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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곽이 우람하다. 누각은 고풍스럽다. 초가집은 정겹다. 그 사이를 가로지르는 골목길이 구불구불하다. 돌을 쌓아 올린 담장엔 햇살이 가득하다. 다사롭다. 돌담을 타고 오른 넝쿨은 초록빛을 잔뜩 머금었다. 발길이 오래 머문다.

 

그 길을 따라 천천히 걷는다. 돌담 너머로 덩굴장미가 고개를 내밀고 있다. 켜켜이 쌓인 초가지붕에선 마른 짚 냄새가 묻어난다. 까치발을 하고 초가집 안을 훔쳐본다. 세월의 더께가 내려앉은 집 안마당은 한가롭기만 하다.

 

고즈넉함은 물레방아 도는 풍경에서도 느껴진다. 선조들의 그윽한 숨결이 배어있는 것 같다. 내 마음도 덩달아 넉넉해진다. 쉼 없이 도는 물레방아를 한참 바라본다. 햇살에 비친 물방울이 눈부시다. 돗자리 펴고 낮잠이라도 한숨 자고 싶다.

 

하늘이 파랗다. 보기 드물게 맑은 하늘이다. 구름도 쉬어 가는지 머물러있다. 저만치 보이는 산도 짙푸르다. 얼굴에 와 닿는 바람의 감촉도 달콤하다. 낙안읍성 민속마을이다. 우리 민초들이 살아왔던 옛 모습 그대로의 이 마을은 사적 제302호로 지정돼 있다. 전라남도 순천시 낙안면에 있다.

 

'삼베 짜는 집'이 보인다. 햇살은 이 집 마당도 고슬고슬하게 만들어 놓았다. 조심스레 발길을 넣어본다. 행여 하는 마음으로 슬그머니 방안을 엿본다. 할머니 한 분이 길쌈을 하고 있다. 이게 무슨 횡재인가 싶다. 전혀 기대하지 않았던 일이다.

 

인사를 건네고 마루에 걸터앉는다. 잠깐 사이 할머니(이옥례·75)께서 "들어와서 보라" 하신다. 냉큼 신발을 벗고 방안으로 몸을 옮겨 앉힌다. 방안이 비좁다. 네댓 평 정도 돼 보인다. 그 공간에 살림도구가 널브러져 있다. 텔레비전도 있다.

 

방의 절반 가까이를 베틀이 차지하고 있다. 묻는 말에 대꾸를 해주면서도 삼베를 짜는 할머니의 손발은 쉬지 않고 움직인다. 날줄에 씨줄을 넣어 조이고, 또 씨줄을 넣어 조이고를 반복한다. 지난한 일은 아니다. 그렇다고 쉬운 일만도 아닌 것 같다.

 

"힘드시겠어요? 벌이는 좀 되세요?"

"벌이는 무슨…. 안 팔려. 옛날에는 쪼깨(조금)라도 팔렸는디, 지금은 안 팔려. 하나도…."

 

"이렇게 베를 짜서 얼마씩에 파는데요?"

"한 마루에 예전엔 30만원도 허고, 25만원도 했는디, 지금은 20만원 해."

 

할머니가 얘기하는 '한 마루'는 20자를 일컬었다. 손때 잔뜩 묻은 자의 크기는 대략 60여㎝ 정도 됐다. 모든 일이 다 그렇지만 다른 사람이 알아주고 인정해 줄 때 재미도 있는 법. 이게 인지상정이다. 할머니는 알아주지도 않고, 팔리지도 않아서 일이 힘들다고 했다.

 

"팔려야 하고 잡제, 안 팔린 게 재미도 없어. 벌이가 안 된께 젊은 사람덜도 배울라고 안 허고…."

 

하지만 할머니는 "어쩔 수 없다"고 했다. "배운 게 이거(길쌈)"라고 했다. 10살 넘어서부터 베를 짜기 시작해서 지금까지 베를 짜며 농사를 지으며 살고 있다고 했다. 팔리지는 않지만 놀고만 있을 수 없어서 날마다 베를 짜고 있다는 게 할머니의 얘기였다.

