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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강길. 바위 절벽 아래로 지나가는 2차선 도로. 생각했던 것 이상으로 넓고 한적하다.
 동강길. 바위 절벽 아래로 지나가는 2차선 도로. 생각했던 것 이상으로 넓고 한적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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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낮 기온이 30도를 넘어서는 날이 계속되고 있다. 살갗이 몹시 따갑다. 아주 오래 전에 아프리카 나이지리아에 출장을 다녀온 적이 있는데, 그곳 적도 지방의 날씨가 이와 비슷했다. 햇볕 아래 가만히 서 있는 것만으로도 머리가 띵했다. 그늘이 없는 곳에서 일을 하면 몇 분 지나지도 않아서 몸이 흐물흐물해졌다. 서 있기도 힘들었다. 바로 그늘로 들어서지 않으면, 정신을 잃어 버릴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었다.

그처럼 심한 정도는 아니지만, 요즘 이 나라의 날씨가 점점 그 모양으로 변해가고 있다는 의심이 짙다. 변할 게 따로 있지, 요즘 날씨가 왜 이 모양인지 모르겠다. 자전거를 고속버스에 싣고 정선 시외버스터미널에 도착한 게 지난 24일 점심 무렵이다. 버스 안에서는 잘 냉장된 신선한 토마토처럼 앉아 있다가 버스에서 내려서는 바로 연탄불 위에 올려놓은 반건조 오징어처럼 바짝 오그라들었다. 지금도 귓가에 내 몸이 지글지글 익어가는 소리가 들린다.

첩천산중 산 아래를 멀리 에돌아 나가는 동강 물길. 절벽 아래를 굽어 도는 물길이 천혜의 비경을 간직하고 있다.
 첩천산중 산 아래를 멀리 에돌아 나가는 동강 물길. 절벽 아래를 굽어 도는 물길이 천혜의 비경을 간직하고 있다.
ⓒ 성낙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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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강과 조양강
동강은 통상 정선군 가수리에서 영월읍 하송리까지의 물줄기를 지칭한다. 그리고 그 위쪽 상류에 있는 물줄기를 조양강이라 부른다. 이 글에서 시작하는 정선읍 내의 '동강 길'은 사실상 절반 이상이 조양강에 속한다.

하지만 이 글에서는 조양강과 동강을 나누지 않고, 정선군에서 내건 '강원도 산소길, 동강길'의 의미를 담아 그냥 모두 동강이라는 명칭을 사용했다. '동강길'은 정선군 고성리에서 끝난다.

동강 하면 '어라연'을 먼저 떠올리는 사람들이 있다. 동강 제1경이라고 불리는 어라연은 영월에서 출발해 동강 상류로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정선에서 하류 쪽으로 내려가는 '동강길'과는 서로 연결이 되어 있지 않다.

만약에 이번 여행의 목적지가 동강이 아니었다면, 십리도 못 가서 발병이 나는 게 아니라 채 1km도 못 가서 열병이 나 쓰러졌을 게 분명하다. 얼마나 다행인지 모른다. 멀리 갈 것도 없이 터미널 앞이 '동강길'이다. 강 건너 높은 바위절벽 아래 한 줄기 도로가 구불구불 이어지고 있는 것이 보인다. 오늘 내가 자전거를 타고 달려 갈 길이다.

터미널을 나서서 도로를 오른쪽으로 따라 올라가다 보면, 왼쪽으로 조양강을 가로지르는 다리가 나온다. 여행은 그곳 다리가 끝나는 지점에서부터 시작된다.

그 다리 끝에 '강원도 산소길, 동강길 34km'라는 표시가 적힌 팻말이 서 있다. 그 팻말이 가리키는 방향으로, 한적하기 짝이 없는 2차선 도로가 놓여 있다. 언뜻 드는 생각이 '자전거 타기 참 좋은 길'이다. 일부러 자전거를 타라고 만들어 놓은 것 같아서, '이렇게까지 할 필요는 없는데...'하는 황송한 느낌마저 든다. 이렇게 황송한 느낌이 들 수밖에 없는 건, 이 도로가 애초 생각했던 것 이상으로 넓고 높게 만들어졌기 때문이다. 이 역시 지역 개발의 명분을 띠고 있다.

