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새롭게 조성된 '동대문역사문화공원'은 아쉬운 감이 있기는 하지만, 그래도 볼거리는 곳곳에서 발견할 수 있었다. 아무래도 가장 눈길이 간 곳은 '이간수문'이었고, 다음은 1950년대 권투시합을 알리는 포스터였다.
          
포스터
▲ 50년대 권투시합 포스터
ⓒ 김수종

관련사진보기


이승만, 이기붕의 정 부통령 출마와 당선을 축하하는 복싱시합이라는 것이 생소하기는 했지만, 당시의 시대상을 알 수 있는 재미있는 포스터였다. 그리고 서울시를 상징하는 '해치' 조각이나 모두 철거하지 않고 일부러 남겨두었다는 '야간경기용 조명탑' 등이 보기에 좋았다. 
        
오간수문
▲ 청계천 오간수문
ⓒ 김수종

관련사진보기


그리고 동대문 방향으로 조금 더 이동하면 평화시장이 보이고, 청계천 인근에 '오수간문(五間水門)'을 알리는 표지석이 나온다. 오간수문은 청계천 6가에 있던 조선시대의 수문으로 수문이 5칸으로 이루어졌다는 뜻에서 붙은 이름이다. 조선 초기 도성을 축성하면서 물길을 낼 때 만들어졌을 것이다. 
        
청계천
▲ 오간수문 청계천
ⓒ 김수종

관련사진보기


동대문 남쪽 성벽 아래로 흐르는 냇물이 도성 밖으로 잘 빠져나갈 수 있도록 설치한 수문이다. 사람들이 함부로 드나들지 못하도록 수문마다 쇠창살로 만든 철문을 설치하였다. 각 수문의 크기는 1.5m 정도이다.

오간수교는 1950년대 말부터 시작된 청계천 복개공사로 완전히 없어졌다가 2003년 7월부터 청계천복원사업의 일환으로 청계천 역사유적을 발굴할 때 아래쪽 끝받침과 홍예 기초부, 돌거북 등이 발굴됨에 따라 2004년부터 복원하여 새롭게 만들어졌다. 오간수문의 전통적인 모양을 살려 5개 수문과 무지개 모양의 홍예 아치를 재현했다.
                 
동대문
▲ 흥인지문 동대문
ⓒ 김수종

관련사진보기


그리고 그 옆이 우리가 흔히 동대문이라고 부르는 보물 1호 '흥인지문(興仁之門)'이다. 현재의 동대문은 대부분 고종임금 시절에 개축을 한 것이라 역사적으로 오래되지는 않았다. 하지만 남대문이 불탄 상태에서 만나는 동대문의 가치는 왠지 더 크게 느껴지는 것 같다.

흥인지문은 정면 5칸, 측면 2칸, 중층의 우진각 지붕을 갖추고 있다. 1396년(태조 5)에 건립되고 1453년(단종 1)에 중수되었으며, 1869년(고종 6)에 개축하여 현재의 모습을 갖추었다.

화강암의 무사석으로 홍예문(무지개문)을 축조하고 그 위에 중층의 문루를 세웠으며 문 밖으로는 다른 대문에는 찾아 볼 수 없는 고구려 방식의 반달 모양 옹성(壅城)을 가지고 있다. 문루의 아래층은 주위 4면을 모두 개방하였으나 위층은 기둥 사이를 모두 창문과 같이 네모나게 구획하여 각각 한 짝 열개의 판문(板門)을 달았다.

내부는 중앙에 고주(高柱)를 일렬로 배치하였으며 위 아래층의 대량(大樑)들은 모두 이 고주에서 양분되어 여기에 맞끼워져 연결되는 맞보로 되었다. 위층에는 마루를 깔았고 아래층에는 가운데 칸에만 마루를 깔았는데 이는 그 아래에 위치한 홍예문의 윗부분을 가리는 구실을 한다.

위층 천장은 이 문루가 다포집 계통에 속하는 건축이면서도 성문이라는 특수한 건물이기 때문에 지붕 가구재(架構材)를 전부 노출한 연등천장으로 되어 있다. 공포(栱包)는 아래층이 내삼출목(內三出目) 외이출목(外二出目)이고 위층은 내외삼출목(內外三出目)인데 소 혓바닥 형태는 매우 섬약하고 번잡하게 장식된 부분이 많으며 조선 후기의 쇠퇴된 수법이 곳곳에 엿보인다.
               
