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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의 모토는 '모든 시민은 기자다'입니다. 시민 개인의 일상을 소재로 한 '사는 이야기'도 뉴스로 싣고 있습니다. 당신의 살아가는 이야기가 오마이뉴스에 오면 뉴스가 됩니다. 당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여름살이 준비를 다 끝냈다 싶었는데 아니다. 상추, 쑥갓, 아욱 같은 기본적인 것들은 서리가 내리던 시절에 씨앗을 뿌렸다. 그게 벌써 식탁에 오르고 있는 중이다. 참외와 토마토는 모종을 사다가 실내에 며칠간이나 모셔두었던가. 이제 더 이상은 서리가 안 내리겠다, 싶을 즈음 이식을 했는데 그게 벌써 콩알 만한 열매를 맺었다.

 

고추도 마찬가지. 고추는 종류가 많아서 청양고추에 꽈리고추 그리고 일반고추 이렇게 세 종류 모종을 사다가 비닐멀칭까지 해서 심었는데 그새 땅 맛을 알았다고, 시집살이 뭐 별것 아니네 하는 듯이 매일매일 열심히 꽃을 피운다. 호박도 이제 곧 꽃이 필 것 같고, 오이는 아직 어리지만 금방 자랄 것이고, 옥수수는 벌써 이십 센티미터도 넘게 자랐다.

 

이제 다 됐지? 무더운 여름이 온다 해도 겁날 이유 하나도 없지? 하고 느긋하게 아침마다 둘러보는데 뭔가가 이상하다. 뭐지? 뭐가 빠졌지? 며칠이나 그렇게 고개를 갸웃거리다가 드디어 발견했다. 가지다. 가지가 빠졌다. 오 이런, 무더운 여름날에 가지나물이 얼마나 맛나게 혀를 간질이는데 그걸 빼먹다니. 아직 늦지는 않았겠지? 장날에 아줌마들이 아직은 가지 모종을 팔아주겠지?

 

그리하여 장날 가지 모종을 사러 나갔다. 선거철의 시골 장날은 거의 모든 선거 유세 일정이 장터로 잡히는 까닭에 엄청 복잡하고 확성기 소리가 시끌시끌해서 혼이 나가기 십상이었다. 앞에서는 1번이, 뒤에서는 2번이, 오른쪽에서는 3번 왼쪽에서는 4번 그밖에도 여러 후보자와 일행들이 저마다의 주장을 펼치는데 이 소리가 서로 부딪쳐서 무슨 말인지 하나도 알아들을 수 없게 된다. 그야말로 정신 바짝 차리지 않으면 눈 뜨고 코 베이기 십상인 것이다.

 

그런데 이게 뭐냐. "선배님" 하고 낭낭한 목소리가 귓전을 울린다 싶더니 오른쪽 팔에 착 감기는 손이 하나 있다. "올라 오셔서 한 말씀만 해주고 가세요, 네?" 만난 지 열흘도 안 된 후배의 부인이었다. 사실은 후배라 하기에도 좀 껄쩍지근한  데가 있었다. 마당에서 풀을 뽑고 있는데 들어서는 얼굴들이 있었다. 어깨띠를 두른 것으로 미루어 선거운동 중인 사람들이었고, 한눈에 척 가족들이라 여겨졌다. 아들 둘을 데리고 다니며 부부가 선거운동을 하는데, 그런데 넉살이 꽤 좋았다. 이런 족보 저런 족보 들추다 보니 사돈네 팔촌쯤 되었고, 나이는 내가 몇 살 더 많았다.

 

그래도 그렇지. 그 부인이 선배님이라고 환영인사를 하고 나설 줄은 정말이지 꿈에도 몰랐다. 그러나 싫지는 않았다. 나는 아무래도 여자에 약한가보다. 이것도 병이다. 병이지만 어쩔 것인가. 의료보험 적용도 안 되는 병인 것을. 두 손으로 팔을 잡고 인도하는 후배 부인의 손에 나는 마치 연행당하는 용의자처럼 얼떨결에 연단에 올라서고 말았다. 말이 좋아 연단이지 청중은 하나도 없었다. 손에 쥐어주는 마이크를 얼결에 잡았는데 노래방 기분이 들었다. 에라 모르겠다. 얼른 한 곡조 부르고 달아나자. 이렇게 해서 졸지에 초청연사가 되었다.

