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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이다. 지하철 8호선 산성역에서 남한산성을 가려고 9번 버스를 탔다. 구불구불 버스가 오르는 산비탈에는 벚꽃이 흥을 주체치 못하고 휘날리고 있다. 꽃비는 들판에 피어오르는 아지랑이 같았다. 22일 여성문화유산연구회의 회원들은 성곽의 전 구간을 걷자고 모였다. 남한산성과 병자호란은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니 나누어준 자료를 잘 읽어 오라고 했다.

버스종점인 산성(종로거리)에 도착했다. 오른쪽의 도로를 따라 내려오면 남한산성역사관이 있다. 역사관과 지수당이 있는 연못을 지나 10여 분 정도 도로를 따라 걸었다. 도로 맞은편 산길로 오르는 곳에 한적해 보이면서도 조촐한 성곽 문이 보였다. 남한산성의 동문이다.

 동문(좌익문), 도로 때문에 성곽이 끊겨있다.
 동문(좌익문), 도로 때문에 성곽이 끊겨있다.
ⓒ 박금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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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성곽돌기는 '동문'에서 시작해 '장경사 신지옹성', '벌봉', '북문', '연주봉옹성', '서문', '수어장대', '남문'까지입니다. 거리는 약 7㎞ 입니다. 동문 쪽으로 오르는 길은 조금 가파른데, 매도 먼저 맞는 게 낫겠죠? 그렇기 때문에 동문에서 장경사 쪽 길로는 잘 오르지 않죠. 좋은 기회가 될 것입니다"

남한산성은 '천작지성'이라고 했다. '가운데는 평평하고 바깥은 험고하며 형세가 웅장하여 마치 산꼭대기에 관을 쓴 것 같은 형상'이라고 <여지도서>에 나와 있단다. 즉 천혜의 요새란 뜻이다. 그러나 병자호란 때는 그런 형세가 독이 되었다. 왕(인조)은 산성 안에 들어와 있었고, 청군은 산성을 조여 왔다. 성 밖의 민이 청군에 유린되고 있어도 성 안의 왕은 손을 쓸 수가 없었다. 조선의 조정이 남한산성에 갇힌 꼴이 되었다.

 동문에서 오르는 길은 경사가 급하게 나있다.
 동문에서 오르는 길은 경사가 급하게 나있다.
ⓒ 박금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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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구불구불 날렵한 s라인 성곽
 구불구불 날렵한 s라인 성곽
ⓒ 박금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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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문 왼편으로 오르는 성곽 길은 처음부터 가파르다. 잠시 숨을 고르느라 오른편에 펼쳐진 성 밖의 산을 내다보니 연초록의 나무들이 수채화 그림처럼 다가든다. 이른 봄에 물이 오르며 피기 시작하는 나뭇잎이 꽃만큼이나 예쁘다. 전날 비가 내렸었다. 비에 씻긴 숲과 땅은 걷기에 안성맞춤이었다. 개이지 않은 하늘은 오히려 그늘이 되어 주었다. 흙 길은 먼지가 일지 않았고, 낙엽 길은 버석거리지 않았다. 발밑에 닿는 모든 길이 부드러웠다. 성곽은 S라인처럼 구불거리며 우리를 인도했다. "우와, 꿈의 S라인이 여기에 다 모여 있구만" 회원 한 사람의 외침에 모두 그렇다고 맞장구를 친다.

30여 분 걸어서 장경사에 도착했다. 성곽이 잠시 눈에서 멀어진다. 경내를 가로질러 산으로 오르면 성곽을 다시 만난다. 길은 울퉁불퉁 험하지 않으나 오르막의 경사는 꽤 각이 져있다. 깔딱깔딱 고개를 넘는 듯하다. 장경사에서 20여 분 걸어서 처음 만나는 암문을 나가면 '장경사 신지옹성'을 볼 수 있다. 이 옹성은 산성의 5개 옹성 중 가장 작은 곳이다. 옹성 끝머리에 2개의 포루가 나있다. 적이 본성에 오르는 것을 막고 성문을 가리는 일차적 방어시설물이란다. 길쭉한 옹성 안에는 한그루의 나무가 쑥과 질경이를 벗하며 봄을 맞고 있었다.

