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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시스 잠 시집을 가지고 다닙니다. 잠은 제가 좋아하는 프랑스 시인입니다. 책의 왼쪽 면엔 번역문이 오른쪽 면엔 원문이 실려 있는, 어느 출판사의 시리즈 중 하나입니다. 왼쪽의 번역문을 예전에 읽었는데, 요즘엔 오른쪽의 원문을 번역문과 비교하며 데면데면 읽으려 지니고 다닙니다. 시집이니 작고 얇아서 들고 다니기도 편하지만, 불어와 친근해지려는 시도이기에 마음의 부담도 없습니다. 그 시집을 후배들과의 약속장소에서도 폼 나게 기다리며 읽었습니다.

작가의 서울과 나의 서울이 만나다

존 앳킨슨 그림쇼의 '와피데일'(1872년 작)을 표지화로 삼았다.
 존 앳킨슨 그림쇼의 '와피데일'(1872년 작)을 표지화로 삼았다.
ⓒ 문학동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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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배가 마련해준 제 생일파티 때 신경숙의 신간 장편소설 <어디선가 나를 찾는 전화벨이 울리고>(문학동네 펴냄)를 선물 받았습니다. 감격스럽게도 같은 자리에서 다른 두 사람에게 똑같이 이 책을 받았습니다. 한 권은 제 의사를 물은 선배가, 한 권은 자신의 의사대로 준비한 후배가 주었습니다. 19세기 영국 화가 앳킨슨의 그림을 담은 황토색 외장 표지 커버가 더할 나위 없이 적요하고 차분합니다. 그런데 이 소설에 19세기와 20세기 시인인 프랑시스 잠이 언급됩니다. 뒤에서 말씀드리지요.

신경숙의 책을 한 권씩 사서 읽었던 적이 한참 전이었습니다. 그 작가 책을 읽으며, 작가가 쉬는 부분엔 저도 쉬고 말줄임표를 나열하면 저도 말줄임표가 되곤 했더랬습니다. 책을 읽다가 내려놓곤 하게 만드는 느림 있는 문체가 좋았습니다. 작가의 신문 인터뷰 글을 봐도 작가에 대한 느낌은 비슷합니다. 한 번도 만나본 적이 없는 작가이지만, 저의 많은 시간을 앗아가 준 고마운 작가입니다.

아껴 읽으려다 선물 받은 다음 날부터 읽기로 했습니다. 같은 두 권 중 속지에 손글씨 메모가 있는 책을 잡았습니다. 나머지 한 권도 책상 위에 두었다가, 자기 갈 길을 찾게 할 생각입니다. 이 글에서 청춘소설인 이 소설의 스토리는 말하지 않겠습니다.

저는 지나가기만 해 본 작가의 모교가 또 한 번 소설 배경으로 나옵니다. 예술대학답게 왁자지껄한 분위기로 들썩거립니다. 그렇지만 그 들썩거림은 공부를 하지 못하게 만드는, 교정 바깥의 시대상 때문인 경우가 더 많습니다.

소설에는 또한 서울에서 태어나 이제껏 살고 있는 저에겐 아주 익숙한 서울 중심가 지리가 자주 묘사됩니다. 광화문, 동숭동, 안국동 등등. 저도 좋아했을 당시 서울이 지녔던 분위기 묘사이기도 합니다.

예전 소설 <바이올렛>의 주요 무대는 세종문화회관 옆 골목의 어느 꽃집이었습니다. 재개발 한참 전 '봄', '여름', '가을', '겨울' 카페 등이 듬성듬성 떨어져 1년 내내 그 상호명으로 죽치고 있던 시절입니다. 지금 이 카페들이 아직 살아있는지는 모르겠습니다. 오래 전, 저에겐 서울에서 광화문이 제일 사랑스러운 곳이었습니다. 대형서점이 있고, 대로가 넓어 뻥 뚫린 시야가 있고, 성공회 성당과 정동 길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어디로 걸어가든 호젓한 느낌과 여유를 누릴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지금은, 아닙니다.

교보문고 광화문 글판. 2003년의 모습.
▲ 광화문 글판 교보문고 광화문 글판. 2003년의 모습.
ⓒ 박태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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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타운, 감시 받는 광장 없어 걷기 좋았던 그 옛날 서울 거리

그냥 묘사만 하는 것이 아니라 호젓할 때의 서울 거리를 걷는 내용이 <어디선가……> 소설에 많이 나옵니다. 곧잘 관공서의 사업 일환으로 '걷기 좋은 거리'를 조성하곤 하지만, 정말 걷기 좋았던 시절은 소설 속에서 어림짐작으로 알 수 있는 80년대였습니다. 저에겐 90년대가 그랬고요.

빽빽한 아파트 숲, 금 그어진 뉴타운, 감시 받는 광장 등이 덜 하거나 없었을 때의 서울에는 이 소설에서처럼 걸어서 가볼 곳이 많았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개인적으로 기회만 되면 아주 떠나고 싶은 곳이 된 게 바로 서울입니다.
인공이 난무해 싫어진 서울을, 저도 좋아했던 시절이 있었음을 이 소설이 깨닫게 해주었습니다.

