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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래 기독교는 하나님의 창조 목적을 근간으로 한다. 하나님의 피조물인 인간에게 태어남과 죽음, 그리고 부활과 영생이 있음을 밑바탕으로 한다. 모든 인간과 자연 만물은 신의 질서에 순응하며, 서로서로 화평을 이루길 원한다. 그것이 기독교를 이끌어가는 근간이자 우주적인 종교관으로 자리 잡게 하는 중심축이다.

 

진화론자들에겐 물론 그것이 납득이 되지 않는다. 인간은 자연발생적으로 개체변이를 통해 끊임없이 진화를 거듭해 온 우생학적인 동물의 결정체라는 이유에서다. 더욱이 유전자 조작을 통해 식물은 물론이고 동물과 사람의 인체까지도 마음대로 결정하려는 흐름 속에 있다. 가히 인간이 신의 창조영역에까지 도전장을 내밀고 있는 셈이다.

 

오이겐 드레버만의 <우리 시대의 신앙>(피피엔 펴냄)을 통해 창조론과 진화론이 신경전을 일으키는 이 때, 생명공학과 동물학대가 심각한 요즈음에, 자연환경의 파괴가 극에 달하고 있는 이 시대에 과연 기독교가 필요한 종교인지 묻고 있다. 물론 그가 주장하는 것은 도킨스처럼 하나님과 기독교와 성경의 오류나 해체를 주장한 게 아니다. 무조건적인 신비나 감성적인 신앙인보다 합리적인 것들을 아우를 때에라야 기독교가 건강한 종교로 자리매김할 수 있다는 지적이다.

 

무엇보다도 그는 인간이 자연과 순응해야 할 존재로 파악하고 있다. 그것이 인간이 본래부터 우등한 피조물로 창조된 게 아니라 대륙판 이동과 같은 지질현상에 의해 자연에 순응한 결과로 인간이 우등한 자리에 올라서게 되었다는 것이다. 큰 틀에서 보면 진화론을 수용하는 것 같지만, 어디까지나 그것은 자연과의 조화와 순응을 강조하기 위함임을 알 수 있다.

 

더욱이 구약성경에 요나가 물고기 배속에 있다가 다시 토해내 살아난 사건이라든지, 예수께서 일으킨 오병이어의 기적과 같은 사건들은 단순한 역사 보고서라기보다는 그저 예언자 전설이나 기적설화로 받아 들여야 함을 밝히고 있다. 이를테면 성서라는 것도 하나님의 뜻을 받든 인간의 기록물임을 부인하지 못하기에 얼마든지 신화적인 이미지들을 사용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 책에서 그가 더없이 강조하는 것이 있다. 그것은 곧 생명과 자연에 관한 윤리적 접근이다. 그는 가톨릭에서 임신을 피하기 위해 루프를 사용하는 피임법에 반대하는 것에 대해 다시 반대한다. 한없이 늘어가는 인간 포화로 인해 더 많은 기근에 직면할 수 있다는 까닭에서다. 아울러 줄기세포를 통해 인간의 질병을 치유하는 것은 권장할 사항이지만, 우성의 인간을 만들어 내기 위해 생식세포에 손을 대는 것은 철저히 막아야 됨을 주장한다.

 

"무엇보다도 우리가 절대적으로 해서는 안 될 일은 '우성'의 인간을 만들어 내기 위해 생식세포에 손을 대는 일입니다. 다시 말하지만 이것은 동물과 식물 모두에게 해당됩니다. 윤리는 바로 이것을 막아야 합니다. 이를 위해 생물학적 이성이 필요하겠지요. 자연은 다른 모든 종이 같이 진화하는 주어진 조건 속에서 서로를 조절하지 않고서는 결코 어떤 새로운 것을 내놓지 않습니다. 우리는 짧은 안목으로 자연의 질서를 '개선'하려 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180쪽)  

 

물론 그것은 국영사업으로 통제할 때에만 가능하다고 한다. 일반 기업가들이 사업의 영리와 윤리적인 차원에서 갈등할 수 있다. 그렇지만 기업가의 속성이란 대부분 자본이라는 물신에 지배되어 무차별적인 실험과 개발을 주도해 오지 않았던가. 그렇기에 국가가 그것을 제어하지 못하면 더 많은 경제력을 쥔 사람들이 우성한 인간들을 더 많이 찍어낼 것이다. 그것은 의료사업을 민영화하라며 부채질하는 사람들도 결코 다르지 않는 흐름 속에 있는 것이다.

 

이는 4대강 사업과 같은 자연개발에 대한 부분도 마찬가지다. 보수적인 성향의 기독교인들은 구약성경의 창세기를 들먹이며 땅과 자연을 정복하고 다스릴 것을 주장한다. 인간에게 막대한 이익을 주는 일이라면 무차별적인 개발을 해도 된다는 속성이다. 하지만 개혁적인 성향의 기독교인들은 신약성경의 로마서를 통해 피조물의 탄식하는 소리를 들어야 함을 강조한다.

 

이에 대해 드레버만은 뭐라고 말을 할까. 그는 인간이 처음부터 우등한 존재가 아니기에 언제나 자연과의 순응 속에 살아야 함을 강조할 것이다. 이른바 피조물의 신음과 탄식 소리에 더욱더 민감하게 반응하라는 이야기이다. 왜냐하면 그때에만 홍수나 쓰나미와 같은 자연의 부메랑을 맛보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4대강 사업과 같은 무차별적인 자연개발은 보수와 개혁의 이견을 떠나 기독교의 생명윤리로 철저하게 막아야 할 일이다.

 

이는 광우병도 마찬가지다. 어릴 적 시골에서 자란 나는 한꺼번에 막사에다 가둬 놓고 키운 소보다 들판에서 풀을 뜯어 먹고 자란 소라야 살결도 더 부드럽고 털도 매끈하다는 것을 안다. 고기 맛은 두 말할 것도 없다. 그런데도 동종의 사체(死體)를 가루로 만들어 먹였으니 어찌 인간을 해롭게 하는 광우병으로 되돌아오지 않겠는가. 가히 심은 대로 거두는 것이다.

 

아무쪼록 이 책을 통해, 현대 기독교인들이 제 욕구 충족을 위해 무차별로 자연을 훼손하고 개발하는 일은 금했으면 한다. 고귀한 생명이 자본의 횡포에 속수무책 끌려 다니기보다 기독교의 윤리로 철저하게 막았으면 한다. 아울러 미신적인 독단에 빠진 광신적인 종교집단으로 머물기보다 이성과 감성과 신비를 모두 아우르는 참된 종교로 거듭났으면 한다. 그것은 지극히 개인적인 신앙심을 우주적인 종교로 강제하려기보다 그 순수성을 잃지 않을 때에 확산될 것이다.


우리 시대의 신앙 - 종교 꼭 필요한가

오이겐 드레버만 지음, 김현천 옮김, 피피엔(2010)


태그:#우생한 인간, #기업의 윤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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