 

"여러분, 고양이는 생선을 보면 먹어야 합니다. 그것이 고양이의 직업이기 때문입니다. 생선을 보고도 먹지 않는 고양이가 있다면 그것은 이미 고양이가 아니거나 자신의 의무에 아주 태만한 못된 고양이일 것입니다. 그런 고양이에게 생선을 맡겨놓고 나중에 생선을 먹어 버렸다는 둥 푸념을 해서야 쓰겠습니까."

 

정확한 기억은 아니지만 대충 그런 말을 했던 것 같다. 반응은 뜨거웠다. 두 부부에 아들 그리고 어깨띠를 두른 선거운동원 대여섯 명이 일제히 환호성을 올리며 박수를 쳐주었다. 내 생애 기록해 둘 만한 출세의 날이었다. 도망치듯 연단을 내려와서 이렇게 저렇게 어렵게 길을 뚫고 장으로 들어가는데 어디서 꽥꽥 소리가 들린다.

 

이게 뭐냐. 오리 소리 아니냐. 어매, 정말로 오리네. 오리 새끼를 팔고 있네. 아고 이뻐라. 저 납작한 주둥이 좀 봐. 어쩌고 그렇게 중얼거리며 오리 구경을 하고 있는데 머릿속에 갑자기 전등불이 켜진다. 아 이것이다. 오리, 오리야, 오리. 내가 왜 여태 그 생각을 못했지. 오리가 연못에서 헤엄을 치고, 마당에서 꽥꽥 소리를 내며 돌아다니는, 그런 그림을 내가 왜 여태 그려보지 못했지?

 

그나저나 얘들은 뭐라고 불러야 하나. 그냥 오리새끼라 하기는 뭔가 좀 무례인 것 같고, 어린 닭을 병아리라 하듯이 어린 오리는 그러면 오아리? 아 이건 좀 이상하다. 옹알이도 아니고 오아리가 뭐냐. 이상하다. 왜 어린 오리의 애칭은 없을까. 어쨌든 오리를 길러보자는 내 마음은 확고하게 굳혀졌다.

 

"아줌마, 나 얘들 데려가서 마당의 방죽에 풀어놓고 싶은데."

"아 그러셔요. 공짜로는 못 드려요."

"누가 공짜로 달랬나. 나도 공짜는 싫어요. 이담에 내가 혹시 출세라도 했을 때 공짜 좋아하던 사람이라고 소문나면 곤란하니까."

"코미디언 나가도 되겄소 야? 그나저나 몇 마리 드릴까?"

"너무 많으면 내가 복잡해지니까 일부이처로다가 세 마리만 줍쇼."

 

한 마리에 3500원이라고 했다. 오리가 마당에서 돌아다니는 그림을 머릿속에 그리고 있었던 나는 그 간단한 가격조차도 계산이 잘 안 되었다. 한 마리에 3500원이면 곱하기 3이라, 그러면 1만1500원인가, 이렇게 생각하고 만원짜리 한 장에 천원짜리 두 장을 내밀었는데 아주머니가 고개를 갸웃거린다.

 

이게 뭐지? 계산이 어떻게 되는 거야? 꼭 그런 표정으로 몇 번이나 고개를 갸웃거리는 아주머니를 보면서 나는 돈이 모자란가? 더 드려야 하는가? 그런 생각을 하며 주머니를 뒤지는데 아주머니 왈 "아따 거 사람 좀 헷갈리게 하지 마시오 잉?" 하면서 천원짜리 두 장을 도로 내준다.

 

"아 생각 좀 하고 사시오. 한 마리에 3500원이면 세 마리에 얼마요. 1만500원이제. 그러면 아저씨는 나한테 500원은 뺍시다, 함시롱 만원짜리 한 장만 주셔야지. 그게 시장에서의 예의지, 안 그렇소?"

