은 별표로 표시된 부분이 물고기 무늬다.
 수로왕릉 안의 납릉심문(納陵心門)에 새겨진 쌍어문. 붉은 별표로 표시된 부분이 물고기 무늬다.
ⓒ 김종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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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납릉심문에는 좀 희한한 무늬가 있다. 제단 같은 것을 중앙에 두고 물고기 두 마리가 서로 마주보고 있는 무늬다. 쌍어문(雙魚文)이라고 불리는 것이다. 납릉심문의 우측에 있는 숭인문(崇仁門)에도 동일한 무늬가 있다.

흥미로운 것은, 이런 쌍어문이 인도반도의 인도·파키스탄·방글라데시·네팔 등지에서 집중적으로 발견된다는 점이다. 허황옥의 출신지인 아유타 즉 아요디야에서도 마찬가지다. 또 인도 북부의 유피주(州)에서는 쌍어문이 주의 상징일 뿐만 아니라, 자동차 번호판이나 경찰의 배지에까지 새겨져 있다. 쌍어가 인간을 보호해줄 것이라는 믿음이 이런 현상의 근저에 깔려 있다고 한다.

고대로부터 이 지역에 존재한 쌍어 숭배사상이 그런 형태로 오늘날까지 전해지고 있는 것이다. 한국에서는 쌍어문이 가야시대의 유물이 되었지만, 인도반도에서는 아직도 그것이 현지인들의 의식을 일정 정도 지배하고 있는 것이다. 가야 유적과 인도반도에서 동일한 쌍어문이 발견되는 것은 이 무늬가 허황옥 집단에 의해 가야에 전파되었음을 보여주는 증거라는 것이 김병모의 견해다.

인도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쌍어문. 자동차 번호판은 물론이고 경찰의 배지에서도 쌍어문을 발견할 수 있다. 별표 부분에서 쌍어문을 발견할 수 있다.
 인도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쌍어문. 자동차 번호판은 물론이고 경찰의 배지에서도 쌍어문을 발견할 수 있다. 별표 부분에서 쌍어문을 발견할 수 있다.
ⓒ 김병모 저 <허황옥 루트, 인도에서 가야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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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도반도에 속한 네팔에서도 쌍어문을 발견할 수 있다. 사진은 문에 새겨진 쌍어문. 별표로 표시된 부분이 쌍어문이다.
 인도반도에 속한 네팔에서도 쌍어문을 발견할 수 있다. 사진은 문에 새겨진 쌍어문. 별표로 표시된 부분이 쌍어문이다.
ⓒ 김병모 저 <허황옥 루트, 인도에서 가야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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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욱 흥미로운 것은 허황옥 가문이 인도반도에서 가야 땅까지 이동하면서 경유한 것으로 보이는 지역들에서도 쌍어문이 발견된다는 점이다. 그 과정을 구체적으로 살펴보자.

허황옥은 왜 가야에 왔을까

가야가 건국된 서기 42년으로부터 얼마 전인 기원전 1세기에, 인도 서북쪽에 살던 중앙아시아 쿠샨족이 인도로 밀고 내려왔다. 이에 따라 아요디야(아유타)란 도시의 지배층 중에는 동쪽에 있는 중국을 향해 망명을 떠나는 사람들이 생겨났다.

가야에 당도한 서기 48년에 허황옥이 스스로를 나이 16세의 아유타 공주라고 소개한 점을 볼 때에, 그는 아요디야란 도시를 지배하는 군장(君長)의 딸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 가문이 아요디야에 있었을 때만 해도 허황옥은 아직 세상에 태어나지 않았다. 왜냐하면, 허황옥은 서기 48년에 16세였고, 그의 가문은 이미 그 이전인 기원전 1세기에 아요디야를 떠났기 때문이다. 중국으로 망명을 떠난 후에도 이 가문이 아유타 출신의 유민들을 거느리고 있었기 때문에, 허황옥이 자신을 아유타 공주라고 소개했던 것으로 보인다. 

중국으로 망명을 떠난 허씨 가문이 정착한 곳은 오늘날의 중국 사천성 안악현에 해당하는 보주(普州) 땅이었을 거라는 게 김병모의 추정이다. 중국 후한(後漢)의 역사를 기록한 <후한서>에서 서기 1세기에 보주 땅에 소수민족들이 살았다고 기술한 점, 오래 전에 보주 땅에 형성된 허씨 집성촌이 오늘날까지 존속하고 있는 점, 보주 땅의 암벽에서 "후한 초에 허씨의 딸 황옥이 용모가 아름답고 지혜가 남들보다 나았다"라는 글귀가 발견된 점, 김해의 수로왕비릉에 있는 비문에서 허황옥을 보주태후라고 칭한 점 등이 김병모가 제시한 근거들이다.

