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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년 봄, 때에 맞지 않는 매서운 추위로 차마 피지 못하는 꽃봉오리가 웅크리고 있던 그런 때, '30년 전 광주'라는 커다란 꽃을 가슴에 품은 김용만 선생님을 만났다. 30년 전 민주주의를 열망하던 한 고등학생은 지금은 마흔 일곱이 되어 있었다.

그러나 그 고등학생이 피어냈던 '가치를 창조하는 삶'은 지금까지 계속되고 있다. 자신이 추구하는 삶을 끊임없이 실현해 나가고자 하는 오늘날의 그는, 참혹한 폭력 속에서도 자아를 포기하지 않았던 그의 십대 시절 모습 그대로인 듯 했다.

그래서인지 세 시간 남짓한 대화 동안에, 내 마음 또한 다부진 감정들을 생생하게 품어내고 있었다. 슬며시 배어나는 전라도 사투리의 음성과 30년 전의 과거를 또렷이 되짚는 시간을 초월한 눈빛은 '광주 해방구', 인간다운 삶을 향한 한 인간의 사랑을 머금고 있었다.

1980년 5월 18일... 30년 전 그 날

그는 아직 아무것도 보지 못했다. 오직 수군거리는 소문만 들렸다고 했다. 그런데 다음날 19일 학교에 가니, 학생들끼리 주변에서 어떤 일들이 벌어졌는지에 대한 이야기들이 오가더란다. 학교에서는 수업 없이 집으로 돌아가라는 말 뿐이었다고 했다.

"그 당시 제가 살던 집이 전남대 정문에서 굉장히 가까웠어요. 8번 버스를 타고 시내에서 갈아타고 집으로 들어가야 하는데 시내에서 어떤 상황이 벌어지고 있는지 확인하고 싶잖아요. 그래서 지금은 광주은행 본점이 들어서 있는 광주시외터미널에서 내렸어요. 아주 짧은 사이에, 버스에서 내려가지고 시내 상황 좀 보자라고 하는 20분도 채 안 되는 사이에. 거기서 실체와 만나게 된 거죠."

어려서부터 책을 손에서 놓지 않았던 소년 김용만. 중학교 3학년 때에는 CIA 청와대 도청 파문 보도를 보면서 옆 고등학교 3학년 교실에 무작정 들어가 데모하러 가자고 외쳤던 '황당한 놈'이었다고 했다.

고등학교 시절 그는 '특이한 놈, 다른 세계에 사는 놈, 그런데 옳은 소리하는 놈'이었다. 지나친 체벌을 행하는 선생님에게 "교육적인 의미에서 때리시는 겁니까. 감정으로 때리시는 겁니까"라고 외쳤고, 국어 선생에게는 1937년 중일전쟁 시기에 '술 익는 마을'을 노래한 박목월의 시가 비민족적이 아니냐고 쏘아대었다. 

5.18민중항쟁 제30주년기념 서울행사에서 현장연출음악감독을 맡은 김용만
 5.18민중항쟁 제30주년기념 서울행사에서 현장연출음악감독을 맡은 김용만
ⓒ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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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등학교 때부터 시작한 사회과학 공부는 그에게 인생의 의문을 심어주었다고 했다. "내가 무엇을 하더라도 그걸 왜 하느냐, 무엇을 위해서 하느냐에 대한 물음들을 가지고 살자" 그런 열일곱 그에게 닥친 5월이었다. 

"군인이 군복입고, 철모에, 대검 꽂고. 그리고 또 다른 사람들은 몽둥이 들고. 저쪽에서부터 비명소리와 함께 달려오는 수많은 사람들과 그 뒤를 쫓는 군인들. 처음에는 호기심에 구경하려고 했다가 도망 안 가면 너도 잡혀가거나 죽는다고 해서 저도 그냥 뛰다가 넘어졌죠.

넘어진 제 등 뒤로 군화발이 떨어졌고. 그 다음에 몽둥이로 깠고. 기절했고…. 한참 뒤에 깨어나서 집으로 돌아갔어요. 제가 지식으로 알고 있었고 나름대로 권력이 바뀌어야 한다는 의지는 있었는데 현실과는 맞닥뜨려 보진 않았거든요. 근데 바로 그날 비로소 머릿속으로만 알던 게 현실로 다가온 거예요.

"잡히면 죽겠구나. 일단 뛰고 보자. 그러니까 그 무지막지한 폭력의 실체와 접하는 순간 남는 건 생존본능이라고나 할까. 그런 상태였죠. 그때 대학생이었던 형이 한동안 집에 안 들어 와서 어머니가 이삼일 정도를 울면서 거리로 아들 찾으러 나갔던 기억이 나요.