낙산공원 올라가는 길에 있는, 공공미술 프로젝트 '낙산 프로젝트'의 한 벽화. 2007년 모습.
▲ 입방체 벽화 낙산공원 올라가는 길에 있는, 공공미술 프로젝트 '낙산 프로젝트'의 한 벽화. 2007년 모습.
ⓒ 박태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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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인공 정윤의 거처인 옥탑방이 있는 동숭동 골목과 낙산 산책로는 지금도 산보하기 참 좋은 곳입니다. 개인적으로 이곳에서 제일 마음에 들어 하는 것은 낙산 언덕길에서 내려다보이는 도심의 풍광도 아니고, 잘 꾸며진 낙산 공원도 아닙니다. 허름한 벽에 그려진 벽화들입니다. 공공미술 프로젝트의 일환으로 그려진 벽화를 잘 소화해낸 소박한 집들입니다.

또 다른 곳, 정윤이 등굣길에 발견한 '터널' 윗동네 주변도 저 역시 좋아하는 곳입니다. 소설에는 지명이 나오지 않지만 사직터널 위 사직동을 말합니다. 개인적으로는 이곳을 포함해 인왕산 아래의 소박한 한옥이 많은 서촌을 무척 좋아했습니다. 정윤은 골목에서만 볼 수 있는 풍경들을 묘사합니다.

"거기 사람들은 터널 아래 사람들과는 상관없이 느리게 살았다."

사실 이 곳은 작가 신경숙의 오랜 벗 조은 시인의 거처가 있는 곳이기도 합니다. 그곳 14평 한옥에서 둘은 자주 오붓한 시간을 가졌습니다. 조은 시인의 <벼랑에서 살다>를 읽고 제가 반한 집이자 동네입니다. <김서령의 가>라는 책에서도 우연히 발견해 또 한 번 반했습니다. 어떤 집인지 궁금하신 분은 신경숙이 <벼랑에서 살다>에 넣은 발문만이라도 읽어보십시오.

신경숙 책 속에서 만나는 프랑시스 잠

그런데 그 소설 중간에 프랑시스 잠 시집이 뜬금없이 등장합니다. 시집 서두의 글귀를 언급하면서요. "나는 지금 장난꾸러기들의 조롱을 받으며 고개를 숙이는, 무거운 짐을 진 당나귀처럼 길을 가고 있습니다." 심지어 발행연도와 가격까지 나옵니다. '1975년 8월 20일 초판, 값 350원'. 저의 잠 시집의 판권을 뒤져보았습니다. 예전 시리즈 형태를 그대로 살려놓으려 그랬는지 판권 페이지가 뒤에 있습니다. '1판 1쇄 펴냄 1975년 8월 20일……개정판 2쇄 펴냄 2005년 4월 1일'. 이 시집이 무려 35년 전 처음 찍혔고 지금도 살아있는 책이네요. 시집 이름은 초판 때에는 어땠는지 모르지만 지금은 <새벽의 삼종에서 저녁의 삼종까지>입니다.

작가가 왜 하필 이 시집을 소설에 넣었을까 궁금해집니다. 이 책은 주인공의 친구 명서의 일기에서 언급됩니다. 이 시집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을 수 있겠지만, 시위를 하고 난 후 일기에 이 시집의 구입 대목 다음에 이런 생각을 적습니다. 불의에 대한 저항은 이 소설에서 명서의 주요 정체성 중에 하나입니다.

"내가 지금 무엇을 할 수 있는지 생각해본다. 할 수 있는 일보다 할 수 없는 일들만 떠오른다. 진실과 선함의 기준은 무엇인가. 올바름과 정의는 어디에 숨어 있는가. 폭력적이거나 부패한 사회는 상호간의 소통을 막는다. 소통을 두려워하는 사회는 그 어떤 문제를 해결할 수 없게 된다. 나중엔 책임을 전가할 대상을 찾아 더 폭력적으로 된다.

나부터 독립적이고 당당하길 바란다. 숨김이 없고 비밀이 없으며 비난하지 않는 인간관계를 원한다."

새벽의 삼종은 '시작'이고 저녁의 삼종은 '쉼'입니다. 프랑시스 잠은 19세기 중반 프랑스 남부 피레네 산맥 근처에서 태어나 평생 그곳에 살다 간 '시골뜨기' 시인입니다. 그는 농가에서의 일상을, 가톨릭 신자로서의 기도를 시로 표현했습니다. 어떤 기도를 드렸는지 아십니까? '당나귀와 함께 천국에 가기 위한 기도', '아기가 죽지 않게 하기 위한 기도'를 드렸습니다. 게다가 '윤이 날 듯 말 듯한 장롱'에, '배 냄새 나는 오래된 찬장'에 영혼이 있다고 믿는 사람이었습니다. "위대한 것은 인간의 일이니/나무병에/우유를 담는 일……빵을 만들고/포도주를 만드는 일"이라고 고백한 사람이었습니다. "삶은 장려하고, 정답고, 엄숙했다", "나는 괴로워하고 사랑하나이다"라며 삶을 사랑하고 충실히 살아간 사람이었습니다.