철도
▲ 경성궤도회사 철도
ⓒ 김수종

관련사진보기


동대문 인근에는 오수간문도 있지만, '경성궤도회사 터'를 알리는 작은 표지석도 있다. 1930년부터 1961년까지 뚝섬과 광나루까지 경성궤도회사가 경영하던 궤도전차가 운행하던 시발지를 알리는 표지석이다. 이 협궤열차는 예전 수인선처럼 작은 통통 열차로 승객 및 물자수송, 교외나들이의 중요한 교통시설이었다고 전한다.
         
공사자 감리자의 이름이 보인다
▲ 성곽 공사자 감리자의 이름이 보인다
ⓒ 김수종

관련사진보기


동대문 지역을 둘러 본 다음, '낙산(駱山)' 방향으로 향한다. 이대동대문병원은 없어지고, 동대문교회가 성곽 위를 차지하고 있다. 교회 뒤편의 석축에도 공사를 한 사람과 관리자의 이름이 보기 좋게 그것도 확실하게 드러나 보인다.
        
자세히 보면 아래의 네모난 돌이 보이고, 위에 자연석 비슷한 석축이 다시 그 위에 직사각형의 돌이 보인다. 시대를 잘 알지 못하고 그냥 복원만 한 것이다.
▲ 뒤죽박죽 복원된 성곽 자세히 보면 아래의 네모난 돌이 보이고, 위에 자연석 비슷한 석축이 다시 그 위에 직사각형의 돌이 보인다. 시대를 잘 알지 못하고 그냥 복원만 한 것이다.
ⓒ 김수종

관련사진보기


그런데 낙산 방향으로 올라갈수록 성곽을 복원하여 안정된 곳이 많기는 했지만, 연대와 순서를 제대로 알지 못하고 복원을 해서인지 아랫돌과 윗돌의 순서가 뒤죽박죽인 곳이 많다. 원래 서울 성곽은 조선 초기에는 일반적인 자연석에 가까운 돌을 쌓았고, 중기에는 약간 다듬은 돌, 후기에 와서 직사각형으로 다듬은 돌을 쌓았는데, 위아래가 바뀐 곳이 많아 안타까웠다.
            
벽화거리
▲ 이화동 벽화거리
ⓒ 김수종

관련사진보기


성곽의 바깥 길을 걸어가다가 작은 암문을 만나 안쪽으로 들어가 낙산으로 오른다. 조선의 정궁인 경복궁을 중앙에 두고 뒤편에 있는 산이 북악, 서쪽이 인왕산, 동쪽이 낙산, 남쪽이 남산이다. 낙산은 전체가 노출된 화강암으로 모양이 낙타 등과 같다고 하여 낙타산 또는 낙산이라 불리게 되었다.

오래 전부터 숲이 우거지고 약수터가 있어 아침산책길로 많이 이용되었다. 한 때 산 중턱까지 아파트가 들어서 있었지만, 공원녹지 확충 5개년 계획의 일환으로 근린공원으로 지정되어 아파트가 철거되고 낙산공원으로 조성되어있다.
         
벽화
▲ 이화동 벽화
ⓒ 김수종

관련사진보기


우리 일행은 낙산공원을 오르기 직전, 이화동으로 길을 약간 돌려 '벽화거리'를 둘러보았다. 종로의 대표적인 서민주거지인 이화동은 어둡고 침침한 거리였지만, 지난 2006년 문화관광부 산하 공공미술추진위원회가 주도해 70여 명의 작가가 벽화와 설치작업으로 가꾸어 놓은 벽화거리가 유명한 곳이다.
         
낙산
▲ 낙산에서 본 서울시내 풍경 낙산
ⓒ 김수종

관련사진보기


벽화거리가 조성된 다음에는 낙산공원과 서울성곽, 벽화거리를 찾는 관광객이나 사진작가들이 즐겨 찾아 이제는 명소가 되었다. 벌써 4~5년 전에 그린 그림들이 약간은 퇴색된 느낌이 들기는 하지만, 그래도 산책을 하거나 사진을 찍기에는 좋은 곳이다. 아직 이른 봄이라 푸르름이 덜 했지만, 여름에는 참 보기 좋은 곳이다. 
           
낙산
▲ 낙산에서 본 서울시내 풍경 낙산
ⓒ 김수종

관련사진보기


우리들은 이화동의 벽화거리를 둘러 본 다음, 낙산에 올라 동서남북으로 전망도 보고, 잠시 휴식도 취하고 물도 마시고 화장실도 다녀 온 다음, 성곽 길의 바깥쪽을 돌아 한성대 전철역을 지나 '혜화문'으로 이동했다.   

역사, 문화와 함께 하는 서울시 종로/중구 걷기 모임
네이버 카페    http://cafe.naver.com/daipapa


태그:#서울성곽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독자의견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