그러면서 어머니가 상무관에 진열된 시신들을 보았던 이야기를 다 해주었죠. 텔레비전을 틀면 계속 우리가 돌 던지는 그림만 나오고. 하여튼 혼란에 빠졌죠. 위험하니까 밖으로 나가지 말라고 하고, 나도 피해당하고 나니 무슨 일 당할 줄 아니까 못 나가고 집에 있으면서 텔레비전과 라디오 뉴스를 틀어보고 했지만 내가 알고 있는 사실하고 완전히 다른 이야기가 나오니까. 이런 게 권력이구나. 분노는 끓어오르는데 두려움이 있으니까…."

"물고문에 통닭구이...저항 의지 없어지자 강제로 지장 찍어"

더 이상 두려워하지 않고 실체와 싸워야 한다는 살아있는 이유를 찾게 된 걸까. 그의 싸움은 그 이후 시작됐다. 의지와 열정이라는 말을 얻은 그의 마차가 달리기 시작했다.

"항쟁이 끝나고 나서 흥사단 아카데미 광주 고등학교 연합회장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1980년 8월 31일 밤, 제가 다니던 인성 고등학교 화장실에 낙서인가 벽보인가가 붙은 사건이 벌어진 거예요. 범인을 잡아내기 위해서 정보과 형사들이 매일 수업 시작부터 끝나는 시간까지 계속 선생들과 학생을 심문했어요. 도대체 어떤 놈이 했을까. 선생들 생각했을 때에는 저예요. 저놈이 분명히 했을 거다.

9월 17일 광주 서부서 유치장으로 넘어갔고 거기서 한 달 있다가 들르는 곳이 보안사예요. 쌍촌동에 505보안대라고 불렀는데, 경찰서에서 당한 건 정말 아무것도 아니더만요. 유치장에서 만난 대학생 선배 하나가 이거 알려줬어요. 가게 되면 거길(보안대) 거칠 텐데 거긴 정말 죽는다. 그러니 가기 전에 '아닙니다, 모릅니다'를 만 번 외우고 가라.

보안대로 이송되기 직전에 아버님이 오셔가지고 창살 사이로 이렇게 손가락을 겹치고 계시는데 그때는 왜 이렇게 눈물이 왈칵 나오는지. 아버지도 울고 나도 울고. 그러면서도 염려 말라고 나는 잘 버티는 놈이니까. 그런데 505보안대 가니까 다시 바닥에 수갑이 채워진 채 내동댕이쳐지자마자 이 보안대 군인이 그냥 지근지근 밟더라고요.

'이 빨갱이 놈의 새끼들. 김대중이 시켰고 간첩이 시켜서 했지 않냐' 이거죠. 가자마자 기절할 만큼 맞았으니까, 폭력에 대한 공포가 이만큼 올라와 있는 상태잖아요. 당연히 아니라했지, 모른다했죠. 그랬더니 '민족의 새로운 영도자 전두환 대통령을 모독하는 짓은 빨갱이 것들이 하는 짓이다. 누가 시켰어. 이깟 고등학생이 뭘 아냐. 시킨 놈이 있으니까 했지' 하는 거예요.

사실도 아니고. 그때까지만 해도 의식이 살아있으니까. '아니다!' 그러고 나니까 그 당시 통닭구이라고 수갑 채우고 줄 묶은 다음에 대걸레 자루에 끼어서… 허어. 힘들죠. 물고문도 당하고. 그리고 나서 거의 저항 의지가 없는 상태에서 '그냥 찍어' 하더라구요."

온몸으로 강제로 지장 찍히는 시늉을 하는 그의 몸짓은 분노에 차 있었다.

"할 수 없었죠. 뭘 어떡해."

그 해 말 그는 석방되었다. 81년 5월 14일 무죄 판결을 받고 난 이후, 그는 그렇게 생각했다. '81년 5월 18일은 고등학생이다.' 

"제가 그 당시 17개 고등학교를 모아서 민족고등학생 연합회를 만들었어요. 작년에는 대학생이었는데 이번에는 우리다. 5월 17일부터 연쇄시위다. 오늘은 이 학교 내일은 저 학교. 그래서 시작을 했는데 광주 대동고등학교가 1번, 2번이 전남고등학교였는데 거기서 그만 제 존재가 드러나서 5월 22일인가 제가 두 번째 잡혀갔어요.