정선제1교 앞. 동강길 거리 표시 팻말.
 정선제1교 앞. 동강길 거리 표시 팻말.
ⓒ 성낙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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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일들이 있고 나서도 동강은 여전히 아름다운 모습으로 남아 있다. 주변 경관은 왜 또 그렇게 아름다운지, 눈을 돌리는 곳마다 절경이다. 이러저러한 매체를 통해 사진으로 보던 것하고도 다르다. 사실 손바닥만한 사진으로는 수백 미터 층암절벽 사이 수십 미터 폭 강물이 승천하는 용처럼 꿈틀대며 휘돌아나가는 웅장한 멋을 표현할 방법이 없다. 더 이상의 막개발만 이뤄지지 않는다면 수천 수만 년, 그 이상을 가고도 남을 아름다움이다.

그처럼 아름답고 웅장한 풍경 아래 20인치 미니벨로를 타고 가는 내 모습이 마치 호기심 많은 한 마리 작은 다람쥐 같다. 가다 멈추고 또 가다 멈추고, 뒤로는 또 어떤 풍경인지 돌아다보고 또 돌아다보고, 좀처럼 앞으로 나가질 못한다.

동강은 강물이 흐르는 속도에 맞춰 천천히 제 모습을 바꾸는 강이다. 그래서 그런지 자전거를 타러 온 나 역시 강물처럼 천천히 흘러가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만든다. 동강은 이처럼 더불어 흘러가는 것, 더불어 사는 것이 어떤 것인지를 알게 해주는 강이다. 동강에서는 사실 자전거도 빠르다.

조양강에서 래프팅을 즐기는 사람들.
 조양강에서 래프팅을 즐기는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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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강길을 수km 달려 내려온 뒤로는 이제 거의 몰아지경에 빠져 물 흐르듯이 페달을 밟는다. 내가 나 같지 않고, 자전거가 자전거 같지 않다. 인간이면서, 인간의 세상이 아닌 곳을 여행하는 기분이 이럴까? 동강에서는 때로 이 모든 게 지나치게 몽환적이다. 동강은 한쪽 강가 깎아지른 절벽 아래 시멘트로 다진 도로가 아니었다면 별유천지 비인간이란 표현이 딱 들어맞았을 곳이다.

하지만 이 별천지에도 사람들이 드나들기 시작한 지 이미 오래다. 수억 년에 걸쳐 형성된 지형에 신세기 사람들이 아로새기기 시작한 문명의 흔적이 그 수를 점점 더 불려가고 있다. 여우, 다람쥐가 다니던 길에 '올레'가 놓이고, 산양이 버티고 서 있던 절벽 위에 '전망대'가 들어서고 있다.

병방산. 붉은 원 안이 새로운 시설이 만들어지고 있는 병방치 전망대. 이 위에서 한반도 지형인 '쉬기대'가 내려다 보인다.
 병방산. 붉은 원 안이 새로운 시설이 만들어지고 있는 병방치 전망대. 이 위에서 한반도 지형인 '쉬기대'가 내려다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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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방치 전망대(7월 완공 예정)
 병방치 전망대(7월 완공 예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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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하리의 동강광하안내소를 지나 얼마 가지 않은 곳에서 단장을 끝낸 지 얼마 안 된 듯한 생태공원과 마주친다. 동강 유역 전체가 자연생태공원인데, 그 안에 인간이 만든 생태공원을 들어앉힌 건 무슨 이유일까? 이번에는 생태공원 너머 '병방치' 절벽 위로 U자형 전망대가 들어서고 있는 게 보인다. 몇 년 전 그랜드캐니언에 설치된 스카이워크를 흉내 낸 것이 분명한 이 전망대는 7월 완공을 앞두고 있다.

