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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와우리(가운데), 필자는 맨 오른쪽
 나와우리(가운데), 필자는 맨 오른쪽
ⓒ 이규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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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트남은 우리가 어렸을 때 많이 들었던 '자유민주주의국가 월남'과 '공산국가 월맹'이라는 분단국 간 내전에서 1975년 월맹이 승리하여 공산국가로 통일된 나라다. 정식 명칭은 베트남사회주의공화국(Socialist Republic of Viet Nam)으로, 1986년 도이 머이(Doi Moi, 쇄신)정책을 채택한 이후 시장 경제를 도입한 사회주의국가다.

동남아시아반도의 동쪽 해안을 따라 길게 뻗어있는 베트남은 북쪽으로는 중국, 서쪽으로는 쯔엉 썬(Truong Son) 산맥을 경계로 라오스 및 캄보디아와 국경을 이루고 동쪽은 남중국해와 접해있다. 면적은 약 33만㎢로 한반도의 1.5배에 달한다. 남북의 직선길이는 한반도의 두 배쯤 되는 1650km이고 동서의 가장 좁은 폭은 약 48km 정도 되는 S자형의 매우 기다란 나라다. 우리나라 서쪽에 위치해 있으므로 시차는 우리보다 2시간이 늦다.

국토의 73%가 산악지대고, 평야 지대는 중국 윈난성에서 발원하는 북부의 홍강 삼각주와 티베트에서 발원하는 남부의 메콩강 삼각주 그리고 해안선을 따라 형성되어 있다. 홍강 삼각주를 중심으로 하는 북부를 박끼(Bac Ky 또는 박 보), 메콩강 삼각주를 중심으로 하는 남부를 남끼 (Nam Ky 또는 남 보) 그리고 하이반 고개(Hai Van Pass)를 중심으로 하는 좁은 지역의 중부를 쭝끼(Trung Ky 또는 쭝 보)라 한다.

그러나 19세기 후반에 프랑스가 점령하면서 이 지역을 각각 통킹(Tongking), 안남(Annam), 코친차이나(Cochinchina)로 이름 지어 서양에서는 일반적으로 이 명칭을 사용하고 있다. 북부의 중심도시는 하노이(Hanoi)이고 중부의 중심도시는 옛 황도였던 후에(Hue)와 지금의 다낭(Danang)과 나짱(Nha Trang), 그리고 남부의 중심도시는 과거 사이공으로 불렀던 현재의 호치민(Ho Chi Minh)이다.

35년 지난 지금, 난 왜 베트남에 미안해졌을까

베트남은 다민족사회로 비엣족(Viet), 일명 낀족(Kinh)이 80%에 달하고 주로 평지에 산다. 참족, 크메르족 등의 소수민족과 중국인 화교가 주로 평지에 살며 다른 소수민족은 대부분 산지에 거주한다. 전체 인구는 8300만명(2005년 통계)이 넘어 우리나라 남북한을 합한 인구보다 많다. 전체 인구의 약 60%가 불교 그리고 20% 정도가 천주교를 믿고 있으나 대부분이 조상을 숭배하고 있다. 주식은 쌀이며 쌀로 만든 퍼(Pho) 또는 분(Bun)이라는 국수를 우리가 매끼 밥을 먹듯이 먹는다. 전압은 우리와 같은 220V를 사용하고 있어 여행에 편리하다.

베트남 언어에는 중국어와 같은 성조가 6개나 있다. 20세기 초까지는 중국의 한자를 문자로 사용하면서 우리나라의 이두와 같이 중국의 한자에서 음을 빌려 만든 '쯔놈(Chu Nom)'을 함께 사용했다.

1651년 프랑스의 드 로드(Alexander de Rhodes) 신부가 로마자를 이용해 오늘날과 같은 베트남 문자를 만들었다. 1906년 프랑스 식민당국은 한자문화를 프랑스어 문화로 바꾸어 식민지 관료제도를 수립하기 위하여 새로운 문자를 '꾸옥 응으(Quoc Ngu)'라 부르고 중등학교에서 강제로 교육시켜 널리 보급되기 시작했다. 이 결과 현재 베트남 국민의 문자해독률은 주변 국가에 비해 매우 높다.

