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광주 시민들에게 1980년 5월 21일은 아주 각별한 날이다. '부처님 오신 날'이었던 그날 계엄군의 집단발포로 심각한 유혈사태가 벌어졌기 때문이다. 아직도 광주에서는 이날을 '초파일의 유혈극'으로 부른다.  

 

하지만 '집단발포'를 명령한 주체는 아직도 명확하게 밝혀지지 않았다. 다만 '보안사령관(전두환)-육군참모차장(황영시)-특전사령관(정호용)-공수부대'로 이어지는 지휘계통에 의해 '광주의 비극'이 만들어졌다고 보는 것이 5·18의 주류적 해석이다. 특히 당시 전두환 보안사령관, 노태우 수경사령관, 정호용 특전사령관, 박준병 20사단장, 이희성 계엄사령관(육군참모총장)은 '광주학살 5적'으로 불리기도 했다.  

 

김충립 전 특전사 보안반장(당시 보안사 소령)은 전두환· 허화평·허삼수 등 신군부의 핵심 실세들이 5·18 강경진압을 주도했음을 인정하면서 특히 베일에 가려진 '장세동 역할론'에 주목했다. 하지만 '특전사령관 발포 책임론'에는 비판적인 의견을 내놓았다(자세한 내용은 인터뷰 전문 참조).

 

12·12의 주역인 장세동이 특전사 작전참모로 온 이유

 

김충립 전 보안반장(당시 소령)은 1980년 당시 '독특한 위치'에 있었다. 보안사 소속으로 특전사령관의 동향을 관찰해 보고하는 '보안반장'과 함께 정호용 신임 특전사령관을 보좌하는 '정보보좌관'의 역할을 동시에 맡고 있었던 것. 그런 점에서 그는 누구보다 특전사령관의 동향을 잘 파악할 수 있었다.

 

김 전 반장은 지난 10일과 11일 두 차례에 걸친 인터뷰에서 "12·12 직후 정호용 50사단장이 특전사령관으로 온 것보다 12·12의 주역 중 한 명인 장세동 수경사 30경비단장이 특전사 작전참모로 왔다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말했다.

 

"특전사의 핵심 인물은 장세동이 된다는 얘기다. 누구든 장세동의 눈치를 봐야 하는 상황이 돼 버렸다. (주류의) 외부에서 데려온 사령관도 마찬가지였다. 특전사가 12·12의 핵심 인물에 의해 장악된 것이다."

 

특히 김 전 반장은 장세동 작전참모가 1980년 5월 17일 계엄이 전국으로 확대되기 수일 전에 광주에 내려갔다는 사실에 주목했다. 그는 "1주일 전인가 10일 전인가 장세동이 작전과장 등 5명을 데리고 광주로 출동했다"며 "그런데 장세동이 광주에서 어떤 역할을 했는지는 드러나지 않고 있다"고 말했다.

 

전두환 보안사령관의 핵심 측근이었던 장세동 당시 특전사 작전참모가 계엄 확대 수일 전에 광주에 내려갔다는 것은 5·18 진압이 '보안사 라인'에 의해 계획되고 실행되었을 가능성에 힘을 실어준다.   

 

"1980년 5월 17일 전국으로 계엄을 확대하는 조치가 있었다. 그것에 의해 병력 투입 조치를 해야 하는데 그 이전에 이미 장세동이 광주에 내려갔다. 장세동이 내려갈 때부터 병력 출동, 부대 배치, 작전계획 등이 다 수립돼 있었다고 생각한다. 계획이 한두 달 전에 세워지고, 연습까지 마쳐야 하는 게 작전이다. 군에서는 5월 17일 부대 이동을 지시했다고 하는데 그것은 사실이 아니다. 그 이전에 이루어졌다."

 

김 전 반장은 "(형식적으로 보면) 계엄 확대는 계엄사에서 나오지만 계엄 확대에 대비하는 것은 (신군부의) 핵심 인물들이 했다"며 "계엄사가 5월 17일 병력 투입을 할 수 있는 법적인 권한을 가지고 있지만 그 이전에 이미 광주 '소요'에 대비하기 위한 병력 배치가 보안사에 의해 이루어졌다"고 주장했다.

