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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홋카이도 노보리베쓰 호텔의 체크인은 오후 3시였다. 숙소에 짐을 풀고 방 안에서 조금 쉬려던 계획을 변경할 수밖에 없었다. 호텔 프런트에 짐을 맡기고 호텔 밖으로 나왔다. 일본의 3대 온천 휴양지인 노보리베쓰의 거리는 한산하고 한적했다. 수많은 사람으로 북적거리는 도시는 아니지만 시내의 큰 호텔들에는 많은 관광객들이 있었다.

한국에서 인쇄해 간 노보리베쓰 지도에 의하면 내가 있는 다이이치 타키모토칸(第一滝本館) 호텔에서 지고쿠다니(地獄谷)가 그리 멀지 않아보였다. 어디선가 유황 냄새가 풍겨왔다. 바람 속에 온천의 유황 성분이 녹아들어 있었다. 계곡으로 가까워질수록 점점 더 지독한 유황 냄새가 코 속으로 들어왔다. 계란이 썩는 듯한 유황 냄새가 우리 가족을 자동으로 지옥 계곡에 인도하고 있었다.

나는 자극적인 냄새를 쫓아서 걸었다. 계곡을 진동하는 냄새는 진짜 지옥에 온 것 같은 느낌을 들게 한다. 현재도 화산 활동이 계속되고 있는 이 활화산은 온천수를 끓이고 있었고 화산 가스 속의 유황 성분을 퍼뜨리고 있었다. 냄새 속에는 대학 시절 수없이 맡았던 최루가스의 매캐한 냄새도 섞여 있는 듯했다.

일본 3대 온천인 노보리베쓰에서 가장 이름있는 경승지이다.
▲ 노보리베쓰 지옥계곡. 일본 3대 온천인 노보리베쓰에서 가장 이름있는 경승지이다.
ⓒ 노시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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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텔에서 5분 정도 걸어가니 드디어 놀라운 경관이 펼쳐지기 시작한다. 아내와 딸도 지옥계곡의 이국적 광경을 보며 탄성을 뱉었다. 나는 홋카이도의 이 장엄한 광경을 보기 위해 왔고 나의 희망사항대로 장엄한 광경 앞에 서게 되었다.

노보리베쓰의 대표적인 경승지인 지옥계곡은 사진으로 보던 것에 비해서 훨씬 규모가 컸다. 역시 아무리 훌륭한 사진이라도 인간이 자신의 눈을 통해 접하는 세상의 광경을 모두 담아내지는 못한다.

19세기 중엽 일본의 한 가신이 온천수로 눈을 씻어 눈병이 나았다고 한다.
▲ 약사여래 사적. 19세기 중엽 일본의 한 가신이 온천수로 눈을 씻어 눈병이 나았다고 한다.
ⓒ 노시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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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신비한 세상에는 당연히 신앙의 흔적이 남아있었다. 현무암의 기단 위에 계단과 방, 지붕이 모두 갖추어진 조그만 사당이 있고 그 안에 약사여래(藥師如來)가 모셔져 있었다. 1861년, 이 지옥계곡에서 화약의 원료인 유황을 채굴하던 일본 남부 번(藩)의 가신이 온천수로 눈을 씻었다가 수년간 그를 괴롭혔던 눈병이 나았다고 한다. 그래서 온갖 병고에 시달리는 사람들의 질병을 소멸시켜 주는 힘을 가지고 있다고 믿어지는 약사여래가 여기에 등장한 것이다.

온천수에 함유된 어떤 성분이 과학적으로 그의 눈병을 낫게 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오랜 역사의 스토리텔링을 즐기는 일본인들은 역시 이곳을 노보리베쓰 온천의 3대 사적지로 지정하여 보존하고 있었다.

지옥계곡은 한국에서는 접해보지 못했던 풍경이었다. 나는 마치 국립과학관의 행성탐험 영화에서 보았던 화성의 한 붉은 계곡 안에 들어온 것 같았다. 나무로 만들어진 난간이 마치 지옥으로 인도하는 지하의 사다리 같이 길게 아래로 이어지고 있었다. 지옥의 사다리는 신비한 정경 속의 중앙으로 계속 들어갔다.

땅속에서 흘러나오는 화산가스가 지옥을 연출한다.
▲ 분기공의 화산가스. 땅속에서 흘러나오는 화산가스가 지옥을 연출한다.
ⓒ 노시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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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간 주변은 뜨거운 온천수가 흐르고 화산 연기가 모락모락 올라오고 있었다. 온천수가 유유히 흐르는 계곡 주변으로는 식물이 자라지 못한 채 암갈색과 회색의 흙과 바위들이 이국적 풍경들을 연출하고 있었다. 계곡은 유황연기의 성분이 쌓인 암갈색 바위 천지였다. 여름의 홋카이도에 지옥계곡 온천수의 열기는 후끈거렸다.