난 '베트남'하면 어렸을 적 태극기 휘날리며 역으로 환송하러 나간 것과 위문편지 쓴 것이 떠오른다. 물론 아무런 개념도 없던 그 때 모두 학교에서 억지로 시켜 한 일이었다.

정부는 "월남이 공산화되면 주변 국가가 차례로 공산화된다"는, 지금 생각하면 엉터리 같은 도미노이론과 우리나라와 비슷한 처지에 놓여 있는 "월남을 공산화의 위협으로부터 자유를 수호한다는 명분으로 미국과 월남이 요청하여 우리 군대를 파병한다"는 거짓된 이유를 일방적으로 세뇌시켰다.

지금도 나와 같은 세대 이상은 대부분 그렇게 알고 파병을 정당화하고 있으며 남의 나라 전투에 군대를 파견하여 인명을 살상한 것에 대하여 전혀 일말의 양심의 가책도 못 느끼고 있다.

내가 대학에 막 입학한 1975년, 월남이 패망하자 우리 정부는 이를 기화로 반공을 부르짖으며 마치 북한이 쳐들어올 것 같은 공포 분위기를 만들면서 군사 독재를 강화했고, 정권을 이어갔다. 그때로부터 35년이나 지난 지금에 와서, 나와는 아무 관계도 없을 것 같던 베트남은 항상 내 주변을 맴돌고 있다.

일본정부나 우리정부나, 다를 게 뭔가

민족문제연구소 활동을 하면서 일제강점기 시절 군 위안부 문제가 큰 사회문제가 되었던 시기에 이 문제를 불러일으킨 주체가 한국이라기보다는 일본 시민단체였고, 그들의 노력이 지금도 계속 이어지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러면서 자연스럽게 베트남이란 나라가 생각났다.

일본이 우리에게 가해자였다면 우리도 베트남에게 가해자가 아닌가? 일본인 스스로 그들의 과오를 들추고 있는데 우리도 우리 스스로 베트남에 저지른 과오를 들추어야 되는 것 아닌가? 그들이 비록 요구를 하지 않을지라도….

우리 군대가 베트남 전쟁을 수행하는 과정에서 수많은 민간인을 학살하고, 그들에게 이루 말할 수 없는 상처를 주고 벌은 수입으로 경제발전을 이루었다는 사실만 보더라도, 우리가 일제강점기시대에 입은 피해에 대해 일본에게 보상을 요구하는 것처럼 베트남도 우리에게 피해보상을 요구할 자격이 있는 것 아닌가? 일본 시민단체가 나서서 자신들의 아픈 과거를 알리듯이 우리도 먼저 나서서 과거를 반성하고 피해보상을 해야 하지 않은가? 아픈 과거를 감추는 것이 능사가 아니라 바로 알고 맺힌 아픔을 풀어야 진정 함께 협력할 수 있지 않은가?

이러한 관심을 갖게 되면서 베트남에 대하여 다양하게 공부하였다. 공부하면 할수록 그 진상을 자세히 알게 되고 그럴수록 우리가 베트남에 저지른 참상에 그리고 모르쇠로 일관하고 심지어 정당화하는 우리 정부와 사회에 대하여 나는 몸서리가 쳐졌다. 일본정부가 하는 짓이나 우리가 하는 짓이나 다를 바 없었다.

16일간 매일 평균 112km씩 모두 1798km를 달렸다

하노이의 숙소 입구에서
 하노이의 숙소 입구에서
ⓒ 이규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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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전거 타기를 좋아하는 나는 우리 군대가 저지른 민간인 학살에 대한 진상을 우리나라 사람에게 알리고 미안함을 나누기 위해 하노이에서 호치민까지 자전거로 종단하는 고난의 긴 여행을 하고자 했다.

예전에 베트남 민간인 학살에 대한 기사와 베트남의 희생자를 돕는 단체가 결성되었던 것이 기억이 나서 여기저기 수소문하고 인터넷을 뒤져 '나와우리'라는 시민단체를 알게 되었다. 마침 '나와우리'에서 2009년 여름에 있을 평화캠프를 위해 4월에 사전 현장 답사를 간다고 했다. 난 피해현장을 직접 가보고 싶었고 피해자를 만나보고 싶은 마음에 함께하였다.

가장 피해가 많은 중부지역 여러 곳을 둘러보았다. 그곳에서 사진으로만 보았던 '증오비'와 '위령비'를 직접 보았다. 거기에는 이렇게 쓰여 있었다.

