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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월 20일 여성문화유산연구회는 서대문 일대를 답사했다. 공녀들의 발자취를 따라 서대문 독립공원에서부터 무악재를 넘어 홍제천까지 걸었다. 바람은 여전히 차다. 4월 막바지인데도 겨울 같은 느낌이다. 다행히 어제까지 많은 비를 뿌렸던 하늘은 개었다. 지하철 독립문역 4번 출구로 나오면 곧바로 독립공원이다.

우선 공원 안에 있는 독립관에 들러서 묵념의 시간을 가졌다. 그곳은 순국선열들의 위패 봉안소다. 그 옆으로 서대문형무소역사관이 있다. 일제의 탄압에 맞섰던 수많은 애국선열들에서부터 광복 이후 민주화 운동에 이르기까지, 근ㆍ현대사의 아픔과 비극을 품고 있는 역사의 현장이다. 온전한 시대정신을 구현하려 했던 사람들의 희생이 고스란히 배어 있는 곳이다.

독립관. 순국선열들의 위패가 봉안되어 있는 곳이다.
 독립관. 순국선열들의 위패가 봉안되어 있는 곳이다.
ⓒ 박금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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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부터 역사관 매표소 앞은 줄서는 사람들로 복잡하다. 대부분 견학 온 학생들이다. 병아리 같은 유치원생부터 듬직해 보이는 중고생까지 아이들로 넘쳐난다. 역사관 주차장으로 대형버스들은 계속 들어온다. 그곳은 옷깃을 여미고 근엄한 태도로 일관해야 마땅할 장소다. 그러나 꽃보다 더 알록달록한 옷들을 입고 소풍 온 듯 즐겁게 재재거리는 아이들로 해서 역사관 마당은 마치 놀이동산 같다. 괜히 무게 잡아야 할 것 같았던 우리 어른들은 생명력 넘치는 기운에 한결 가벼운 마음이 되었다. 역사관 주변을 돌아보면서 죽음도 불사했던 애국선열들의 뜻을 조금이나마 마음에 새겨 넣는 시간을 가졌다.

서대문 형무소 역사관. 견학 온 아이들로 주변이 밝아 보였다.
 서대문 형무소 역사관. 견학 온 아이들로 주변이 밝아 보였다.
ⓒ 박금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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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에는 이곳 서대문 밖에 영은문과 함께 모화관이 있었다. 중국 사신을 영접하기 위한 곳이었다. 사신이 올 때는 왕세자가 모화관에 나가 맞아들이고, 돌아갈 때는 백관이 모화관 문 밖에까지 나갔다고 전한다. 또 중국으로 떠나는 이런 저런 사절단들은 경복궁에서 임금을 알현하고 이 문을 통해 나갔다. 1898년 독립협회에서는 영은문을 철거하고 시민기금을 모아 자주독립의 상징물로 독립문을 건립했다. 모화관도 독립협회의 회관으로 사용하였다.

지금은 독립문 앞에 영은문의 주초만 남아 있고, 건너편 영천 시장길 도로에 모화관터 표지석이 세워져 있다. 예전에 독립문은 도로 한가운데 있었다. 1979년 성산대로 건설로 지금의 자리로 이전되기 전까지는 차들이 비껴갔었던 기억이 난다.

영은문 본래 모습. 조선시대 중국의 사신을 맞이하던 모화관 앞에 세웠던 문. 지금은 아래의 돌기둥만 독립문 앞에 놓여 있다.-여성문화유산연구회 자료집에서 켑쳐함.
 영은문 본래 모습. 조선시대 중국의 사신을 맞이하던 모화관 앞에 세웠던 문. 지금은 아래의 돌기둥만 독립문 앞에 놓여 있다.-여성문화유산연구회 자료집에서 켑쳐함.
ⓒ 여성문화유산연구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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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문과 영은문 주초.  독립문이나 영은문 주초 모두 도로정비로 원래 있던 자리에서 옮겨왔다.
 독립문과 영은문 주초. 독립문이나 영은문 주초 모두 도로정비로 원래 있던 자리에서 옮겨왔다.
ⓒ 박금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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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대문 형무소 역사관을 나와 무악재를 넘는 길로 접어들었다. 홍제동 방면이다. 우리나라 처자들이 중국의 공녀가 되어 걸어가던 길이다. 고려와 조선왕조는 원, 명, 청나라의 요구에 따라 여자들을 바쳤다. 힘이 없는 나라에서 가장 만만한 것이 여자들이다. 동네북처럼 이곳저곳에서 집적이고 두들긴다. 해설사가 시를 한 부씩 나누어 주었다.