한나라를 계승한 후한(後漢)은 서기 25년에 건국되었고 가야는 서기 42년에 건국되었으므로, 허황옥이 보주 땅에 살았다는 '후한 초'라는 시점은 가야 건국 직전과 거의 일치한다. 서기 48년에 허황옥이 16세였다는 <가락국기>의 기록에 신빙성을 더해주는 대목이다.

이런 사실로부터 우리는 허황옥이 보주태후라고 불린 이유를 짐작할 수 있다. 가야에 오기 전에 보주에 살았기 때문에 그렇게 불린 것이다. 제주에서 서울로 시집온 여인을 제주댁이라고 부르듯이 말이다.

그럼, 보주 땅에 살던 허황옥 가문이 그곳을 떠나 동쪽의 가야 땅을 향해 이동한 이유는 무엇일까? 그 이유는 <후한서> '광무제 본기'에서 확인할 수 있다. 후한의 초대 황제인 광무제의 역사를 기록한 '광무제 본기'에 따르면, 허황옥이 가야에 출현하기 1년 전인 서기 47년에 보주를 비롯한 사천성 지역에서 소수민족들의 반란이 일어났고, 반란이 진압된 후에 사건 연루자들이 양자강 연변의 무한(武漢)으로 강제이주를 당한 일이 있다.

이런 점을 볼 때, 허황옥 가문도 이 반란에 가담했다가 무한 땅으로 강제이주를 당했고 그 뒤에 배를 타고 양자강을 지나 바다를 거쳐 가야 땅까지 당도했을 것이라는 게 김병모의 추정이다. 이런 추정이 가능한 것은 그들이 지나간 것으로 보이는 지역마다 쌍어문이 발견되었기 때문이다. 인도반도의 쌍어 숭배사상을 반영하는 쌍어문이 허황옥 집단의 이동루트를 따라 김해의 수로왕릉에까지 도달하게 되었다는 게 김병모의 견해다.

김수로 무덤에 쌍어문 새긴 깊은 뜻

그런데 여기서 이런 의문을 고려해볼 수 있다. 가야인들이 김수로의 무덤 앞에 쌍어문을 새긴 이유는 무엇일까? 자신들의 초대 왕후가 인도인이었음을 후세에 전하기 위해 그렇게 했을까? 그렇지는 않다. 그렇다면 어떤 이유일까?

김해시의 전하교 입구에 있는 쌍어문. 김해시 곳곳에서 이런 조각물을 발견할 수 있다.
 김해시의 전하교 입구에 있는 쌍어문. 김해시 곳곳에서 이런 조각물을 발견할 수 있다.
ⓒ 김종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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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도반도에서 사용된 고대 언어인 드라비다어에서는 '가야' 혹은 '가라'라는 발음이 '물고기'를 뜻했다고 한다. 가야라는 국호가 고대 인도어에서 나온 것이라면, 이 국호에는 인도반도의 쌍어 숭배사상이 반영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물고기를 뜻하는 가야라는 발음을 국호로 선택했기 때문에, 가야인들에게는 물고기란 것이 어류뿐만 아니라 국호도 의미하는 것이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므로 수로왕릉에 있는 물고기 무늬는 가야의 국호를 상징하는 것이라고 해석할 수 있다. 물론 이것은 가야라는 발음이 고대 인도어에서 나왔다는 것을 전제로 할 때에만 유효한 설명이다.

물고기 무늬에 얽힌 위와 같은 역사를 기념하기 위해 오늘날 김해시에서는 시내 곳곳에 쌍어문 조각물을 만들어 놓았다. 특히 주요 교량에서 쌍어문을 쉽게 발견할 수 있다. 또 인도의 아요디야시(市)에서도 허황옥과 가야의 인연을 기념하기 위해 지난 2000년에 가락공원을 조성해놓았다. 2천 년 전의 허황옥이 한국과 인도의 두 도시를 연결해주고 있는 것이다. 

지금까지 살펴본 바와 같이, 고대 인도인들이 가야 땅에 정착해서 왕후 자리를 차지했다는 사실은 한민족이 단일한 혈통이 아닌 복수의 혈통으로 이루어진 민족임을 보여준다. 북방 유목민족 출신의 김수로 집단과 남방 인도 출신의 허황옥 집단이 현지 토착세력과 힘을 합해 가야라는 나라를 운영한 것이다. 이 같은 가야의 역사는, 한국인들이 협소한 단일민족 관념을 떨쳐버리고 세계를 내 형제처럼 포용하도록 하는 데에 기여할 것이다.


태그:#김수로, #쌍어문, #허황옥, #가야, #인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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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imjongsung.com.일제청산연구소 연구위원,제15회 임종국상.유튜브 시사와역사 채널.저서:대논쟁 한국사,반일종족주의 무엇이 문제인가,조선상고사,나는 세종이다,역사추리 조선사,당쟁의 한국사,왜 미국은 북한을 이기지못하나,발해고(4권본),패권쟁탈의 한국사,한국 중국 일본 그들의 교과서가 가르치지 않는 역사,조선노비들,왕의여자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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