 장경사 신지옹성. 한그루의 나무가 문지기처럼 서있다.
 장경사 신지옹성. 한그루의 나무가 문지기처럼 서있다.
ⓒ 박금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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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다시 깔딱 고개를 넘어 도착한 곳은 동장대터다. '장대'는 휘하장졸을 지휘하는 지휘소였다고 한다. '장경사 신지옹성'에서 0.4㎞지점이다. 동장대지 부근의 여장은 복원이 되지 않은 채 놓여있다. 몇 년 전에 보았을 때와 똑 같다. 복원이 어려운 곳인가. 그 밖에도 올 겨울의 잦은 폭설은 성곽의 여장부분을 상당부분 허물어 놓았다. 조속히 보수작업을 할 것이라는 안내문이 보인다.

 동장대지 부근에 있는 성벽의 여장들. 훼손부분이 그대로 놓여있다.
 동장대지 부근에 있는 성벽의 여장들. 훼손부분이 그대로 놓여있다.
ⓒ 박금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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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장대지를 지나 천천히 걷는 걸음으로 20여 분 정도 거리에 벌봉으로 나가는 암문이 있다. 이번 답사는 본성 외에도 외성에 해당하는 벌봉도 포함되어 있다. 주봉인 청량산의 동쪽에 있는 봉이다.

벌봉은 해발 515m로 청량산(497.9m)보다 높다. 남한산성의 서쪽, 즉 수어장대와 행궁이 있는 곳보다 높아서 봉우리에 오르면 성 내부가 들여다 보인단다. 병자호란 당시에  청군은 이곳에 화포를 설치하고 성 안의 행궁을 향해 포를 쏘아댔다. 이러한 취약점을 보완하기 위해 숙종 때 외성을 축조하게 되는데, 벌봉(봉암성)과 한봉(한봉성)의 정상부까지 연결하였다.

암문을 나가니 완만한 능선으로 이어지는 숲길이다. 걷기에 편안한 길이다. 바람도 숲에 막혀 잔잔하다. 진달래가 만개하고 숲이 우거질 때면 볼만하겠다. 외성의 성곽은 방치되어 있어서 원형을 알아볼 수 없도록 허물어져 있었다. 이쪽은 외진 곳이라 사람의 발걸음이 복잡하지 않았다. 10여 분 걷다보니 갈래 길이 나오고 시커먼 커다란 바위가 눈앞을 가로막는다.

 벌봉. 혼자 겨우 서있을 정도의 면적이다. 뒤쪽은 낭떠러지, 앞쪽으로 서쪽의 행궁과 사방이 내려다보인다.
 벌봉. 혼자 겨우 서있을 정도의 면적이다. 뒤쪽은 낭떠러지, 앞쪽으로 서쪽의 행궁과 사방이 내려다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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넓은 평지에 바위 하나가 솟아있다. 벌봉이다. 그리 웅장해 보이지도 않는다. 여러 개의 바위조각들이 아무렇게나 뭉쳐서 큰 바위를 만들고 있는 듯하다. 주위의 숲이 깊어서 그런지 바위는 높지 않다. 바로 옆에 있는 암문으로 나가서 보면 벌의 모양을 하고 있어서 벌봉이라고 한다.

벌봉을 오르는데 무너진 성곽의 담장 돌들이 어지럽게 발에 밟힌다. 의심하면서 올랐다. 설마 이런 높이에서 성안이 보인다니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러나 꼭대기에 오르니 봉이 위엄을 갖춘다. 뒤쪽은 낭떠러지요 사방이 트이면서 신기할 정도로 멀리 있는 서쪽의 행궁이 나무들 사이로 드러난다. 바위가 위험해서 담대한 몇 사람만 겨우 꼭대기에 올라 보았다. 벌봉의 밑은 넓은 평지다. 그 앞에서 다리쉼을 하며 점심을 먹었다.