구중궁궐 깊은 속에 미녀이더냐
1만리 먼 곳으로 끌려가는 아가씨야
잡초가 어찌하여 향기풀 되어 가지고
물고기 산을 넘어 점점 멀어만지네
부모 슬하 떠나자니 말문 막히고
눈물을 참자하니 슬픔 더 할 뿐
근심 걱정 낙망 속에 어려운 이별
저기 저 산들만이 꿈속에 푸르고나.

고려말 조선초의 학자 권근의 <부(賦)>다. <부>는 조세나 부역에 징발된 사람을 일컫는 한자다. 어쩌지 못하는 답답함을 시로 남겼다. 공녀들과 가족들에게 어떤 위로가 되었을까. 부박(浮薄)한 범인(凡人)인 내게는 시가 마음에 담기지 않았다.

조공으로 보내기 위한 처녀선발에 임금이 손수 관여하였다는 기록이 보인다. 뽑힌 공녀들에게 임금과 왕비는 위로연을 열어주었고, 모화관까지 나와 전송을 했다. 공녀들은 영은문에서 가족들과 이별의 시간을 가졌다. 무악재를 넘고 홍제, 불광, 구파발, 파주, 문산, 개성, 평양, 신의주를 거쳐 중국으로 들어갔다. 홍제동으로 넘어가는 도로가 의주로다. 육로와 해로를 통해 중국까지 2달여가 걸렸다. 걸어서 가는 도중에 환관들에게 희롱도 당하고, 아파서 돌아오는 경우도 있었다고 한다.

무악재를 넘으면 홍제동이다. 홍제동 삼거리에서 만난 홍제원 일원 표지석.
 무악재를 넘으면 홍제동이다. 홍제동 삼거리에서 만난 홍제원 일원 표지석.
ⓒ 박금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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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제동으로 넘어가는 왼쪽은 안산(무악)이고 오른쪽으로 인왕산이 있다. 우리는 무악재를 넘어 지하철 무악재역까지 10여 분을 걸었다. 예전에는 무악재가(안산) 좁고 험하였으며 인왕산처럼 호랑이가 나왔던 산이란다. 도로를 가운데 두고 안산 밑과 인왕산 밑에는 아파트와 빌라들이 빼곡히 들어차 있다. 아파트들이 산을 점령해 버리니 이제는 얕은 뒷산이 되어 위용을 잃은 듯 보인다.

20여 분 걸려서 홍제삼거리에 도착했다. 이곳은 홍제원의 일원이다. 홍제원은 의주가로에 있던 첫 번째 국립여관이다. 나라에서는 동쪽에 보제원(경동시장 일원), 남쪽에 이태원, 동쪽에 홍제원, 광희문 밖에는 전관원(성동구 살곶이다리(전곶교)일원)을 두어 공무집행을 위해 움직이는 사람들과 여행자에게 무료숙식과 편의를 제공하였다. 이곳에서는 병든 기민들의 치료를 담당하기도 했단다. 또 홍제원은 중국사신이 한양으로 들어올 때 예복을 갈아입던 곳이기도 하다. 홍제원 근처에는 오가는 사신, 관리들과 길손들로 해서 떡집과 술집이 성행했다고 전한다. 동네이름의 유래로 남아 있는 곳은 홍제원과 이태원뿐이란다.

홍제삼거리부터 홍제역을 지나 홍제천이 보이는 유진상가까지 걸었다. 홍제역 부근은 인왕시장이 있는 곳이라서 도로 자체가 재래시장이었다. 회원들은 잠시 공녀길 답사 여정에서 비껴나 길가에 놓여 있는 각종 물건의 가격을 일별했다. 무지 싸다. 동네에서는 보이지 않던 야채들도 푸짐하다. 홍은사거리 유진상가 교차로에서 홍제천이 보이는 쪽으로 길을 건넜다. 일명 '서석게다리'라는 돌다리가 놓여 있던 곳이다. 교차로 주변은 복개가 되어 천이 보이지 않았다. 홍제현대아파트 맞은편에 나 있는 자전거 길로 조금 걸어 들어가면 홍제천이 보인다. 서대문독립공원에서부터 한 시간여가 걸렸다.