"하늘에 가 닿을 죄악 만대를 기억하리라. 한국군들은 이 작은 땅에 첫 발을 내딛자마자 참혹하고 고통스런 일들을 저질렀다. 수천 명의 양민을 학살하고, 가옥과 무덤과 마을들을 깨끗이 불태웠다. 1966년 12월 5일 정확히 새벽 5시, 출라이 지역에 주둔하고 있던 남조선 청룡여단 1개 대대가 이곳으로 행군을 해왔다. 그들은 36명을 쯩빈 폭탄구덩이에 넣고 쏘아 죽였다. 다음날인 12월 6일, 그들은 계속해서 꺼우안푹 마을로 밀고 들어가 273명의 양민을 모아놓고 각종 무기로 학살했다. - 하략"

처음 베트남에 관하여 생각하게 된 시점으로부터 3년동안 망설임과 준비를 반복하다가 모든 계획을 수립하였다. 혼자 여행할 생각이었으나 뜻밖에 함께 가겠다는 동료를 만났다. 제주의 역사 선생을 포함하여 대전의 대학 교수 둘과 함께 모두 넷이서 여행하였다.

지난 1월 20일 출발하여 2월 8일 귀국할 때까지 그 사이 16일간 매일 평균 112km씩 모두 1798km를 달렸다. '미안해요, 베트남!'을 항상 생각하면서.

베트남으로 출발하는 날, 5시간동안 비행기에 갇히다

대전서 인천공항으로 가는 내내 안개가 자욱하게 끼었다. 공항 역시 이러한 안개가 끼었을 텐데 이런 날씨에 비행기가 제대로 이륙할 수 있을까 걱정이 들었다. 그러나 수속은 잘 진행되었고 이륙이 늦어진다는 자막이나 어떠한 방송도 없었다.

이륙시간이 지나도 비행기는 움직일 생각을 하지 않는다. 별 안내방송도 없다. 조금 기다리면 되겠지 했으나 시간은 마구 지나간다. 어느덧 점심 때가 다가오자 여기저기서 웅성거리는 불만 소리가 들린다. 기내식이 나온다. 지상에 착륙하고 있는 비행기 안에서 기내식을 먹기는 처음이다.

정시에 이륙했으면 도착할 즈음인 5시간이 지나서야 움직인다. 기다림에 지친 승객들이 환호성을 지른다. 그러나 창밖으로 보는 기상상태는 5시간 전하고 비교할 때 별로 바뀌지 않은 것 같다. 차라리 출발을 연기한다고 방송한 후 탑승시켰다면 이렇게 좁은 비행기 안에서 5시간이나 감금되어 있을 필요가 없지 않았을까.

하노이에 도착하니 어두컴컴하였고 보슬비가 부슬부슬 내리고 있었다. 자전거의 부피가 커서 짐칸이 있는 택시 두 대가 필요했다. 공항서 시내까지 꽤 시간이 걸렸고 요금은 정액제였다. 택시기사가 한국어를 조금하였다. 어디서 배웠냐고 물어보니 한국에서 3년간 연수를 받았다고 한다.

결국 오후 일정에 있던 호치민박물관 관람은 수포로 돌아갔다. 잘 알진 못했지만 같은 대전환경운동연합 회원을 만나 호엔끼엠(Hoan Kiem) 호수가 내려다보이는 식당에서 함께 저녁을 먹었다. 그는 떠나는 우리를 걱정하며 한 마디 보탰다.

"1번 국도를 가다 보면 가끔 거적을 덮어 놓은 것이 있는데 교통사고로 죽은 시신이다."

가뜩이나 1번 국도가 위험하다는 말을 여러 번 들은 우리 일행은 조금 겁먹었다. 차라리 말이나 하지 말지.


태그:#미안해요 베트남, #자전거여행, #일본시민단체, #하노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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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학을 통해 사회를 분석한 <오지랖 넓은 수학의 여행>, 역사가 담긴 자전거기행문 <미안해요! 베트남>, <체게바를 따라 무작정 쿠바횡단>, <장준하 구국장정6천리 따라 자전거기행> 출간. 전 대전환경운동연합 의장, 전 민족문제연구소 운영위원장, 현 배재대 명예교수, 피리와 클라리넷 연주자로 활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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