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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대 쪽에서 바라본 광주. 광주가 조용해 보이는 것은 비단 궂은 날씨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조선대 쪽에서 바라본 광주. 광주가 조용해 보이는 것은 비단 궂은 날씨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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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5월 넷째 주말에 동학同學들과 함께 광주를 찾았다. 학부시절 학술답사차 잠깐 들렀던 것이 마지막 광주행이었으니 6년만의 광주 방문인 셈이다. 하지만 6년 만에 광주를 찾았음에도 불구하고 (같이 간 사람들에겐 좀 미안한 말이지만) 사실 그다지 큰 감흥은 없었다. 이맘때쯤 광주를 찾는다는 것은 돌아볼 코스와 거기서 받을 감상이 비교적 뻔하다는 뜻이기 때문이었다.

구묘역과 기념관을 보고 난 뒤에 마음이 먹먹해지고 눈가가 그렁그렁해지는 것들이야 출발하기 전부터 누구나 예상하는 것들 아닌가. 오히려 나를 내심 놀라게 한 것은 국가로부터 인정받은 민주화운동이 30주년을 맞는 해라고 보기 힘들 정도로 조용한 광주의 모습이었다. 나는 아마도 그것이, 현 정부 들어 노골화된 '광주민주화 운동 무시하기'가 올해도 역시 멈춤없이 계속 되고 있기 때문일 거라 생각했다.

기념식에서 임을 위한 행진곡 대신 방아타령이 흘러나올 뻔한 사건은 이를 가장 상징적으로 드러낸 해프닝이었다. 내가 광주에서 느낀 조용함은 80년 5월에 대한 사람들의 기억에 노골적으로 도전하는 현 정부의 그러한 오만함에 대한 불편한 심경들이 드러났던 것은 아닐까.

서슬 퍼렇던 80년대, 광주에 대한 기억을 둘러싼 싸움은 '망각되지 않기 위한 싸움'이었다. 쿠데타라는 초법적 행위를 통해 권력을 찬탈(이 표현도 아주 적절한 표현은 아니다. 그러면 그 이전에 권력을 가지고 있었던 이들은 권력을 정당하게 획득했었단 말인가!)한 전두환, 노태우에게 오월의 광주는 무조건 숨겨야 하는 출생의 비밀이었다.

반대로 이 땅의 민주주의를 소망했던 많은 사람들에게 오월의 광주는 절대로 잊혀져서는 안 되는 일이었다. '광주를 어떻게 잊혀지지 않게 할 것인가'라는 문제는 80년대 내내 사람들의 중요한 고민 중 하나였다. 80년 5월 30일 서강대생 김의기가 불과 사나흘 전 광주에서 있었던 일을 알리는 유인물을 뿌리며 투신한 이후부터 '오월의 광주'는 말하려는 쪽과 말하지 않으려는 쪽 모두에게 가장 중요한 이름이 되었고, 그 험난한 과정은 여러분도 익히 아는 바와 같다.

작곡가의 친일논란으로부터 여전히 자유롭지 못한 애국가 대신 오월광주를 모티브로 삼은 '임을 위한 행진곡'이 민중의례의 의사곡이라는 점은 민주화운동과 오월광주가 갖는 남다른 연결고리를 잘 말해준다. 사람들로 하여금 미국이 우리의 영원한 혈맹이 아닐 수도 있음을 생각하게 만든 것도 '광주'였고, 혈기 넘치는 젊은이들을 독재의 군화발과 최루탄에 당당히 맞설 수 있게 만든 것도 '광주'였다. 어느 순간부터 '광주'는 단순히 전라남도의 어떤 도시의 이름이 아니라 이 나라 민주주의의 상징을 의미하는 이름으로 변해갔다. 그렇게 15년이 흘렀다.

'망각되지 않기 위한 싸움'은 1995년에 5·18민주화운동에 관한 특별법이 제정되어 '오월 광주'가 국가에 의해 공식적인 민주화 운동으로 인정을 받으면서 새로운 전기를 맞았다. 이제 적어도 '오월의 광주'가 망각될 일은 없어진 셈이었다. 전두환과 노태우(라고 쓰고 '학살자'라고 읽을 것을 권장한다)에 대한 사법적 처벌도 이뤄졌다(물론 마음에 쏙 들지는 않았지만).

그러나 국가에 의한 민주화운동 인정은 오월 광주가 망각되지 않기 위한 최소한의 조건일 뿐 그것이 오월 광주의 의미와 기억에 대한 고민을 종결지은 것은 아니었다. 이제 광주에 대한 고민은 '광주를 어떻게 기억할 것인가'라는 문제로 옮겨갔고 많은 사람들이 각자 저 나름의 이야기들을 (대개 5월에만 집중적으로) 쏟아냈다. 질문은 달라졌지만 오월 광주는 여전히 민주주의와 민주화 운동의 상징이었다. 그렇게 다시 15년이 흘러 2010년 오늘이다.