해발 200m의 원생림으로 둘러싸여 있는 지옥계곡은 바로 1만 년 전에 폭발한 카사야마 활화산의 분화구 속이다. 분화구의 지름이 450m에 이를 정도로 커서 분화구 안에 들어와 있다는 사실을 인식하지는 못했지만 나는 지옥 입구의 분화구 속으로 들어와 있는 것이다. 지옥계곡의 모양을 찬찬히 둘러보니 계곡의 기본적인 모양이 움푹 패인 절구 모양을 닮아 있다.

마치 지옥으로 가는 사다리같은 나무 산책로가 이어진다.
▲ 지옥계곡 가는 길. 마치 지옥으로 가는 사다리같은 나무 산책로가 이어진다.
ⓒ 노시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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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옥계곡으로 들어가는 데에 별도의 입장료는 없었다. 지옥으로 들어가는 사람에게 돈을 받기는 조금 뭐했던 모양이다. 이곳이 지옥계곡이니 나쁜 짓을 많이 한 사람은 계곡의 뜨거운 온천수에 빠져서 죽게 될까? 나는 지옥에 들어가면서 생각했다. 내가 나중에 죽어서 하느님이 나에게 천국에 가고 싶은지, 지옥에 가고 싶은지 물으면 어떻게 답변을 할까? 나는 노보리베쓰의 지옥계곡에 다녀왔으니, 이미 지옥에는 다녀왔다고 말할 것이다.

뜨거운 온천수의 열기가 느껴진다.
▲ 지옥계곡을 흐르는 온천수. 뜨거운 온천수의 열기가 느껴진다.
ⓒ 노시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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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곡을 따라 이어진 산책로를 계속 걸어가자 나무 산책로의 끝이 보인다. 나무 난간으로 만들어진 산책로의 끝에 무엇인가가 있었다. 사람들이 몰려들어 신기하게 내려다보고 있는 것이 있었다. 무엇이 있는 걸까? 나는 그곳이 가까워질수록 그곳이 온천수가 솟아올라오는 샘일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계곡을 따라 이어진 산책로의 끝은 간헐적으로 온천수가 지상으로 용출하는 간헐천이었다. 온천수의 원천인 온천 샘의 이름은 뎃센지(鐵泉池)였다. 철분이 많이 함유된 간헐천이기에 이런 이름이 붙었을 것이다. 이 온천샘의 설명문에는 주기는 일정하지 않지만 80℃에 달하는 온천수가 간헐적으로 솟구쳐 오른다고 되어 있다. 이 지옥계곡 전체에서 매분 3000ℓ나 되는 온천수가 솟아오른다고 하니 온천수의 양만 해도 보통이 아니다.

온천수가 용출하는 온천샘을 보기 위해 사람들이 몰려든다.
▲ 지옥계곡 뎃센지. 온천수가 용출하는 온천샘을 보기 위해 사람들이 몰려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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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천샘에 동전을 던져 넣지 말라는 안내문도 붙어 있다. 온천샘 안에 던져진 동전들은 검게 변색되어 흉측한 모습을 하고 있었다. 저 뜨거운 온천샘에 누가 돈을 던지며 소원을 빈단 말인가? 끓는 물 속에 동전을 던지는 것은 누가 봐도 어리석은 짓이다. 이곳에 동전을 던지는 사람들은 이 온천샘이 소원을 비는 로마의 트레비 분수와 같은 분수라고 착각한 모양이다.

시간이 조금 흐르자 우물 같은 온천샘 속의 온천수가 조금씩 올라오는 것이 보였다. 거의 비어있던 온천 우물에 물이 서서히 차오르기 시작했다. 신기하게도 온천수가 온천샘의 수면 위에 거의 차게 되자 마치 가스레인지 위 냄비에 가스 불을 붙인 듯이 물이 보글보글 끓기 시작했다.

처음 보는 신기한 장면을 남기기 위해 카메라를 온천샘 위에 가져갔다. 그런데 작은 화산 폭발이라도 일어난 듯 온천샘의 온천수가 성난 듯이 위로 끓어올랐다. 순간적으로 카메라의 뷰파인더를 수증기가 덮어 버리고 카메라의 시야는 완전히 가려졌다. 마치 누구의 허락을 받고 자신의 모습을 찍느냐는 온천수의 심술 같았다.

