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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진순 주해, 백범일지
▲ <처절하게 독서하기> 백범일지 도진순 주해, 백범일지
ⓒ 김동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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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구 선생은 기억과 찬양으로서만 존재해야 할 것인가."

# 2009년 11월 21일 짖굿은 날씨였지만 300여명이 모였다. 모두는 감동과 환희에 젖어있었고 웃음꽃이 활짝 피고 있었다. 축복스런 날이었다. 친일이 애국으로 변신하기엔 너무나 금방이었고, 항일투사는 다시 비적때로 몰려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져버린 통탄할 우리네 역사가 오늘로 하여금 무언가 새로운 전환점이 될 것 같았다. 그곳은 백범 김구 선생 묘소 앞이었다.

#백범 김구 선생의 묘소 앞에는 3질의 책이 놓여있었다. '친일인명사전', 평생을 조국의 독립에 헌신하다 안두희의 총탄에 스러진 백범 앞에, 아니 수없이 많은 항일투사의 영전에 놓인 그 책은 지나간 왜곡의 역사를 이제나마 바로 잡기 위한 18년간의 피나는 눈물의 결실이었다.

<백범일지>는 그런 김구 선생이 남긴 가치가 남다른 책이다. 독립운동가들을 다룬 많은 책들이 있지만 <백범일지>가 고전의 반열에 오른 것은 일지 자체가 지닌 역사성도 역사성이지만 진심을 담아 호소하는 독립운동가의 영혼, 또한 엘리트적 사고방식을 뛰어넘어 대중들에게도 쉽게 다가갈 수 있는 정서적 친화력을 잔뜩 내뿜고 있기 때문이다.

여러 출판사에서 나온 <백범일지>가 있지만 가장 입체적인 것은 역시 도진순 교수(창원대)의 <백범일지>다. 고전에 주석을 달아 해석하는 것은 자칫 원전을 오독할 수 있기도 하지만 전문가가 아니라도 이해할 수 있도록 역사적 배경을 설명하기 때문이다.

김구 선생은 어떠한 인물인가. 명성황후 시해와 관계가 있다고 하여 일본인 쓰치다를 죽여 당당한 기상을 보였던 김구 선생의 삶은 그러나 평생에 걸쳐 시련의 연속이었다. 물론 독립운동가로서 늘 도덕적 정당성과 위상을 지닌 분이지만 범인의 눈으로 바라보는 김구 선생의 삶을 어떻게 편하다고 평가할 수 있겠는가.

동학농민혁명에 가담하여 반외세와 반봉건을 외친 것은 그의 삶의 여정이 기본적으로는 가난한 서민의 삶이자 세상을 근본적으로 바꾸고자 하는 혁명적인 삶이었기 때문이리라. 그는 국내의 독립운동이 원활하지 않게 되자 임시정부의 문지기가 되어서라도 독립운동을 하겠다는 의지로 중국 망명을 해서 조직을 일으켰다. 특히나 백범이 구체적으로 지시하여 일본군 대장 시라카와에게 폭탄을 던진 윤봉길을 비롯한 의사들의 열거는 한국을 떠나 중국을 전율케 하는 사건이었다.

김구 선생의 기본적인 독립운동의 노선은 민족적 독립운동이다. 그래서일까, 사회주의 사조를 받은 젊은 세대 운동가들에게 선생은 늘 완고한 보수로서 자리 잡게 되고 해방 이후 이러한 정치적 악연은 늘 커다란 위상만큼이나 커다란 위협으로 간주되고 있었다. 이러한 경향은 모스크바 3상 회의의 결정에 대해 찬탁-반탁으로 국내의 여론이 갈라지면서 더욱 극심해졌다.

또한 김구 선생이 길고 긴 독립운동을 마치고 국내에 돌아오자 그를 위협 세력으로 간주한 것은 비단 사회주의 그룹 뿐만이 아니었다. 어쩌면 더욱 커다란 요소로서의 미군정이 버티고 있었다. 국내 입국을 개인자격으로 못 박은 것은, 김구의 민족적 주체 의식이 미군정으로서는 환영하기 어려운 것이기 때문일 터. 독립운동세력이 새로운 국가를 건설해야 한다는 역사적 당위성이 국제 정세의 현실론 앞에 힘을 잃은 것이 순탄치 않은 역사의 첫 단추 였음은 단정세력이 등장한 것으로서 현실화되었다.

백범 김구 선생이 연석회의 참석에 앞서 분단선에서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 38선을 넘어 백범 김구 선생이 연석회의 참석에 앞서 분단선에서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 김동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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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은 그대로 김구 선생만의 비극이 아니라 이 땅 전체의 문제로 환원될 성질의 중차대한 문제였다. 언제나 독립운동가의 선배로서 이승만을 배려했던 김구 선생은 좁아지는 정치적 공간 속에서, 분단될 조국의 운명 앞에서 절망하였다. 수많은 지지자들의 반대와 반대세력들의 공세 속에서 그래도 기대를 갖고, 현실적으로 북측을 공고히 장악한 김일성과의 만남을 통해 하나 된 조국을 만들고자 노력한 노(老) 독립운동가는 결국 남과 북 오갈 데 없는 정객으로서 생을 마감하였다. 그리고 그것이 상징하는 것은 당당한 하나의 조국으로서 나라를 건설해야 한다는 독립운동가들의 패배였다.

<백범일지>를 읽으며 독립운동가들의 삶의 궤적을 그려본다. 누구는 독립운동의 분열상에 초점을 맞추고, 누구는 운동을 통한 독립 가능성에 회의를 품지만 독립운동가들은 그 미약한 현실 가능성을 목숨을 걸고 극대화시키려한 사람들이다. 추대해야 마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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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북연석회의 : 남한만의 단독정부 수립을 반대하는 남북의 정당·사회단체 대표들이 5·10 단독선거를 저지하고 통일민주국가 수립을 위해 대책을 논의한 회담을 말한다. 1948년 4월 19일부터 시작된 이 회의는, 김구, 김규식 및 김일성, 김두봉과 같은 남북의 명망가들이 다수 참석하여 그 소기의 목적을 이루고자 하였으나 구체적인 성과는 나타나지 않았다. 이를 두고 북한 정권의 수립에 이용만 되었다는 평가와 비록 실패로 끝나기는 하였으나, 통일운동의 한 지침을 제공했으며 통일의지를 발산시킨 것으로 이해하는 견해가 있다.

윤봉길 의거 : 일제강점기의 독립운동가. 1932년 4월 29일 일왕의 생일날, 행사장에 폭탄을 던져 일본 상하이파견군 대장 등을 즉사시키는 거사를 치르고 현장에서 체포되어 처형되었다. 일제의 막강한 침략에 정국이 얼어붙었을 때, 윤봉길의 거사는 한반도의 항일 역량을 대내외에 알리는 결과를 가져왔다.


태그:#백범일지, #연석회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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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유가 생기면 항상 펜을 잡는 자유기고가. 시민단체 흥사단에서 이사로 활동했으며, 최근까지 국회 정무위원장 비서관으로 일했습니다. '근거있는' 소통의 공간을 열기 위해 글을 쓰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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