 

특히 '보안사 라인'이 5월 27일로 예정돼 있던 '도청탈환작전'을 5월 25일로 앞당기려 했다는 증언도 나왔다.

 

김 전 반장은 "5월 23일엔가 보안사로부터 '도청탈환작전을 27일에서 25일로 앞당기면 어떠냐'고 문의하는 전화가 걸려왔다"며 "이날 전화를 건 사람은 두 허씨 중 한 명"이라고 주장했다.

 

정호용 사령관과 전두환의 핵심 참모 '허씨들'의 '갈등'

 

여전히 논란이 되고 있는 문제 중 하나는 5·18과 관련해 정호용 특전사령관이 한 '역할'이다. 광주 시위 '진압'에는 특전사 예하부대인 3·7·11 공수여단과 20사단이 투입됐다. 이러한 병력 투입이 보안사의 작품이라는 것은 대체로 '사실'로 인정되고 있다. 하지만 김 전 반장은 "정호용 특전사령관은 '광주 진압 작전'에서 지휘권을 행사하지 못했다"고 주장했다. 

 

김 전 반장은 "특전사 작전참모(장세동)가 광주에 가고 부대가 이동하는데도 사령관이 이에 관여하지 못했다"며 "(정호용은 권력 주류로부터 소외된) 아웃사이더였던 셈"이라고 말했다.

 

"정호용은 5월 17일부터 19일까지 서울(사령부)에 있었다. 그래서 작전지휘권을 행사할 수도 없었다. 정호용이 현지에서 지휘했다는 주장은 사실이 아니다. 12·12그룹은 처음부터 정호용을 안 보냈다. 그것은 12·12그룹이 그를 '안티(세력)'로 보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런 상황의 뒤에는 정호용 특전사령관과 전두환 보안사령관의 핵심 참모들이었던 '허씨들'(허화평·허삼수)의 '갈등관계'가 작동하고 있었다. 정호용 특전사령관이 ▲ 12·12사태 때 쿠데타군에 맞서 싸우다 숨진 김오랑 특전사령관 비서실장의 장례를 보안사의 방침인 가족장이 아닌 부대장으로 치르고 국립묘지에 안장시킨 점 ▲ 12·12사태와 관련해 "부대 안에서 이루어진 총격전은 잘못된 것"이라고 발언한 점 ▲ 허문도 중정부장 비서실장이 주도한 언론통폐합에 반대한 점 등이 '허씨들'의 심기를 아주 불편하게 했다는 것.

 

또한 김 전 반장에 따르면, 정호용 특전사령관이 처음으로 광주에 내려간 날은 5월 20일이었다고 한다. 5월 17일부터 19일까지 광주에서 일어난 상황이 북한에 의해 감청당하자 '무전보고를 중지하고 현장을 직접 둘러보는 게 좋겠다'는 김 전 반장의 건의를 수용한 조치였다. 

 

김 전 반장은 이후 정호용 사령관은 21일에 내려가 22일에 올라왔고, 도청 '탈환' 작전이 이루어지기 직전인 26일 밤에 한 차례 더 현지를 시찰했다고 증언했다. '5월 17일부터 정호용 사령관이 광주에 내려가서 지휘했다'는 일각의 주장과 전혀 다른 증언인 셈이다. 

 

"예하부대가 작전을 하고 있으니까 관찰하기 위해 간 것이지 작전을 지휘하러 간 것은 아니다. 5월 17일부터 19일까지 나와 함께 사령부에 있었다. 광주청문회 때 나는 미국에 있었는데 그런 내용이 담긴 증명을 정호용에게 보냈다. '증인으로 나가겠다'고도 했지만, 정호용은 청문회에서 '진실'을 말하지 않았다. 그는 나에게 '내가 모든 것을 다 이야기하면 나는 누명을 벗을 수 있지만 다른 사람이 죽는다, 딴 사람을 죽이는 것보다 다 같이 벌을 나누어 받는 것이 더 낫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정호용 특전사령관이 5·18 진압에 직접적인 책임이 없다는 김 전 반장의 증언은 서영훈 전 대한적십자사 총재를 거쳐 김대중 전 대통령에게도 전해졌다고 한다.