온천샘에서 온천수가 용출하며 솟구치고 있다.
▲ 용출하는 뎃센지. 온천샘에서 온천수가 용출하며 솟구치고 있다.
ⓒ 노시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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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온천샘 온천수는 자기에게 약간의 충격이나 울림만 가해도 열을 받는 친구다. 우리는 온천샘 주변에 둘러 모여서 소리를 질러보았다. 소리를 지를 때마다 온천수는 신기하게도 뽀글거린다. 지구의 지하에서 올라온 온천수가 인간들의 소리에 반응하고 있는 것이다. 나는 순간, 지구가 생물과 이 생물을 둘러싼 환경으로 이루어진 하나의 생명체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 유기체는 자신의 생명을 스스로 조절하는 가이아(Gaia)일 것이다. 수많은 원소로 이루어진 내 신체와 온천샘에서 뿜어져 올라오는 온천수도 모두 지구라는 한 생명체 속에서 조절되는 한 일부분인 것이다.

온천샘 앞에 나이 지긋하신 일본 할아버지 한 분이 있었다. 할아버지는 한 일본 아주머니의 간헐천 내력에 대한 질문에 열심히 답해 주고 있었다. 그 할아버지는 우리가 한국어로 온천샘이 신기하다는 이야기하는 것을 보더니 한국에서 왔느냐고 유창한 영어로 말을 붙여 온다.

"네, 서울에서 왔습니다. 오늘 아침에 도쿄에서 출발해서 이렇게 오후에 노보리베쓰를 둘러보고 있습니다."
"서울! 큰 도시죠. 나도 여러 번 가봤습니다. 나는 요코하마에 살고 있지요."

그는 신영이를 보더니 대뜸 이렇게 말했다.

"무한 경쟁, 하드 트레이닝을 하는 학생들의 나라에서 왔구나. 너도 밤 늦게까지 공부하니?"
"숙제, 숙제, 영어 숙제, 수학 숙제 하다가 밤 11시경에 잠을 자요. 영어 공부 열심히 하고 있어요."

신영이는 땅속에서 용출하는 온천수가 변색시킨 바위에 대해 궁금해 하고 있었다. 내가 온천수 옆의 적갈색은 황(黃) 성분이 녹아든 것이라고 말해주었다. 하지만 내 지식의 한계로 더 이상의 설명은 불가능했다. 과학자가 꿈인 신영이가 온천샘 옆에 이끼 같이 점점이 박혀있는 것이 무엇인지 또 물어본다. 나는 옆에 계신 일본 할아버지가 알 것이라고 생각하고 할아버지께 여쭤보자고 했다. 신영이에게 황(黃) 성분은 영어로 'sulfur'이니 영어로 물어보라고 했다.

"아빠! 저 이끼 모양의 작은 돌기는 물에 녹아있던 유황성분이 분리되어 오랜 시간 동안 굳어지면서 만들어진 거래요."

일본 할아버지는 원어민에 가까운 영어실력과 거침없는 과학지식이 놀라운 분이었다. 아마도 외국에서 수학한 교수님이거나 외국에 근무했던 화학 관련 대기업 임원이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현직에서 은퇴한 연로한 나이에 홀로 온천여행을 온 모습이 조금은 쓸쓸해 보였다. 지금 생각하면 그 할아버지와 연락처를 나누지 못하고 서울에 한번 여행 오시라는 이야기를 전하지 못한 것이 못내 아쉽다.

뎃센 온천샘을 나와 돌아오는 길. 지옥 계곡 주변을 찬찬히 살펴보았다. 수많은 온천 연기가 피어오르고 있었고 부글부글 끓는 온천수가 이곳저곳에서 계곡으로 머리를 내밀고 있었다. 나는 지옥계곡을 흐르는 뜨거운 온천수 속에 손을 담궈 보고 싶었지만 꾹 참았다. 60~80℃에 이르는 온천수 속에 손을 담그면 가스 불 위에서 끓기 시작하는 물에 손을 담그는 것과 다를 바 없기 때문이다.

작은 용출구에서는 온천수가 흘러나오고 분기공에서 끊임없이 연기가 피어올라 지옥의 풍경을 연출하고 있었다. 펄펄 끓는 계곡은 뜨거운 열기가 떠날 줄을 몰랐다. 처음에는 그렇게 고약하던 유황 냄새도 코에 점점 익숙해져 갔다. 나는 신기한 광경의 한 복판에 있었다.

나는 뜨거운 온천수에 몸을 담그기 위해 숙소로 천천히 걸어갔다. 한가하게 걷는 길, 일 년에 몇 번 안 되는 여유로운 여행길의 행복이다.

덧붙이는 글 | 이기사는 U포터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태그:#일본여행, #홋카이도, #노보리베쓰, #지옥계곡, #뎃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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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와 외국을 여행하면서 생기는 한 지역에 대한 궁금증을 해소하는 지식을 공유하고자 하며, 한 지역에 나타난 사회/문화 현상의 이면을 파헤쳐보고자 기자회원으로 가입합니다. 저는 세계 50개국의 문화유산을 답사하였고, '우리는 지금 베트남/캄보디아/라오스로 간다(민서출판사)'를 출간하였으며, 근무 중인 회사의 사보에 10년 동안 세계기행을 연재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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