병방치에서 내려다보는 동강 풍경은 동강을 상징하는 비경 중에 하나다. 병방치 아래에 한반도지형을 닮은 '쉬기대'가 있다(이 같은 한반도지형은 서강에서도 볼 수 있다). 아마도 그 비경을 좀 더 돋보이게 하려는 노력이 병방치에 그 같은 전망대를 만들어야겠다는 생각을 이끌어냈을 것이다. 그 높은 절벽 위에 에펠탑 같은 철탑을 두 개씩이나 올려 세운 사람들로선 그깟 전망대 하나 더 올려놓는 것쯤 아무것도 아니었을 것이다.

그 근처 바위 절벽에 동강할미꽃 서식지가 있다. 부디 그 서식지만큼은 사람 손 타는 일 없이 늘 건강하고 깨끗했으면 하는 바람이다. 동강할미꽃은 '동강에 분포하는 한국 특산종'으로 3월과 5월 사이에 꽃이 피며, '키는 15~20cm의 보라색 계열의 꽃이 피고... 대부분 꽃이 하늘을 향하는 동강 일대 절벽 및 바위에서 자생하는 보호 가치가 큰 식물'이다. 고개를 떨구는 보통 할미꽃과 달리 '꽃이 하늘을 향'한다는 점이 특이하다. 이 외에도 동강을 서식지로 삼고 있는 희귀 동식물종이 숱하다.

붉은뼝대. 멀리서 보니, 마치 푸른 두건을 쓴 사람이 강물을 조용히 내려다보고 있는 모습이다.
 붉은뼝대. 멀리서 보니, 마치 푸른 두건을 쓴 사람이 강물을 조용히 내려다보고 있는 모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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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만큼 동강은 아직도 원시 생명력으로 충만한 곳이다. 그런 동강에서 자연이 빚은 풍경의 절정을 본다. 구불구불 돌아가는 강변, 가수리에서 '붉은뼝대'와 '오송정'을 발견한다. 푸른 나무로 옷을 해 입은 바위 절벽 위로 살짝 붉은 얼굴이 내비친다. 석회암 절벽이 붉은 색을 띠고 있어 '붉은뼝대'라 불리는 곳이다. 멀리서 보기에도 범상치 않아 보이는 절벽이다. '뼝대'라는 명칭이 독특하다. 뼝대는 강원도 말로 '바위로 이루어진 높고 큰 낭떠러지'를 뜻한다. 사람이 일부러 만들어 놓으려고 해도 만들 수 없는 풍경이다.

붉은뼝대를 지나면, 오송정이 나타난다. 강변으로 툭 튀어나온 바위 절벽 위에 붉은 피부를 드러낸 소나무 두 그루가 푸른 나무 숲 위로 우뚝 서 있다. 그 느낌 참 기이하다. 그 중 절벽 끝에 가까스로 발을 디디고 선 소나무 한 그루가 색깔이며 크기에서 주변의 다른 나무들을 크게 압도하고 있다. 가히 나무들의 제왕이라 할 만하다. 이 소나무는 천년을 살았다고 전해진다.

오송정. 1천년을 산 소나무 한 그루가 절벽 위에 위태롭게 올라 서 있다. 자연이 빚은 절경이다.
 오송정. 1천년을 산 소나무 한 그루가 절벽 위에 위태롭게 올라 서 있다. 자연이 빚은 절경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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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나무들에 얽힌 이야기 또한 국보급이다. 옛날 이 절벽에는 모두 다섯 그루의 소나무가 있었다고 한다. 그런데 '나라에 큰 환란이 닥칠 때마다 한 그루씩 죽어 지금은 두 그루만 남아 있'다는 것이다. 두 그루만 남아 있다는 표현이 꽤 절박한 느낌을 준다. 그리고 한 나라의 운명이 동강 벼랑 위에 올라 선 소나무의 운명과 바로 연결이 되어 있다는 이야기 역시 심상치 않게 들린다.