 

정호용 특전사령관도 지난 1988년 한 언론과 한 인터뷰에서 "도청 앞 집단발포 당시 나는 서울에 있었고, 광주 상황이 악화하자 발포 여부를 묻는 급전이 날아와 나는 지휘계통에 있지 않았지만 절대 발포 불가 명령을 내렸다"고 말한 바 있다. 

 

김충립 전 반장, <신동아>에 '하나회의 파워게임' 기고하기도

 

하지만 김 전 반장의 증언대로 정호용 특전사령관이 광주 '진압' 작전에서 지휘권을 행사하지 않았다고 하더라도 책임이 아주 없어지는 것은 아니다. 그가 5·18 이후 육군참모차장·총장을 거쳐 내무장관과 국방장관, 13·14대 의원을 지내는 등 '출세가도'를 달린 것은 '광주 진압 묵인'의 대가였기 때문이다. 

 

결국 정호용 특전사령관은 전두환·노태우 등과 함께 기소돼 징역 7년형을 선고받았고, 재판 이후에는 훈장·연금까지 박탈당했다. 그의 행보를 두고 일각에서는 "의리를 지키려고 진실을 은폐했다"는 지적이 나오기도 했다. 

 

끝으로 김 전 반장은 진보·보수진영에서 각각 제기되었던 '미국 개입설'과 '북한 개입설'을 모두 일축했다. 그는 "무장공비가 투입됐다는 것도 아군 쪽에서 흘린 것 같다"며 "전시작전은 미국의 승인을 받아야 하지만 시위진압을 위한 부대이동은 보고만 하면 된다"고 말했다.

 

김 전 반장은 경북대 사회학과를 졸업한 뒤 1968년 육군 소위(ROTC 6기)로 임관해 보안사에서 오랫동안 근무했다. 하지만 특전사 보안반장을 끝으로 '노태우-허씨들'과 갈등을 빚어 육군 소령으로 강제 예편당했다.

 

김 전 반장은 1982년 미국으로 건너갔다가 1987년 귀국한 뒤 민주당 경북 봉화·영양 지구당위원장을 지냈고, 1992년 총선 당시 무소속 후보로 출마했다. 이후 미국으로 다시 건너가 미주한인장로회 신학대학원과 Azusa Pacific University에서 석·박사학위(교육학·종교학·목회학)를 받았다. 1997년 목사 안수를 받은 뒤 2007년까지 미주한인장로회 신학대학 교수로 활동했다. 

 

김 전 반장은 1988년 국회 문공위의 언론통폐합 청문회 증인으로 출석해 "언론통폐합은 처음부터 잘못된 법이었고 중정 비서실장인 허문도씨가 주도했다"고 증언했다. 특히 1991년 9월부터 월간 <신동아>에 '하나회의 파워게임'을 연재해 '하나회의 실체'를 드러냈다. 전두환 전 대통령이 당시 보안사령관을 통해 '<신동아> 기고 중단'을 그에게 요청하기도 했다.

 

김 전 반장은 지난 2월 친동생인 김충환 한나라당 의원의 서울시장 후보 경선을 돕기 위해 귀국했다가 지난 11일 다시 미국으로 출국했다.     


태그:#김충립, #5?18, #장세동, #정호용, #전두환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1970년 전남 강진 출생. 조대부고-고려대 국문과. 월간 <사회평론 길>과 <말>거쳐 현재 <오마이뉴스> 기자. 한국인터넷기자상과 한국기자협회 이달의 기자상(2회) 수상. 저서 : <검사와 스폰서><시민을 고소하는 나라><한 조각의 진실><표창원, 보수의 품격><대한민국 진보 어디로 가는가><국세청은 정의로운가><나의 MB 재산 답사기>


독자의견

이전댓글보기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