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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못났다는 생각이 들었다. 남들은 이 땅을 지키기 위해 총부리를 맞대고 피터지게 싸우는 동안 사내자식이 책 도둑질이나 하고 있으니, 그래서야 어떻게 이 세상에서 일가를 이룰까 싶었다. 벗어나고 싶었다. 모든 것으로부터 벗어나고 싶었다. 결코 그 해답은 책 속에 있지 않다는 것을 알면서도 책을 훔치는 우까지 범하고 말았다.

고등학교를 다닐 때까지만 해도 그의 꿈은 등대지기였다. 어두운 바닷가, 한 가닥 반짝이는 등대가 되고 싶었다. 대학을 다니면서도 꿈은 쉬 잊히지 않았다. 외아들에 대한 어머니의 바람이 거세었어도 등대지기가 되리라는 생각은 언제나 그를 붙잡고 있었다. 그런데 이게 뭔가. 전쟁으로 인해 자라난 인생에 대한 회의, 결연히 일어서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책을 읽어도, 밤을 새워 생각해도 풀 길 없는 해답을 찾기 위해 그는 출가를 결심했다.' - <맑고 향기로운 사람 법정> 중에서

법정스님을 소설로 만날 수 있게 됐다. 백금남 장편소설 <맑고 향기로운 사람 법정>(은행나무 펴냄)이 그 책. 이 책은 전남 해남군 문내면 선두리에서 태어나(1932년 10월 8일) 2010년 3월 11일, 서울 길상사에서 세수 79세(법랍 56세)로 입적한 법정 스님의 일대기를 그린 소설이다.

수필로만 만나던 법정스님을 소설로 만나다

<맑고 향기로운 사람 법정> 겉그림
 <맑고 향기로운 사람 법정> 겉그림
ⓒ 은행나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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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은 1936년, 다섯 살 소년 재철(법정 스님의 본명)이 할머니의 손을 잡고 한 작은 부두에 가는 것으로 시작된다.

할머니가 손자를 데리고 부둣가에 간 이유는 작은 배의 선장인 작은 아들에게 폐암으로 죽어가는 큰 아들의 약값을 부탁하기 위해서였다. 그로부터 그리 오래지 않아 소년의 아버지는 죽고 소년은 어머니의 품팔이와 작은 아버지의 도움으로 대학에 입학하게 된다.

휴전협정이 맺어졌지만 굶어죽는 사람이 태반인 1953년 어느 날, 재철(이하 법정)은 학교 앞에서 한 상이군인이 팔고 있는 헌책을 구경하다가 한순간의 욕심으로 책을 슬쩍 가방에 넣고 만다.

책을 구경하고 있다가 한꺼번에 몰려나온 학생들에게 떠밀려 책 주인과 멀어지고 마는데, 주인이 다른 학생들과 흥정을 하고 있는 사이 책을 갖고 싶다는 소유욕이 생겨나고 말았던 것이다. 도망치다시피 집으로 온 법정은 이처럼 고민하고 부끄러워한다.

'구산이 짤막하게 대답했다. 바늘이 있으면 내놓으라는 말이었다. 마침 바랑을 메고 있던 스님이 바늘을 찾아 내밀었다. 그제야 바늘을 가지러 간다고 한 시자의 말이 생각났다. 구산은 바늘을 쥐고 수챗구멍에 떨어진 밥알을 하나하나 찍어먹기 시작했다. "스님!"하고 그가 놀란 음성으로 불렀지만 구산은 밥알을 다 찍어 먹고 나서야 몸을 일으켰다. 그러고는 말 한마디 없이 공양간을 나가 버렸다. 스님은 전신이 얼어붙는 것 같았다. 구산 사형을 뵈러 갔다가 마침 이 광경을 목격한 법정은 그 후로 자기 것을 가져보지 않았다. 이것이 내 것이다. 네 것이다 싸워보질 않았다.' - 책속에서

전쟁이 준 황폐함을 경험한 뒤 출가를 결심한 법정 스님은 오대산으로 향하던 중 어떤 스님의 권유로 우연히 서울 선학원에 주석하던 효봉 스님을 찾아가 불가에 귀의한다. 그리고 법정이란 불명을 받게 된다.

