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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MBC 드라마 <동이>에서 장희빈 역할을 맡고 있는 탤런트 이소연.
ⓒ MB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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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조의 어머니인 최숙빈(숙빈 최씨, 한효주 분)의 일대기를 다루고 있는 MBC 월화드라마 <동이>가 시청자들을 잠시 헷갈리게 만들었다. 지난 7일 방영된 제23부의 끝부분은 장희빈(장옥정, 이소연 분)이 꿈에도 그리던 중전 자리에 오르는 장면이었다. 그런데 바로 다음날인 8일 방영된 제24부의 첫 부분은, 인현왕후(박하선 분)를 모함했다는 죄목으로 장옥정이 '단 하루 만에' 중전 자리에서 폐위되는 장면이었다.

하지만 이 모든 것은 장옥정의 꿈이었다. 중전 자리에 너무 집착한 나머지, 자신도 인현왕후처럼 '강퇴'되는 꿈을 꾼 것이다. 하얀 잠옷을 입고 벌떡 일어서는 장옥정의 모습을 본 뒤에야 시청자들은 그것이 꿈속 이야기임을 알 수 있었다.

중전이 되었는데도, 드라마 속의 장옥정은 그 사실이 실감나지 않는 모양이다. 그러니 그런 꿈도 꾸었을 것이다.

이 점은 오늘날의 우리도 어느 정도는 마찬가지일 것이다. 사극의 단골 소재인 장옥정에 관한 이야기를 숱하게 접하면서도, 우리의 인식 속에서 그는 여전히 일개 후궁으로 남아 있을 뿐이다. 그가 숙종 16년(1690)에 중전에 올랐다가 숙종 20년(1694)에 빈으로 강등된 사실을 모르는 것은 아니지만, 이따금씩 우리는 '장옥정도 중전이었나?'하는 '참으로 말도 안 되는' 의문을 품곤 한다.

장옥정에 대한 우리의 관념은 광해군에 대한 그것과 일맥상통하는 바가 있다. 우리는 대(對)중국 자주외교(중립외교)를 전개하다가 보수파에 의해 쫓겨나 일개 왕자로 폄하된 광해군이 실은 1608년부터 1623년까지 조선을 통치한 임금이었다는 사실을 모르지 않는다. 그럼에도 우리는 이따금씩 '광해군도 왕이었나?'하는 의문을 가질 때가 있다.

종묘엔 왜 장희빈과 광해군 위패가 없을까

 조선왕실의 사당인 종묘.
ⓒ 김종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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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는 임금이었고 누구는 아니었으며, 누구는 중전이었고 누구는 아니었다'를 판단하는 기준은 비현실적이기 짝이 없다. 조선왕실의 사당인 종묘에 신주(神主, 위패)가 모셔진 남녀만이 임금과 중전으로 인정되고 있고 그런 기준에 따라 광해군과 장옥정 등은 임금이나 중전 대우를 받지 못하고 있다. 하지만 이것은 사실관계와 너무나도 동떨어진 것이다.

서울지하철 종로3가역 인근에 있는 종묘에는 정전(正殿)과 영녕전(永寧殿)이라는 두 건물이 있다. 정전에는 19명의 임금과 30명의 왕후, 영녕전에는 16명의 임금과 18명의 왕후가 모셔져 있다. 그런데 영녕전에는 '마지막 황태자'로서 1970년에 사망한 영친왕(의민황태자) 부부의 위패도 모셔져 있으므로, 조선시대에 이곳에 모셔진 것은 15명의 임금과 17명의 왕후다. 따라서 정전과 영녕전을 합하면, 종묘에는 총 34명의 임금과 47명의 왕후가 모셔져 있는 셈이다.

하지만 종묘에 모셔진 34명의 남자 중에서 실제 임금은 25명에 불과하다. 나머지 9명은 죽은 뒤에 격상된 추존 임금이다. 추존 임금들은 종묘에 모셔져 있다는 이유로 조(祖)나 종(宗)의 타이틀을 갖고 있지만, 그렇다고 그들이 실제로 임금 역할을 했던 것은 아니다. 그리고 실제로 임금 역할을 했던 모든 사람이 이곳에 모셔져 있는 것도 아니다. 연산군·광해군의 신주는 이곳에 존재하지 않는다.

한편, 종묘에 모셔진 47명의 왕후 중에서 생전에 실제로 왕후 역할을 한 사람은 39명이다. 나머지 9명은 생전에는 단 한시도 왕후 역할을 해보지 못했다. 그리고 왕후 역할을 했던 모든 사람이 이곳에 모셔져 있는 것도 아니다. 폐비 윤씨나 장옥정의 신주는 이곳에 존재하지 않는다.

그럼, 종묘 안에서 이처럼 형식과 실제 사이의 괴리가 발생한 이유는 무엇일까? 혹 그것은 왕후·임금의 자격이 없는데도 그 자리에 오른 '이들'과 그런 자격이 있는데도 오르지 못한 '이들'을 각각 제자리에 돌려놓기 위한 것이었을까?