인왕시장, 홍제역 부근의 도로 재래시장. 홍제원이 있던 시대에도 이 근처는 사신이나 여행자들로 해서 떡집, 주막들이 성행했다고 한다.
 인왕시장, 홍제역 부근의 도로 재래시장. 홍제원이 있던 시대에도 이 근처는 사신이나 여행자들로 해서 떡집, 주막들이 성행했다고 한다.
ⓒ 박금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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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임진왜란과 정묘호란, 병자호란으로도 많은 여인들이 남의 나라로 끌려갔었다. 그리고 다시 돌아왔을 때 그녀들을 맞이한 것은 '환향녀(還鄕女)'라는 주홍글씨였다. 돌아온 여자들의 남편들은 공개적으로 이혼청구를 했단다. 선조 때 "이혼을 요청한 상황은 충분히 이해할 수 있으나 절개를 잃은 것으로 볼 수 없기 때문에 허락할 수 없다"고 이혼청구를 거절했다는 기록이 있다. 그러나 남편들은 첩을 얻어 부인을 멀리 했다.

인조 때 정묘, 병자호란으로 환향녀가 되었던 여자들도 이혼요구를 받았다. 인조도 받아들이지 않았다. 대신에 첩을 허용했다. 인조는 공녀가 환향녀가 되어 돌아올 때, 들어오는 길목에 흐르던 '홍제천에서 몸을 씻으면 몸과 마음이 깨끗해진다'고 명했다. 홍제천을 통해 공녀를 구제하려 했다. 나중에는 각 도에서도 행할 수 있게 했단다.

홍제천, 환향한 공녀들이 도성으로 들어가기 전에 이 천에서 몸을 씻었다고 한다. 이곳에서 공녀들을 추모하는 행사가 열린다.
 홍제천, 환향한 공녀들이 도성으로 들어가기 전에 이 천에서 몸을 씻었다고 한다. 이곳에서 공녀들을 추모하는 행사가 열린다.
ⓒ 박금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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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제천. 홍연교 부근에 만들어 놓은 인공폭포, 산은 안산(무악)이다.
 홍제천. 홍연교 부근에 만들어 놓은 인공폭포, 산은 안산(무악)이다.
ⓒ 박금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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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자의 정절은 목숨보다 소중하다'며 백성의 정신과 몸을 옭아 놓았다가 하루아침에 '눈가리고 아웅'하는 궁여지책이 잘 먹혀들 리가 만무하다. 환향녀가 되어 돌아온 공녀들은 제 나라에서도 치욕을 감내해야 했다. 홍제천에서 몸을 씻은 여인들은 결국에 도성으로 들어가지 못하고 주변에 눌러 산 경우도 많다 한다. 하늘 아래 사람으로 누가 그 여인들에게 돌을 던질 수 있겠는가. 역사는 부메랑이 되어 늘 우리 앞에 선다. 일제 때 끌려갔던 정신대할머니들의 문제는 현재인데, 군중심리에 편승해 마음 속에서라도 돌을 던진 적이 없었을까 가슴에 손을 얹는다.

홍제천변의 자전거 도로를 따라 서대문구청 방향으로 20분쯤 걸으면 안산의 절벽을 타고 내리는 인공폭포를 만난다. 바위를 타고 흐르는 물이 햇볕에 반짝이며 절벽의 경치를 더욱 볼 만하게 했다. 자연하천으로 흐르도록 복원했다는 홍제천은, 교차로 부근의 복개구간 말고는 물과 풀들이 적당히 어울려 걷기에 편했다. 인공폭포 부근에는 징검다리가 놓여 있다. 그곳에서 여성문화유산해설사회와 여러 단체들이 함께 모여 공녀들을 위한 추모 행사를 열기도 한다. 바람은 여전히 쌀쌀했지만 안산에 피어오른 새순의 나무들을 보며 움츠렸던 어깨를 폈다. 근처 홍연교를 건너 서대문구청으로 나오면서 답사를 마무리했다.


태그:#여성문화유산연구회, #공녀, #환향녀, #홍제천, #무악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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