혹시 시대는 괴롭고, 가해와 자학의 유혹은 크지만 프랑시스 잠처럼 자신의 소박한 믿음을 유지하며 사랑하며 살아가기를 소망하기 위해 이 시인을 언급한 것은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이 시집 안에 시만큼 아름다운 번역자의 해설을 다시 읽고 한 대 얻어맞았습니다.

그러니까 번역자는 삶은 고통스러운 것이지만, 예를 들어 어린애는 그런 고통에 대해 "억울하고 슬프다기보다는 의아로워할 것"이라 말합니다. 격렬하게 인간의 고통에 대해 통찰하는 여느 작가와 달리 프랑시스 잠의 시 속 어린애는 단지 이상스러워할 뿐, 그 덕에 "원망이라든가 마음의 쓰라림은 남지 않는 법이다. 어린이란 슬픔도 단순히 받아들이고 거기에 안주하는 법이다"라고 말합니다. 그렇게 되면 "불의와 고통은 이제 배리(背理)가 아니라……자연스런 삶의 흐름을 이루는 것의 하나가 된다"고 말합니다. 어린아이같이 되기란 그렇게 힘든 일인가 봅니다.

그러지 못해 <어디선가……> 소설 속 여러 인물들이 죽음을 선택합니다. 고통과 죽음의 묘사 부분이 그로테스크합니다. 그래서 더더욱 프랑시스 잠과 같은 '천진스러움'이 필요한 것인지 모르겠습니다. 소설가도 '작가의 말'에서 "이 소설에서 어쩌든 슬픔을 딛고 사랑 가까이 가보려고 하는 사람의 마음이 읽히기를, 비관보다는 낙관 쪽에 한쪽 손가락이 닿게 되기를, 그리하여 이 소설에 자주 등장하는 '언젠가'라는 말에 실려 있는 아직 다가오지 않은 미래의 꿈이 읽는 당신의 마음속에 새벽빛으로 번지기를"이라고 고백하는지 모릅니다. 21세기에도 19세기의 지혜가 필요합니다.  

사랑하는 이들의 외침일지 모르는 '어디선가 나를 찾는 전화벨'

제가 서울을 다시 사랑하게 될지는 두고 봐야 하겠습니다. 80년대보다 더 몹쓸 상황이 돼버린 지금의 시대를 어떻게 견뎌야 할지 고민하지 않을 수 없겠습니다. 그렇지만 시인과 소설가가 차분한 시선으로 건네준 말을 들었으니 맹목의 눈꺼풀은 조금 벗겨진 셈입니다.

'어디선가 나를 찾는 전화벨'은 나를 만나고 싶어하고 도움을 요청하는, 나를 사랑하는 이들의 외침일지도 모릅니다. 그러니 가능하면 받을 일이지요. 가끔은 도심의 소음 때문에 정신 나가 있을 때 시 속에서처럼 종소리도 들을 일이지요. 하나 귀띔해 드립니다. 소설의 주요 무대인 동숭동 근처의 혜화동 성당에서는 새벽 6시, 낮 12시, 저녁 6시에 삼종을 울립니다. 녹음 소리가 아닌 진짜 종을 쳐서 내는 삼종 소리입니다. 특히 저녁 삼종은 만종입니다. 밀레의 '만종'의 그 만종입니다. 그 '만종'을 자동차 소음을 헤치고 들어볼 일이지요. 

마지막으로 소란스런 '서울살이'를 위 두 작가와 더불어, 역시 소란스런 도심의 아파트에 살았던 한 철학자의 글로서 마저 위안 삼고자 합니다.

"자동차들의 굴러가는 소리가 한결 더 고통스러워지면, 나는 그것을 천둥소리, 내게 말을 하는, 나를 꾸짖는 천둥소리로 그리도록 애쓰는 것이다. 그리하여 나 자신을 동정하는 것이다. 이 가여운 철학자, 넌 또다시 폭풍우 속에 있는 거야, 삶의 폭풍우 속에 말야!……보라구, 네 쪽배는 여전히 단단하단 말야, 네 배는 돌로 된 배니까 넌 안전하다구. 폭풍우 속이지만 자라구. 폭풍우 속에서 자는 거라구. 용기가 있으니까, 파도의 공격을 받는 걸 오히려 행복스레 생각하고 자는 거야."
- 가스통 바슐라르의 <공간의 시학> 중에서


어디선가 나를 찾는 전화벨이 울리고

신경숙 지음, 문학동네(2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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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그:#신경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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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어 번역가이자, 산문 쓰기를 즐기는 자칭 낭만주의자입니다. ‘오마이뉴스’에 여행, 책 소개, 전시 평 등의 글을 썼습니다. 『보따니스트』 등 다섯 권의 번역서가 있고, 다음 ‘브런치’ 작가로도 활동하고 있습니다(https://brunch.co.kr/@brunoclou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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