이런 경우에 반드시 언급해야 할 명제가 있다. '역사는 승자의 기록'이라는 것이다. 종묘야말로 역사의 그 같은 측면을 가장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곳이라고 할 수 있다.

왕이 아니었던 이들이 종묘에 모셔진 이유

 종묘 정전의 신위 배치도(봉안도).
ⓒ 김종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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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종묘 영녕전의 신위 배치도.
ⓒ 김종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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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옥정과 광해군 같은 사람들이 종묘에 모셔지지 않은 것은 그들이 자격도 없이 그런 자리에 올랐기 때문이 아니다. 그것은 그들을 죽인 사람들 혹은 몰아낸 사람들의 행위를 정치적으로 정당화하기 위한 것이었다.

예컨대, 광해군을 종묘에 모실 경우에는 그를 몰아내고 왕위에 오른 인조의 정통성을 세울 수 없게 된다. 마찬가지로, 장옥정을 종묘에 모실 경우에는 그를 격하하고 죽여 버린 서인 혹은 노론 세력의 정당성을 세울 수 없게 된다. 그래서 그들은 실제적 사실관계와 관계없이 종묘에 모셔질 수 없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왕후나 임금 역할을 해본 적이 없는 사람들을 종묘에 모신 이유도 동일한 맥락에서 이해되어야 한다. 그것은 결코 그들에 대한 효심이나 존경심의 발로가 아니었다. 이 역시 승자의 역사를 합리화하기 위한 것이다.

예컨대, 선조의 아들이자 인조의 아버지인 정원군(定遠君)이 인조 쿠데타 후에 원종(元宗)으로 추존되고 종묘에 모셔진 것은 그에 대한 인조의 효심 때문도 아니었고 또 그가 왕이 될 재목인데 왕이 되지 못했기 때문도 아니었다. 그것은 선조의 법통이 광해군이 아닌 원종(정원군)을 거쳐 인조에게 계승되었다는 명분을 창출하기 위한 것에 불과했다.

이런 점들을 보면, 종묘에 모셔졌느냐 여부를 기준으로 중전 혹은 임금 여부를 판단한다는 게 얼마나 비현실적인 일인지 쉽게 이해할 수 있다. 또한 우리는 그 속에 당대의 정치적 편파성이 도사리고 있다는 점도 어렵지 않게 파악할 수 있다.

'역사는 승자의 기록'이란 걸 반드시 기억하자

 광해군이 임금으로서 통치한 기간의 역사를 다루고 있는 <광해군일기>. 광해군이 폐위되었기 때문에 ‘실록’ 대신 ‘일기’라는 표현이 사용되었다.
ⓒ 왕실도서관 장서각 디지털 아카이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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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도 조선정부에서 공인(公認)한 사람들만 중전 혹은 임금으로 인정하는 게 객관적이지 않느냐?'고 생각할지 모른다. '그런 공인도 받지 못한 사람들을 중전이나 임금으로 인정하는 게 도리어 주관적이지 않느냐?'라고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우리는 '권력이 공인한 것이면 뭐든지 옳고 그렇지 않은 것은 그르다'는 인식이 숱한 정치적 부조리의 근원 중 하나였음을 직시하지 않으면 안 된다.

집권세력의 공인(公認)일지라도 그것이 특정세력의 정치적 이해관계를 반영한 것 혹은 공동체 전체의 행복과 무관한 것일 수 있다는 건전한 회의(懷疑)정신. 이제껏 인류역사에서 발생한 숱한 저항운동들은 그러한 공인도 일단 의심해보는 건전한 회의정신의 표현이라 할 수 있다.

'공인'이란 것이 반드시 선(善)일 수만은 없다는 점을 생각할 때, 우리는 '장옥정은 중전이 아니었다'라고 결정한 사람들의 공인과 '광해군은 왕이 아니었다'라고 결정한 사람들의 공인에 휩쓸리지 않고 진정한 의미의 객관성에 입각하여 역사를 중립적으로 바라볼 필요가 있다는 인식을 갖지 않을 수 없다.

장옥정 시대나 광해군 시대의 정치적 이해관계와 직접적 관련이 없는 오늘날의 우리들이 '장옥정의 적들'의 관점에서 장옥정을 평가하고 '광해군의 적들'의 관점에서 광해군을 평가할 필요가 있을까. 당대의 승자들의 관점이 일방적으로 반영된 종묘의 신위 배치가 오늘날의 우리에게 과연 무슨 의미가 될 것인가. "역사는 승자의 기록"이라며 역사에 대해 비판적 태도를 표하면서도 혹 우리는 자기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승자의 역사에 동조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물론 그렇다고 하여 '장희빈'이나 '광해군'이라는 명칭 자체를 수정할 필요는 없다. 우리의 인식 속에서나마 '중전 장희빈'과 '임금 광해군'이 존재한다면, 그것은 우리가 역사를 보다 더 올바로 인식하는 데에 훌륭한 밑거름으로 작용하게 될 것이다.

 대빈묘. 경기도 고양시에 소재한 서오릉에 있는 장희빈의 무덤.
ⓒ 김종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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