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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봉에서 인월로 가는 구간 중 '람천' 둑방길을 걷는 사람들
▲ 지리산 둘레길 운봉에서 인월로 가는 구간 중 '람천' 둑방길을 걷는 사람들
ⓒ 안용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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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철을 혼란스럽게 하는 어수선한 느낌의 봄, 꽃비 날리는 계절이었다. 며칠 동안 비가 내렸고, 바람에다 옅은 황사까지... 우리가 사는 우주, 시간과 공간이 섞인 아우라의 혼돈을 체험하는 듯했다. 그리고 비로소 맞이하는 오늘(5월 1일)의 하늘빛, 바람결은 의외로 맑았으며 부드러웠다.

버스를 타고 한참을 미끄러져 남쪽으로 갔다. 운무 속에 너울처럼 펼쳐진 지리산 자락 겹겹의 묏부리가 잠깐의 졸음 속 꿈에서 희미하게 아른거렸다. 꼬부랑거리는 산자락의 흙길도 보였고, 마른 갈대 휘날리는 '둑방길'의 풍경도 눈앞으로 가까이 다가오고 있었다. 덜컹거리는 진동으로 흠칫 놀라 눈을 뜨니 어느새 지리산이 있었다. 화사하게 볕을 뿌리는 봄과 함께 장엄하게 거기 있었다.

사람들과 길을 걸었다. 물길, 산길을 따라 걸었고, 시골마을의 한적한 '소롯길'을 주저 없이 가볍게 걸었다. 길은 사람들에게 아무런 대가도 요구하지 않았고, 자신이 소유하고 있는 소박한 몸뚱이를 "자유로이 밟으라"하며 너그럽게 내주었다. 곁에 있는 '초록이'들의 싱그런 풀 향기까지도 푸시시 수줍어하며 나눠주고 있었다. 

머리와 가슴을 씻겨주는 자애로운 세심(洗心)의 바람을 맞았다. 그 바람결에 묵은 마음의 먼지를 털었고, 생활에 메여 지치고 오염된 혼탁한 날숨을 뱉어버렸다. 몸과 마음이 가벼워지는 느낌이었다. 알 수 없는 청정감이 걸음을 더욱 유쾌하게 인도했다. 걸으면 걸을수록 씩씩해지고 자유로워지는 것 같았다. 길 위에는 은은한 평화로움이 고요히 자리 잡고 있었다.

운봉에서 인월로 가는 구간 중 가로수 벚꽃이 핀 둑방길을 걸었다.
▲ 조화로운 걷기여행 운봉에서 인월로 가는 구간 중 가로수 벚꽃이 핀 둑방길을 걸었다.
ⓒ 안용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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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계 저수지를 휘돌아 감아 오르며 걷는 길 위에서 사람들은 이야기를 나누었고, 정을 나누었다.
▲ 걸으며 소통하며... 옥계 저수지를 휘돌아 감아 오르며 걷는 길 위에서 사람들은 이야기를 나누었고, 정을 나누었다.
ⓒ 이성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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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미와 자식이 함께 걸었고, 딸과 사위가 노모와 함께 애틋이 걸었다. 벗들이 다소곳이 담소를 나누며 걸었고, 아내와 남편이 서로를 보듬으며 손잡고 걸었다. 선배와 후배가 이야기 나누며 걸었고, 이웃과 동료가 따뜻한 우정을 나누며 걸었으며, 모두가 한 덩어리로 기쁘게 웃으며 걸었다. 아름답고 향기로운 산과 대지의 길이었다. 

들꽃이 길가에서 웃고 있었다. 나를 보고 웃었고, 우리를 보고 웃어 주었다. 한 치의 미움과 원망, 이기적 자아의 오만을 상상할 수 없는 평화로운 미소를 보여주고 있었다. 보랏빛 제비꽃을 감상했고, 뱀딸기꽃, 큰구슬붕이꽃, 미나리냉이와 광대나물꽃, 꽃마리와 큰개불알꽃, 조팝나무꽃, 산벚꽃과 분홍빛으로 지천에 물든 진달래를 만났다. 들꽃의 길이었고, 이름 없는 귀한 들풀의 길이었다.

걸으며 생각했다. 가만히 명상을 하곤 했다. 사람에 대하여, 삶에 대하여, 생물과 무생물에 대하여, 그것들이 얽혀 연관되어 존재하는 상생과 공존의 '인드라망'에 대해 생각했다. 생명이 가진 순결하고 지고지순한 가치와 존엄에 대해서도 생각했다.

숲과 길에는 초록생명의 빛이 있었고, 잉잉거리며 나는 벌들과 나비, 지저귀는 새들이 어우러져 살고 있었다. 곤줄박이와 어치, 까치와 박새, 백로와 왜가리가 있었고, 이름 모를 산새가 있었다. 고운 소리로 울음을 울어주었고, 날갯짓을 하며 재롱을 피워주기도 했다. 숲과 길에 살고 있는 영롱한 소리꾼들의 음성은 감미로웠다.  