 

"어쩨, 배운 것이 이것 뿐인디. 할 수 있는 디까지는 해야제. 낼이라도 아프면 못헌께 할 수 있을 때 해야제."

 

삼베 작업은 온통 수작업으로 이뤄진다. 파종에서 삼베 길쌈까지의 과정이 대략 20∼30단계는 된다. 씨앗으로 뿌려진 삼은 2m도 넘게 자란다. 이 삼을 수확하는 것도 사람이다. 수확은 낫이나 예초기를 이용해서 한다. 대개 수확은 6월 중순에서 7월 초순 사이에 이뤄진다.

 

지난한 수작업은 수확 이후부터 시작된다. 삼이 옷감의 재료로 변신하기까지의 과정은 멀고도 험하다. 베어낸 삼의 이파리를 제거한 다음 삼대를 가마에 넣고 수증기로 쪄내야 한다. 쪄낸 삼대는 껍질을 따로 벗겨내 말린다. 이것을 또 물에 적시고, 찢고 해야 한다. 그 다음엔 손톱을 이용해 일정한 크기로 쪼갠다.

 

삼에서 뽑아낸 실과 실 끝이 끊어지지 않게 이어주는 것도 보통 일이 아니다. 이를 위해선 물에 적셔 허벅지에 대고 손으로 꼼꼼하게 비벼줘야 한다. 베 메기, 꾸리 감기, 베 짜기 등 이후 과정도 까다롭다.

 

보통의 사람들이 상상하기 힘들 정도로 손이 많이 간다. 전통삼베 제조기법 그대로 원단을 만들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모든 과정을 손으로 직접 해야 한다. 이렇게 까다로운 과정을 거쳐서 만들어진 삼베이기에 질긴 것이다.

 

삼베가 부드러운 것도 주름 골 깊은 할머니들의 정성이 깃들어 있어서다. 삼베에는 그 올곧은 마음이 그대로 담겨 있다. 그래서 늘 뽀송뽀송하다. 우리 몸에도 좋다.

 

이 삼베 길쌈은 1970년대 초반까지만 해도 '돈'이 됐다. 주문이 밀려들었기 때문이다. 밤샘작업도 예사였다. 하지만 지금은 사정이 전혀 다르다. 값싼 중국산이 밀려들면서다. 어려운 게 아니라 고사위기에 처했다.

 

기상전망에 따르면 올 더위가 예년보다 일찍 시작될 것이라고 한다. 이제 선풍기도 꺼내놓고 에어컨 청소도 하면서 서서히 무더위에 대비해야 할 성 싶다. 지난 여름 오지게 썼던 삼베이불도 꺼내 햇볕에 말려야겠다.

 

여름을 나기에 삼베만한 것이 없다. 삼베이불 하나 깔고 부채 하나 손에 쥐면 무더위 걱정은 끝이다. 삼베는 습기를 잘 빨아들인다. 바람도 잘 통한다. 땀을 많이 흘려도 구김이 가지 않는다. 그래서 더 시원하다. 건강에도 좋다.

 

언뜻 투박하고 꺼칠할 것 같지만 매끄러운 것도 삼베의 매력이다. 감촉도 그만큼 좋다. 몸도 마음도 늘 뽀송뽀송하게 유지해준다. 투박한 듯 하면서도 단아한 게 삼베다.

 

올 여름엔 삼베로 시원한 여름을 나는 사람들이 많아졌으면 좋겠다. 삼베 주문도 밀려들어와 이옥례 할머니의 손놀림에 신명이 붙었으면 좋겠다. 할머니의 주름 골도 조금은 펴졌으면 좋겠다.

 


태그:#삼베짜기, #베틀, #이옥례, #낙안읍성민속마을, #순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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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찰이 일상이고, 일상이 해찰인 삶을 살고 있습니다. 전남도청에서 홍보 업무를 맡고 있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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