"와아, 진짜 이상한 아줌마네 거, 아 모른 척하고 그냥 돈주머니에 넣어두면 되지 뭘 그렇게 사람 무안을 주고 그래요, 거."

"하이고, 이까짓 몇푼 꼬불쳤다가 나중에 출세하게 되면 오늘 생각함서 후회할 텐디, 뭐 얻어먹을 것 있다고 그런 짓을 한다요. 하여튼 정신 좀 차리고 사시오 잉?"

 

순식간에 내가 그만 학생이 되고 말았다. 아주머니로부터 시장 예의에 대해 강의를 듣다 보니 머릿속에 또 하나의 혼란이 생겼던가 어쨌던가, 오리를 데리고 집으로 와서야 정작 사고자 했던 가지 모종은 못 사고 그냥 왔다는 것을 알았다. 이런, 이런, 다시 나가야겠네. 다시 장으로 가기 전에 일단 시집온 오리부터 물에 풀어야겠기에 풀었더니 그때부터 완전히 난리가 나고 말았다.

 

어린 오리들이 아마 이동하는 동안 겁에 질렸던 모양이었다. 오는 동안에는 아무 소리도 없이 잠잠하던 녀석들이 상자를 개봉하는 순간 꽤액, 꽤액 하고 마치 멱따기 직전의 돼지처럼 엄청나게 큰 소리를 질러대며 뛰쳐나오더니 쏜살같이 달려서 꽃밭으로 수풀 속으로 들어가 버리는 거였다. 소리에 놀라고 그 전광석화 같은 움직임에 놀란 나는 어이가 없어서 뭘 어떻게 해야 하는지 완전히 판단정지 상태에 빠지고 말았다.

 

한참을 멍하니 서 있다가 좌우를 둘러보니 꽃밭으로 혹은 수풀 속으로 들어간 오리 세 마리가 저마다 다른 곳에서 꽥, 꽥 소리를 내며 헤매고 있었다. 풀이거나 꽃이거나 오리의 키를 훌쩍 넘는 까닭에 앞을 볼 수가 없게 된 오리들이 그야말로 우왕좌왕 정신없이 헤매고 있는 거였다.

 

이 녀석을 잡을까 저 녀석을 잡을까, 생각할 틈도 없이 덮어놓고 달려가서 한 녀석을 잡아다가 상자에 넣고 다른 녀석을 잡으려고 쫓아가는데 상자에 넣어둔 녀석이 도로 뛰쳐나와서 아까보다 훨씬 더 큰 소리를 질러대며 마당을 주정뱅이처럼 뒤뚱뒤뚱 달려서 또 어디론가 달아나고 있었다.

 

"이런, 이런 빌어도 못 먹을." 어쩌고 그렇게 나도 모르게 소리를 질러대며 달아나는 녀석을 쫓아가는데 이때부터 개들이 난리를 피우기 시작했다. 옆집 그리고 앞집의 개가 짖어대며 몰려오는가 싶더니 우리집 개들 역시 앞발을 높이 쳐들고 뭐라고 소리를 질러대며 혀를 날름거리는데 그 모양이 꼭 뱀 같기도 하고 하여튼 뭔가가 예사롭지 않다는 느낌인 거였다.

 

남의 집 개는 그렇다고 칠 수 있었다. 그런데 내 집 개가 어린 오리를 보고 침을 질질 흘려대며 혀를 날름거리는 데는 뭐라고나 할까, 가슴에 주먹 만한 돌이라도 박힌 듯한 슬픔이 일시에 소나기처럼 쏟아지는 거였다. 식당에서 가끔 뼈다귀도 얻어다 바쳤건만 이럴 수가 있단 말인가. 실망에 배신감에 절망까지 확 몰려오면서 "저것들을 그냥 확" 소리가 입에서 절로 나온다. "이눔 시키, 이 오리가 네 밥이냐, 밥으로 보여?"