숲 속에서 맛난 밥을 사이좋게 배불리 나눠먹었고, 잣나무 그늘 아래 모여앉아 어린 아이들처럼 '숲 속 작은 음악회'를 열었다. 리코더와 오카리나, 하모니카가 들려주는 청아한 노랫소리는 마치 길을 걷는 순례자의 지친 영혼을 달래주고 위로하는 천상의 소리로 가슴을 파고들었다. 초라한 작은 악기 하나가 사람들의 마음에 그처럼 감동적인 울림을 줄 수 있다는 사실을 바보처럼 뒤늦게 깨달을 수 있었으니 그것은 다행, 다행이었다. 길이 가르쳐준 각성이었고, 작은 행복이었다.

흥부골 자연휴양림 잣나무 숲에서 리코더, 오카리나, 하모니카 연주를 들으며 '숲 속 작은 음악회'를 행복하게 누렸다.
▲ 숲 속 작은 음악회 흥부골 자연휴양림 잣나무 숲에서 리코더, 오카리나, 하모니카 연주를 들으며 '숲 속 작은 음악회'를 행복하게 누렸다.
ⓒ 안용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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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 악기 하나가 사람들의 마음을 고요하고 평화롭게 만들어 주는 아름다운 기적...숲에서 우리는 행복했다.
▲ 숲 속 작은 음악회 작은 악기 하나가 사람들의 마음을 고요하고 평화롭게 만들어 주는 아름다운 기적...숲에서 우리는 행복했다.
ⓒ 안용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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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랭이 논길을 걸었고, 맑은 물 흐르는 계곡을 지났으며, 복숭아꽃 수수하게 핀 언덕에 올라 '무릉도원'을 노래했다. 결코 도시에서 경험하지 못했던 충만한 감흥이었다. 사람들은 숲 속 그늘에서 달짝지근한 탁주의 오묘한 맛에 휘청거렸고, 발그레한 분홍빛 볼을 주체하지 못하며 즐거워했다. 숲은 그렇게 사람들을 매료시켰고, 길은 그들을 점점 유토피아 같은 황홀한 공간 속에서 유희하게 만들었다.

잣나무, 낙엽송, 붉은 적송, 참나무와 쪽동백, 산수유와 팥배나무, 그 밖에 이름을 알 수 없는 수많은 나무들이 숲을 이루고 있었다. 그늘을 만들어 주었고, 피톤치드를 뿜어 주었고, 울타리가 되었고, 도열한 의장대가 되었으며, 딱따구리의 아파트가 되어주고 있었다, 자신이 가진 존재론적 가치를 너끈히 발현하고 있는 그들의 모습은 욕심 없는 자연 그 자체였다.

목적지를 향해 걸었다. 도달하고 말아야만 할 우리들의 강박과 의식적 목표는 우리를 경직되게 했는지도 모르겠다. 그저 걸으며 쉬고, 성찰하며, 마음을 비워야 했을 것을, 쉽사리 그걸 실행에 옮기지 못한 것 같다. 부족한 중생의 욕심, 그것을 버려야 했다.  

사람들은 함께 길을 걸으면 걸을수록 서로에게 익숙해져 갔고, 자신이 가진 솔직한 내면의 모습을 자연스레 드러내며 손을 내밀었다. 아무도 모르게 저절로 솔직해져 가는 알 수 없이 자연스런 진솔한 본성의 발현... 그것은 쉽사리 이해할 수 없는 숲길에서의 묘한 현상이었다. 길이 가진 신비한 원초적 매력 때문이었을까? 아니면 영특한 효험 때문이었을까?

길이 부여해 준 진실한 고백과 동화의 장(場), 서로의 빈 곳을 채우는 인간의 따뜻한 사랑이 저절로 반영된 공존의 길. 발끝에 보이는 풀과 꽃, 푸르른 산과 하늘, 따스한 햇볕과 풍요로운 바람이 넘실대는 지리산의 '둘레길'에서 나는 비로소 자연과 생태의 본질이 주는 배움을 깨닫게 된다.

사람은 사람들과 조화롭게 어우러질 때 사람다워진다. 서로의 부족함을 덮어주고, 서로의 허물을 감싸주며, 함께 누리고 공유할 때, 아름다워진다. 길은 근엄하고 권위적이지 않는 자애롭고, 너그러운 품성으로 그걸 깨닫게 한다. 길이 가진 어머니 같은 신비로운 포용성은 길을 걷는 이 누구에게도 진실하고 평등하게 골고루 나누어진다.

<고양올레>회원들과 함께 '실상사'에 들렀다.
▲ 지리산 실상사 <고양올레>회원들과 함께 '실상사'에 들렀다.
ⓒ 안용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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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오늘 지리산 둘레길 위를 걸으며 여태 누려보지 못한 충만한 감동을 느낄 수 있으니 더할 나위 없이 행복하다.

덧붙이는 글 | 지난 5월1일 <고양올레>회원들과 지리산 둘레길 도보여행 다녀와서 쓴 글입니다.
(# 도보여행 구간 : 지리산 둘레길 제2구간 운봉~인월+ 제3구간 중 인월~장항마을+실상사 까지 약 23km )



태그:#지리산 둘레길, #고양올레, #지리산길, #고양올레 걷기여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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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양시에 걷기 좋은 길을 개척하기 위한 모임으로 다음 카페 <고양올레>를 운영하는 카페지기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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