광주교도소로 넘어가지요. 처음에 가니까 독방에 집어넣더라고. 그런데 이 독방 말이예요. 첫날 저녁에 들어가서 신체검사하고 똥구멍 까뒤집고 그런 것 하고 죄수복 입고 들어갔는데, 다음날 보니까 요만한 창 바깥으로 보이는 하늘이 왜 그렇게 푸른지. 왜 김지하 시인이 시퍼런 민주주의라고 했는지 알겠다. 그리고 내가 언제 저 창살 틈으로 보이는 네 조각난 요만한 하늘이 아니라 저 푸른 하늘을 볼 수 있을까.

근데 말이죠. 그런 생각을 하고 나서 한두 시간도 채 지나지 않아서 '정말 아무도 없구나' 이 버려진 자의 느낌. 화장실 문을 딱 닫고 나면 천장에 10와트짜리 백열전등 하나. '정말 나 혼자 밖에 없구나' 그런데 그런 혼자라는 자각, 깨달음이란 나 스스로를 위해서 지금까지 가졌던 건 다 던져버리고 내가 여기 실존하는 것에서부터 다시 쌓아나가자라는 생각이었어요.

독방에서 나간 뒤로는 정치범들끼리 두 번 단식을 했어요. 책, 편지, 식사 문제 때문에. 한번은 빨리 끝났는데 한번은 길게 가다가 끌려가서 강제 급식을 당했어요. 묶어놓고 시커먼 고무호스 넣고 강제로 죽을 처 박는, 비인간적인 짓이죠. 인간적인 이유로 먹기를 거부하는데. 인간적인 대우를 해달라고 가장 기본적인 욕망을, 밥을 안 먹고 싸우자는건데 가장 비인간적인 방법으로 그냥 밀어 넣는 거죠."

강제급식과 순화 교육은 인간이기를 선택했던 의지를 짓밟으려는 행위였다. 그러나 그는 그것을 알고 있었다.

"1심 재판을 받게 되는데 최후 진술할 때 '우리가 무슨 짓을 했길래 우리에게 이런 짓을 했냐. 판검사들 니네들이 더 잘 아니까 나는 무죄다'라고 들이받았습니다. 당연히 실형 받았죠. 실형 선고되는 순간 뒤에서 어머니가 기절하시더라고요.

그러다 이런 생각이 들었어요. 이렇게 죽으나 금식 기도 하다가 죽으나 똑같구나. 그리고 목숨을 건 금식기도에 들어갔어요. 사흘째 되던 날 밤에 기도하고 비몽사몽간에, 너를 살리겠다는 하느님 음성이 들려왔고 바로 이틀 뒤에 병사로 옮겨졌어요."

"우리를 인간답지 않게 하려는 것으로부터 저항해야"

혹독한 시절, 그의 자아를 지켜주었던 것은 그의 의지였다. 석방 이후 대학교에 다니던 한 동안, 그는 의식을 잃고 쓰러지는 원인 모를 증상을 앓았다. 잔학에 맞서기 위해 인간이 지닌 의식의 온 힘을 끌어내야 했었기 때문일 테다. 버려진 듯 했던 독방 속에서도 실존의 고독을 느끼고, 살아있음을 느끼고자 자위를 하며, 조종당하지 않는 적극적인 생을 살고자 했고, 안 먹고 죽을지언정 인간으로 살아남기 위해서 삶과 죽음조차 자율적으로 선택하려 했던 의지를 지켜내고자.

석방되고 대학교에 들어간 이후, 그는 학생 운동을 하지 않았다고 했다. 그에게 80년대 학생운동은 또 다른 문화 독재였기 때문에. 그는 자신이 삶의 주인이기를 선택했고, 다수라는 것의 압력에 거부하고자 했다. 그러나 또한 다수는 그를 변절자라고 부르기도 했다. 기독교 신자인 그는 종교의 가르침을 선택했고 '몇 차례 죽을 뻔 한 뒤 찾아온 덤이고 보너스 같은 이 삶' 속에서 이제 종교적인 나눔을 실천하면서 살고 있다.

"분명한 것 한 가지는 저는 나름 지식이라도 있었고, 제 자아에 대한 자각을 했고 가치 지향적 삶에 대한 의지가 있었는데, 전혀 그런 것 없이 5·18의 거대한 파도에 휩쓸려서 묻혀버린 사람이 훨씬 많아요. 역사의 거대한 사건 속에 매몰되어 버리고 완전히 희생당한 사람들에 대해서는 지금보다는 좀 더 뭔가가 필요해요. 그래서 단지 피해의 억울함만 주장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뛰어넘어 우리를 인간답지 않게 하려는 어떠한 기도로부터도 저항하고 인간의 가치를 승화시키는 광주 정신을 나눠야 할 것입니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희망세상> 5월호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태그:#5.18, #김용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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