북문을 가기위해 왔던 길을 다시 돌아 암문으로 나왔다. 100m쯤에서 표지판을 만났는데 북문과 이어지는 성곽길은 화살표가 하늘로 향해있다. 그런데 왼쪽으로 말끔하게 다듬어진 숲길이 나 있고 인솔자가 그리로 간다. 이상하다. 길이 아래로 나있는데 화살표는 왜 위로 되어 있을까 생각하면서 한참을 완만한 내리막길로 내려왔다. 성곽은 나오지 않는다. 그때서야 길을 잘못 들었다는 것을 알았다.

왼쪽 숲에는 망월사가 보이고 오른쪽에는 현절사가 나온다. 내려오니 도로 맞은편이 산성역사관이다. 처음 시작했던 지점이다. 30분이 소요되었다. 할 수 없이 산성로터리에서 다시 북문으로 올랐다. 그래도 힘들지 않았던 것은 내려오는 산길이 아름다웠다. 새순이 돋기 시작한 연초록의 나무들은 사람들을 유순하게 만들었다.

 현절사와 산성동네, 산성보건진료소가 있는 거리.
 현절사와 산성동네, 산성보건진료소가 있는 거리.
ⓒ 박금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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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문에서 20여 분을 걸어서 서문에 도착했다. 일명 우익문이라고도 한다. 임금은 행궁에 있을 때 늘 남쪽을 향해 앉았고, 그럴 때 서문은 임금의 오른쪽에 있게 된다. 우익문은 정조때 서문을 개축하면서 붙여진 이름이란다.

서문 밖으로 나가 오른쪽으로 틀어 오르면 전망대가 나온다. 흐린 하늘이었지만 비온 뒤끝이라서 보이는 시계가 또렷하다. 도봉산, 북한산의 봉들이 눈에 들어오고 남산 타워도 보인다. 아래로 사람살이 집들이 빼곡하다. 조금 더 나가면 연주봉 옹성이다. 공사 중이었지만 들어갈 수 있었다. 조망권이 좋은 옹성 끝부분 원형의 석축구조물 계단에 서서 무상하게 건너편 산을 바라보았다. 해설사의 설명이 귓가에서 흩어진다.

 아름다운 연주봉 옹성. 서문 쪽에 있다. 옹성 끝에서 사방을 조망할 수 있다.
 아름다운 연주봉 옹성. 서문 쪽에 있다. 옹성 끝에서 사방을 조망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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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서문으로 들어와서 수어장대를 돌아보았다. 청량산 정상에 세워져 있는 지휘소다. 병자호란 때는 단층으로 서장대라고 불렀다. 영조 때 2층 누각으로 증축하면서 이름도 수어장대로 바꾸었다. 평일인데도 이쪽 지역은 사람들로 붐볐다.

최종 목적지인 남문에 도착하니 오후 4시였다. 아침 10시부터 시작해서 너무 늘어진 시간을 보냈다. 남문에서 동문까지 약 1.7㎞로 이어지는 성곽 길은 다음을 기약하고 마무리 했다. 그래서 아쉬움이 남았다.

광주유수 이기진은 서장대에서 "...오랑캐들이 강가에 진을 치고 기를 세웠다. 아, 한강의 물을 다 기울여도 그날의 피비린내를 씻지 못하리...만약 혹시라도  풍경이나 구경하고 유람을 탐하면서 슬퍼하고 탄식하는 마음이 없다면 그는 양심을 잃은 자일 것이다. 후인에게 경계하고 또 고하노라" 는 글을 남겼단다.

봄바람과 분홍빛 꽃비와 생명 소생을 알리는 연초록의 산에서 선조의 글귀는 경계가 되지 못했다. 그렇다고 양심을 잃었다고 자책하고 싶지는 않다. 후인들이 자신들의 산천을 돌아보며 그 아름다움에 기꺼워하는 것도 나라 사랑일 것이고, 또한 다음 세대에 물려줄 유산으로 지켜내는 것도 역사를 기억하는 하나의 방편이 될 수 있는 것이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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