대통령은 작년에 이어 올해도 5.18 기념식에 불참했고 임을 위한 행진곡 대신 방아타령이 울려퍼지는 촌극이 벌어질 '위기'가 다가오기도 했다. 한반도 대운하니 4대강이니 해서 자신을 지금의 그 자리에 있어주게 한 지난 시대 개발독재의 '못다한 꿈'을 이행하는데 여념이 없는, 그래서 가급적이면 민주화 운동의 전통을 회피하고 싶어하는 이명박 대통령으로서는 아마 당연한 선택일 것이다.

그가 민주주의의 정신에 동의하건 동의하지 않건 이명박 대통령에게도 오월 광주는 곧 민주화 운동과 민주주의의 상징이다. 그래서 이명박 대통령은 올해도 오월 광주를 애써 '쌩까고' 있다. 이명박 대통령에게조차 오월 광주는 민주주의와 민주화 운동의 상징이다.

광주 5.18묘역의 희생자 영령들
 광주 5.18묘역의 희생자 영령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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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기실 따지고 보면 광주에서 죽어간 이들, 그러니까 우리가 지금 '열사'라는 호칭을 붙여 부르는 이들 중 대부분은 결코 투철한 민주주의 투사가 아니었다. 그보다는 그저 이유없이 자신들을 위협하는 경찰들과 "총을 쏴서 사람들을 막 죽"여대는 군인들에 대해 분개했을 뿐이었다.

그들은 굳세고 강인한 의지로 민주주의를 갈구한 민주투사라기보다는 "50원짜리 갈비가 기름덩어리만 나왔다고 투덜대는" 소시민 쪽에 더 가까웠을지도 모른다. 다시 말해 그들이 느낀 분노는 목숨을 건 결의에서 우러나온 것이 아니라 피와 살을 가진 인간이라면 누구나 당연히 느꼈을 것들이었다.

그런 점에서 "왜 광주였는가?"라는 질문은 온당치 못하다. 그 질문에 답하면서 우리는 자연스럽게 광주와 광주시민들만이 가진 어떤 특별한 점에서 민주화운동의 원인을 찾게 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나라 민주화의 진전을 특정한 지역의 덕택으로만 돌리는 것은 곤란하다.

이승만 독재에 공공연하게 항의했던 2.28학생시위는 어디에서 일어났으며 이승만 정권의 부정선거와 독재에 항거한 김주열의 시신이 발견된 곳은 또 어디였던가. 5월의 광주 전에는 강원도 사북이 있었고 다시 그 이전에는 부마항쟁이 있었다. 그 정도는 달랐지만 민주주의를 향한 전진은 광주에서만 이뤄진 것이 아니었다. 민주주의는 남한에 사는 모든 사람들이 공통적으로 열망하던 보편적 희망사항이었다.

시민군의 최후보루였던 舊도청 별관부지에는 현재 아시아문화센터 공사가 한창이었다. 아시아문화센터가 ‘광주’의 의미를 범아시아적으로 확장시킬지, 문화라는 두루뭉실한 이름으로 희석시킬지는 두고 볼 일이다
 시민군의 최후보루였던 舊도청 별관부지에는 현재 아시아문화센터 공사가 한창이었다. 아시아문화센터가 ‘광주’의 의미를 범아시아적으로 확장시킬지, 문화라는 두루뭉실한 이름으로 희석시킬지는 두고 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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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야를 남한 밖으로 돌려보면 '오월'이라는 수식어 역시 광주만의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다. 84년 5월의 필리핀은 마르코스에 맞서는 선거거부운동이 있었고, 90년 5월의 미얀마 랑군 역시 독재에 저항하는 사람들의 목소리가 높았다. 태국인들이 거듭된 군부쿠데타와 독재에 맞서 일어난 것이 1992년 5월이었고, 인도네시아인들이 수하르토를 권좌에서 몰아낸 것도 1998년 5월이었다.

물론 이 말이 광주의 의미를 좀 더 축소시켜도 상관없다는 뜻은 아니다. 그 때 광주시민들이 보여주었던 성숙한 의식들과 광주가 민주주의의 역사에서 갖는 비중은 결코 축소되어서는 안 된다. 하지만 동시에 우리는 '광주'를 사고하는 데 있어서 '광주'라는 틀을 벗어날 필요가 있다. 광주 말고도 대구와 마산과 부산과 사북에서도 우리는 민주주의를 향한 우리의 열망을 드러낼 수 있어야 한다.

남한 말고도 필리핀과 미얀마와 태국과 인도네시아, 더 나아가 독재에 신음한 모든 나라들에서 민주주의를 향한 모든 사람들의 열망을 드러낼 수 있어야 한다. 더 많은 광주와 더 오랜 광주를 찾아내는 것은 5월 18일에 '임을 위한 행진곡'을 거부하는 정도로, 어떻게든 5월 18일 하루만 잘 참아넘기면 민주화 운동의 역사도 대충 넘길 수 있을거라 여기는 저 오만방자한 생각에 도전하는 길이기도 하다.


태그:#5.18, #광주, #광주민주화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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