 

주먹을 크게 쥐고 금방이라도 쥐어박을 듯이 달려들었더니 깨갱 소리를 내며 뒤로 물러서기는 하는데 물러서면서도 시선은 여전히 오리에 꽂혀 있다. 그리고 혀는 또 왜 그리도 날름거리며 입맛을 쩍쩍 다셔대는지, 소설 속의 악마 아니 식인종 같은 것이 절로 생각난다.

 

"어이구 참 내 기도 안 막혀서, 뭐냐, 뭐야 너희들 응? 내가 너희를 그렇게 키웠단 말이냐. 돌겠네."

 

사실로 그 순간은 돌아버릴 것 같았다. 침을 어찌나 질질 흘려대며 날뛰는지 아차 잘못하면 내 손목이라도 물어뜯을 것 같았다. 그런데 이건 또 뭐냐, 뒷집 교회의 고양이들이 내려와서 야옹 야옹 소리를 내며 울타리를 뚫고 있다. 잡으라는 쥐는 안 잡고 뭐냐 또 너희들은. 짐짓 소리를 질러보기는 하지만, 그런 한갓진 소리나 질러대고 있을 일이 아닌 것 같았다.

 

오리들은 아직도 수풀 속에서 혹은 꽃밭에서 헤매고 있는 중이었다. 개는 어떻게 해볼 수 있겠지만 고양이는 아니었다. 그 날렵한 몸이 한 번 훌쩍 뛰었다 하면 어린 오리 한 마리의 생명은 이미 끝난 것이다. 그렇다고 고양이를 탓할 것인가. 고양이는 초식동물이 아니라 잡식 중에서도 거의 육식동물이고, 그러니 오리 같은 동물을 발견하면 공격해야만 한다. 어쨌든 대나무 장대 긴 것을 손에 들고 휘휘 휘둘러서 일단 고양이를 쫓아버린 다음 오리를 찾아 나섰는데 이게 또 쉽지가 않다.

 

딴에는 '잡동사니 농법'이라 해서 5백여 평에 이르는 마당에 이것저것 그야말로 온갖 잡것들을 심어놓은 까닭에 나 자신도 어디에서 무슨 싹이 새로 나오고 있는지 알 수가 없을 지경이었다. 지금 피어 있는 꽃이 지면 즉시 다른 품종이 자라날 수 있도록 딴에는 머리를 쓴다고 해서 만든 복잡한 구성의 마당이 이제는 내 발목을 잡고 있는 형국이었다. 그러다 보니 숨어 있는 어린 오리 세 마리를 잡아들이는 데 무려 세 시간이 넘게 걸렸다.

 

땀까지 삐질삐질 흘려가며 숨어 있는 오리를 찾아내서 가두고 나니 어느새 해가 지고 있었다. 장은 이제 파했을 것이다. 가지 모종이고 뭐고 다음 장날로 미루는 수밖에 없었다. 그나저나 큰일이다. 목이 마르면 방죽에서 물을 마시고, 평소에는 마당에서 뒤뚱거리며 꽥, 꽥 소리를 내며 걸어 다니는, 말하자면 '오리가 있는 마당풍경'을 꿈꿨던 나로서는 낭패도 이런 낭패가 없었다.

 

일이란 역시 이런저런 모든 가능변수를 생각하고 난 다음에 시작해야 하는가보다. 시장에서 오리 소리를 듣고 즉흥적으로 오리가 있는 풍경 어쩌고 꿈을 꿨으니 이 꿈이 뭐냐. 개꿈일 수밖에.

 

그러나, 그렇다 해도 마당에 오리가 있는 것만은 사실이다. 비록 가둬두기는 했지만 말이다. 아니 이것은 굳이 부정적으로 그렇게 가둬뒀다기보다는 보호하고 있다고 하는 것이 옳은지도 모르겠다. 그러고 보면 보호와 감금의 차이는, 오묘하다. 이제부터 이 문제 공부를 좀 해야 할 것 같다. 

 

 


태그:#선거운동, #장날, #오리, #고양이의 직업, #잡동사니 농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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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는 것이 일이고 공부인, 공부가 일이고 사는 것이 되는,이 황홀한 경지는 누가 내게 선물하는 정원이 아니라 내 스스로 만들어나가는 우주의 일부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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