동강댐 건설이 백지화된 2000년 이후에도 인간들이 전투를 벌이듯이 침범하는 바람에 동강이 조금씩 제가 있어야 할 땅을 잃어가고 있다. 그런 터에, 절벽 위에 위태롭게 서 있는 이 소나무들이 얼마나 오래 제 자리를 지킬 수 있을지 알 수 없다. 오송정이 전하는 이야기에서 유추해 보자면, 결국 언젠가 이 나라에 '큰 환란'을 몰고 올 무리들은 우리 인간들임에 틀림없다.

동강에 와서, 자연에 순응하고 자연과 함께 더불어 살아가는 게 진정한 행복이 아닐까하는 생각을 해본다. 자연을 인간이 만들어 놓은 틀 안에 가두려 하는 것, 자연을 한사코 인간이 살아가는 방식에 맞게 조정하고 다스리려고 하는 게 인간에게 결코 좋은 일이 될 수 없다. 자연이 인간이 원하는 대로 움직여 준다고 해서, 완전히 길들여지는 것이 아니라는 거다. 장구한 세월을 두고 보면, 결국 그 모든 게 자연이 정한 이치대로 되돌아가게 되어 있다.

주요 이정표. (왼쪽 상단) 용탄리 용탄대교를 건너서 (오른쪽 상단) 계속 직진하면 (왼쪽 하단) 용탄 삼거리가 나오고 이곳에서 우회전하면 (오른쪽 하단) 동강 광하안내소가 나온다. 이곳에서부터는 계속 강변 도로를 타고 내려간다.
 주요 이정표. (왼쪽 상단) 용탄리 용탄대교를 건너서 (오른쪽 상단) 계속 직진하면 (왼쪽 하단) 용탄 삼거리가 나오고 이곳에서 우회전하면 (오른쪽 하단) 동강 광하안내소가 나온다. 이곳에서부터는 계속 강변 도로를 타고 내려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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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날 동강 자전거여행은 정성군 고성리에서 끝났다. 고성리는 숙박을 정할 곳이 마땅치 않다(굳이 머물러야 한다면 민박을 택할 수 있다). 그래서 영월까지 내쳐 달렸는데, 그 사이 심한 고생을 했다. 고성리에서 영월로 넘어가는 길에 높은 산을 하나 넘어야 한다. 기어 8단짜리 미니벨로로 산을 넘는 건 진짜 고역이다.

그 산을 넘고 나서는 자동차전용도로를 피해 영월까지 가는 도로를 수소문해야 한다. 자동차전용도로를 만날 때마다 드는 아쉬움이 왜 그 길에 들어서기 전에 자동차전용도로를 피할 수 있는 다른 길을 알려주지 않느냐는 거다. 자전거를 교통수단인 '차'로 인식하지 않는 데서 생기는 문제다. 그렇게 해서 그날 밤 해가 떨어져서야 겨우 영월에 도착했다. 그 길을 가는 동안 여러 곳에서 신의 가호가 있었다.

동강길은 그늘이 부족하다. 그리고 그 길에서는 매점을 찾는 일도 쉽지 않다. 필요한 물건은 미리 준비해 가는 것이 좋다.

동강길, 소나무 숲길을 지나가는 도로. 소나무 향이 짙어 산소길이라는 표현이 잘 어울린다.
 동강길, 소나무 숲길을 지나가는 도로. 소나무 향이 짙어 산소길이라는 표현이 잘 어울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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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선군 고성리에서 영월로 넘어가는 산길. 하늘 한쪽에 서서히 노을이 물들고 있다.
 정선군 고성리에서 영월로 넘어가는 산길. 하늘 한쪽에 서서히 노을이 물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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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이는 글 | 6월 24일에 다녀왔습니다.



태그:#동강, #정선, #산소길, #병방치, #자전거여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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