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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여연대가 유엔 안보리에 보낸 천안함 관련 문건을 두고 이적행위라며 보수파들이 발끈하고 있다. 지난 2000년 6·15 공동선언 이후 시나브로 사문화의 길을 걷고 있던 국가보안법이 다시 보수 언론 등을 통해 화려하게 부활할 조짐이다. 지방선거에 참패한 정부와 여당도 정국 반전의 호재로 삼아 연일 이슈화시키는 모양새다.

 

급기야 참여연대를 향해 '도대체 어느 나라 국민이냐'며 적군인지 아군인지 밝히라는 듯한 질타가 민의의 전당, 국회에서 나왔다. 그것도 불과 얼마 전까지 자칭 이 땅의 최고 지성이라는 서울대생을 가르쳤던 교육자 출신 국무총리의 입에서. 그에 의해 남겨진 의혹을 해소하고 진실을 밝혀달라는 요구가 순식간에 매국 행위로 치부돼버렸다.

 

기실 시민단체가 정부의 정책을 비판하고 해외의 NGO와 연대하는 것은 당연한 책무이다. 시민단체를 정부의 휘하 조직쯤으로 여기지 않는 다음에야 이를 두고 매국 운운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정부의 공식 발표 이후 시민단체와 학계에 의해 꾸준히 제기된 남은 의혹들을 해소해달라는 요구는 묵살해놓고 이제와 이적행위라며 날뛰는 정치인들과 일부 언론의 모습은 차라리 안쓰럽다.

 

'참여연대 사건' 보며, '황우석 사태'를 떠올리다

 

정부와 여당의 발끈, 그리고 보수 언론의 기사화가 있은 직후 자칭 '애국' 보수 단체들이 앞 다퉈 길거리로 나섰다. 이러한 일관된 움직임은 예상한 바이니 그닥 놀랍지는 않지만, 어디서 많이 본 듯 낯익게 느껴진다. 몇 해 전 우리 사회를 극단적 갈등의 소용돌이로 내몬 '황우석 사태'를 다시 접하는 듯한 기시감(旣視感)이랄까.

 

그때도 진실을 밝히려는 과학자들을 사이에 두고 '애국'과 '매국' 논쟁이 치열했었다. 황우석을 지지하면 애국이고, 문제 삼으면 매국이라며 전 국민을 상대로 양자택일을 요구하는 분위기였다. 물론, 지금처럼 정치인들과 보수단체가 편승하고, 언론들이 특종 삼아 앞장서며 사회 전체를 혼란의 도가니로 밀어 넣었다. 지금의 상황과 소재만 다를 뿐, 전개 과정은 놀라울 정도로 똑같다.

 

당시 황우석이라는 이름은 이른바 '땡전 뉴스'를 넘어섰다. '과학에는 국경이 없지만, 과학자에게는 조국이 있다'는 명언을 남기는 등 국익과 애국에 대해 명쾌한 정의까지 내려주며 국민 모두를 열광케 했다. 그의 입을 통해 나오는 말 하나하나가 성서의 진리이자 예언처럼 받아들여졌고, 그를 향한 비판은 우리 사회 '금기'의 영역이 됐다.

 

그 와중에도 몇몇 젊은 과학자와 언론인들은 풀리지 않는 의혹에 대해 관심의 끈을 놓지 않았고, 끝내 진실은 밝혀졌다. 경제적 가치가 몇 천 억에 달하고, 노벨상은 떼어 놓은 당상이라며 그를 한껏 불세출의 영웅으로 추켜 세웠지만, 얼마 못 가 희대의 사기꾼이라는 오명을 쓰고 국민들 기억 속에서 시나브로 잊혀졌다.

 

기실 국민들 모두는 황우석의 말이 부디 거짓이 아니기를 간절히 바랐다. 난치병 환자와 가족들이 겪고 있는 끝 모를 고통에 공감했기 때문이다. 그런 까닭에 대다수의 국민들은 안타까운 심정으로 그를 비판하는 사람들을 향해 곱지 않은 시선을 보냈고, 이를 부풀린 정치인과 언론 등을 통해 왜곡되면서 국익을 해치는 매국노로 낙인찍히게 된 것이다.