스님들도 속가의 부모형제처럼 어떤 절에서 출가하고 어떤 스님으로부터 계를 받았는가에 따라 사형 등이 생긴다. 구산 스님은 효봉 스님이 서울 선학원에 주석하기 전, 보조국사의 제16법손인 고봉스님으로부터 몽중에 법호와 법명, 게송을 받고 기울어가고 있는 송광사 재건에 힘쓸 때 출가했다. 그러니 구산스님은 법정스님의 사형이다.

사실 구산 스님의 무소유는 스승인 효봉 스님으로부터 시작된 것이었다. 일제강점기 우리나라 제1호 판사로 자신의 판결에 따라 한사람의 목숨이 좌지우지 되는 것에 충격을 받아 엿장수로 떠돌다 불가에 귀의한 효봉 스님은 무소유의 화신 그 자체였다고.

'어느 날 법정 사미가 쌀을 씻다가 몇 알 흘렸는데 수챗구멍에 알알이 박힌 쌀알을 한 알도 남기지 않고 주워 먹게 했다. 등산객이나 신도들이 가끔 올라와 밥찌꺼기를 수채에 버리고 가면 그릇과 젓가락을 가져오게 하여 당신이 모두 건져 먹었다. 촛불의 촛농조차 마음대로 버리지 못하게 했다. 그것을 모아 다시 써야 했다. 하룻밤에 성냥 한 개비 이상은 쓸 수 없었다. 첫 불을 일으키면 초에 붙인 뒤 재빨리 돌아가며 붙여야 했다. 그 불은 잠자리에 들 때까지 켜져 있어야 했고 다시 성냥을 쓸 일이 없었다. (중략) 신도들이 가져다 바치는 시주물을 아끼고 아끼는 것이 어떻게 보면 좀스러운 짓 같지만, 도량을 위한 큰마음의 발로이니 그것이야말로 바로 참다운 무소유의 정신이라고 누누이 가르쳤다. 그 무소유가 참으로 전부를 가지는 것임을 알아야 한다고 가르쳤다.' - 책속에서

효봉 스님의 무소유 정신은 맏제자인 구산 스님과 법정 스님의 평생 가르침이 된다. 책속에는 이와 같은 무소유의 내력과 그에 얽힌 일화들, 에세이집 <무소유>출간과 관련된 이야기들이 들어있다.

초발심을 지키기 위해 '거울'을 간직했던 법정스님

'무소유' 법정스님 다비식을 하루 앞둔 지난 3월 12일 오전 서울 성북구 길상사에서 법정스님의 법구가 순천 송광사로 가기 위해 운구되고 있다.
 '무소유' 법정스님 다비식을 하루 앞둔 지난 3월 12일 오전 서울 성북구 길상사에서 법정스님의 법구가 순천 송광사로 가기 위해 운구되고 있다.
ⓒ 유성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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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소유와 관련된 소개하고 싶은 일화 하나가 있다. 사미 법정은 스승을 따라 미래사로 가면서 조실에 걸려 있던 거울을 가지고 간다. 그 절에 오직 하나 밖에 없는 거울이라 효봉 스님은 돌려놨으면 하는 마음으로 그 이유를 묻는다. 하지만 끝내 대답하지 않자 효봉 스님도 더 이상 묻지 않는다. 출가승이 유독 거울에 집착하는 것이 이상했지만 그에 대답을 그 누구도 듣지 못한다.

세월은 흐르고 흘러 이계진씨가 진행하는 <11시에 만납시다>에 법정 스님이 출연한 뒤 얼마 후 거울에 그리 집착했던 그 비밀이 옛 도반(함께 도를 닦는 벗)에 의해 밝혀진다. 방송을 보고 도반이 불일암을 찾는데, 그 오래 전 거울이 그대로 걸려 있었던 것. "아니 이 거울을 지금도 가지고 있소?"라는 물음에 법정은 "왜 가지고 있으면 안 되오?"라고 답했다.

'왜 이 거울에 그렇게 법정이 집착하는 걸까 하며 도반은 무심결에 거울을 뒤집어 보았다. 거울 뒷면에서 그는 다음과 같은 글을 읽었다. '처음 삭박한 날' 그 아래 연도와 날짜를 정확하게 써놓았다. 처음 삭발한 날, 그 모습이 얼마나 대견하고 아름다웠으면 거울을 가방에 넣어 왔겠는가 하는 생각에 도반은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날 밤 법정은 이런 말을 했다.