 

무조건 믿으라는... '불신매국'이란 종교적 광신

 

'황우석 사태'는 우리 사회를 쓰나미처럼 휩쓸어 엄청난 생채기를 남긴 채 지나갔지만, 우리는 그를 통해 아무런 교훈도 얻지 못했다. 각계에서 봇물처럼 터져 나온 반성의 목소리를 통해 맹목적인 국익과 애국 논쟁에 종지부를 찍었다고 여겼고, 우리 사회가 한 단계 성숙하는 계기가 될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러나 그보다 갑절은 더 황당하고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정서가 또 도진 것이다. 참여연대의 견해에 동조하거나 정부의 공식 발표를 의심하면 북한의 입장을 변호하는 것이고, 그것은 곧 이적행위로서 국가보안법에 의해 처벌될 수 있다는, 군더더기 하나 없는 간단명료한 논리가 이곳저곳에서 횡행하고 있다.

 

그땐 광풍이 몰아치는 가운데서도 황우석의 논문에 수많은 과학자들이 비교적 자유롭게 접근할 수 있었지만, 이번엔 원인규명에 참여한 사람들 이름조차 공개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의혹을 제기하는 사람들이 검찰에 고발당하는 지경에까지 이르렀다. 정부 발표가 수도 없이 오락가락하며 의혹을 불러일으키고 불신을 자초했으면서, 이제와선 무조건 믿으라는 거다. 말하자면 '불신매국'이라는 종교적 광신이다.

 

검열단을 파견하게 해달라며 결백을 주장하는 북한은 물론, 적잖은 국민들조차 고개를 갸웃거리는 어설픈 결론을 가지고 자국의 이익에 따라 판단할 게 뻔한 외국 정상들을 설득하려는 것 자체가 우스꽝스러운 일이다. 설령 학교에서 잘못을 인정하지 않거나 깨닫지 못한 아이들에게조차 다짜고짜 매를 들지는 않는다. 아무리 교사가 발뺌이라고 확신한다고 해도 아이에게 항변할 기회는 주어야 하는 법이다. 하물며 국가 간 일임에랴.

 

'나라사랑' 방식, 한 가지만 강요하는 이 정부... 촌스럽다

 

바야흐로 정권이 국가를 참칭하고, 정권에 부화뇌동하는 이들이 애국을 독점하는 시대로 완벽하게 회귀했다. 그깟 정권 교체됐다고 이리 될 줄은 솔직히 꿈에도 몰랐다. 군사정권 때 애용되던 국익과 애국의 논리가 세련된 척하며 우리 사회 곳곳에 암세포처럼 번져가고 있다.

 

참여연대가 천안함 순직 장병과 그 유가족을 두 번 죽이고 있다고 말하지만, 거듭 강조하거니와, 진정 그들을 두 번 죽이는 건 한 점 의혹 없이 진실을 밝히자는 주장이 아니라 북한의 소행으로 두루뭉수리 못 박고 그들과 우리 국민 모두를 향해 전쟁불사 운운하는 정부 여당의 무능이다.

 

사족 하나. 때마침 행정안전부에서 '국민의례 규정'을 만들어 오는 7월 중 시행한다고 밝혔다. 이 규정에는 국기에 대한 맹세는 어떻게 하는지, 애국가는 언제 불러야 하고 순국선열과 호국영령에 대한 묵념은 언제 생략할 수 있는지 등에 대한 구체적인 매뉴얼이 담겨 있다고 한다. 중앙행정기관과 지방자치단체는 이 규정을 준수해야 하고, 민간에서는 자율적으로 시행하면 된다고 한다.

 

조만간 학교에서도 매주 월요일 아침이면 애국조회가 치러지고, 일제와 군사정권의 잔재로 여겨져 오래전에 박물관에 보내진 '국민교육헌장'이 보란 듯 부활할는지도 모르겠다. 나라사랑의 방식을 천편일률적으로 몰아가는 이 정권의 촌스러움이 황당하다 못해 보기조차 딱할 지경이다. 이 글을 쓰고 있는 나 역시 그들처럼 매국노로 손가락질 받게 될까 두렵다.

덧붙이는 글 | 제 블로그(http://blog.naver.com/myhb0211)에도 실었습니다.


태그:#참여연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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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시 미뤄지고 있지만, 여전히 내 꿈은 두 발로 세계일주를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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