"나는 내 마음이 해이해지면 거울을 꺼내보고는 했다오. 그러면 머리를 깎을 때의 신심이 칼날처럼 일어나고는 했거든요."'

처음 낸 마음, 그 초발심을 잊지 않으려고 거울을 지니고 시시때때로 자신을 비춰보며 게을러지고 흐트러지려는 마음을 다잡았다는 이야기다. 혼자 살면 사람은 게을러지기 쉽다. 또한 타성에 젖기 십상이다. 일반인들에게도 타성은 무섭다. 하물며 수행승은 얼마나 경계해야 할 것이던가.

거울에 관한 일화를 읽으며, 볼 때마다 청빈하고 정갈한 수행자의 기운이 느껴져 송광사에서 매달 발행되던 불일회보에서 오린 법정 스님의 사진을 책장에 붙여두고 보던 때가 생각났다. 난 그 사진을 시시때때로 마주하며 다음 생애에는 출가수행자의 근기를 갖춘 남자로 태어났으면 좋겠다는 서원을 세우기도 했었다. 스물 몇 살에.

스님을 좋아해 <무소유>를 비롯하여 <텅 빈 충만> <말과 침묵> <서 있는 사람들> <산에는 꽃이 피네> 등 스님의 책들이라면 어지간한 것은 다 읽었다. 또 다른 책에서 법정 스님과 관련된 이야기가 나오면 빠짐없이 찾아 읽었는데 거울에 관한 이야기는 처음 듣는다.

아마도 많이 알려지지 않았나보다. 책속에는 이처럼 그동안 거의 알려지지 않은 이야기들이 법정 스님의 행적 따라 소개된다. 1975년에 출간된 <무소유> 인세를 봉투째 들고 장준하 집을 찾아간 일화와 사회운동에 동참했던 이야기, 불경 번역과 관련된 일화, <무소유>에서 제일 감동 있게 읽었던 수연 스님에 대한 이야기 등이 인상 깊다.

한 불자의 오랜 준비 끝에 나온 법정스님 소설

혹자들 중에는 이 책을 두고 '입적한 이후 워낙 귀해진 법정스님의 책에 대한 인기에 편승해 그동안 많이 알려진 이야기들을 토대로 쓴 소설 아닌가?'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을지도 모르겠다. 

저자 백금남은 법정 스님과 성철 스님을 존경해 온 불자로 그동안 법정 스님과 관계된 수많은 사람들을 인터뷰한 자료를 바탕으로 5년 전부터 이 책을 쓰기 시작했단다. 저자는 오직 책 한 권을 가지고 싶어 하던 법정 스님의 어린 시절부터 무소유마저 놓고 간 아름다운 마무리까지, 법정 스님의 일생을 담담하나 깊은 여운이 남는 소설로 재현하고 있다.

종교를 초월해 여러 계층의 사람들에게 맑고 향기로운 가르침과 감동을 주었던 법정 스님의, 수도승으로서 수행에는 냉철하지만 꽃과 대중들에게는 깊고 따뜻했던 그 마음을 충분히 엿볼 수 있는 장편소설이라고 할까. 저자의 다른 책으로는 <소설 탄허> <십우도> <참 좋은 인연입니다> 등이 있다.

법정 스님과 인연이 닿았던 탄허 스님, 성철 스님, 구산 스님, 효봉 스님 등 전설적인 큰스님들의 이야기들을 쉽고 풍성하게 만날 수 있음도 좋았다. 일제강점기, 독립자금을 무사하게 대주고자 시시때때로 사흘 밤낮을 기생을 끼고 술을 마시며 위장했던 구하스님 이야기는 오래 오래 기억될 것 같다.

덧붙이는 글 | 맑고 향기로운 사람 법정|백금남 (지은이)|은행나무 |2010-04-26)|11,500원



법정 - 맑고 향기로운 사람

백금남 지음, 은행나무(2010)


태그:#법정스님, #불일암, #효봉스님, #구산스님, #맑고 향기롭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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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도 제게 닿아있는 '끈' 덕분에 건강하고 행복할 수 있었습니다. '책동네' 기사를 주로 쓰고 있습니다. 여러 분야의 책을 읽지만, '동·식물 및 자연, 역사' 관련 책들은 특히 더 좋아합니다. 책과 함께 할 수 있는 오늘, 행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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