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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경무대(1948년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 후 명명된 대통령 집무실 겸 관사) 연못에서 휴식을 취하고 있는 이승만 대통령과 프란체스카
 경무대(1948년 대한민국 정부 수립 후 명명된 대통령 집무실 겸 관사) 연못에서 휴식을 취하고 있는 이승만 대통령과 프란체스카
ⓒ 대통령기록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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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만 정권의 부정선거에 항의한 1960년 4·19 혁명은 우리나라 민주화 운동사에서 중요한 이정표가 된 사건이다. 4월 19일을 전후로 한 시위 진압 과정에서 186명의 사망자를 낸 비극이었기 때문에 5·18 항쟁과 함께 현대사의 가장 가슴 아픈 순간으로 기억된다.

그러나 4·19 유족들만큼 반세기가 지난 사건을 가슴 아프게 기억하는 사람들이 있다. 당시 이승만 대통령의 경호책임자로서 4월 19일 경무대 앞 발포 명령자로 몰려 이듬해 12월 21일 서대문형무소에서 처형당한 곽영주씨의 유족이다.

<오마이뉴스>는 지난 15일 오전 서울 강남구의 H아파트에 살고 있는 곽씨의 부인 신옥균(82)씨와 손자 곽병민(38)씨를 인터뷰했다. 곽영주씨 유족이 언론 인터뷰에 응한 것은 곽씨가 처형된 지 49년 만의 일이다. 곽씨를 가장 잘 아는 신옥균씨의 옛 기억이 흐릿하지만, 신씨가 1984년 생전의 남편을 회고하는 수기를 써놓은 게 남아있었다.

해방 직후 경찰학교 생도감 맡다가 이승만 눈에 들어 벼락출세

그동안 곽씨는 이기붕 국회의장과 함께 이승만 대통령을 등에 업고 권력을 휘두른 간신의 대명사로 인식되어 왔다. MBC <제2공화국>, KBS <무풍지대>, SBS <야인시대> 등 이승만 정권의 비화를 다룬 TV드라마에서 곽씨가 정치깡패 이정재·유지광 등과 호형호제하고 장관들을 안하무인으로 대하는 모습으로 그려진 것도 대중들에게 악인의 이미지를 강하게 심어줬다.

1945년 해방 직후 수도경찰학교 생도감을 맡았던 곽씨가 우연히 이승만 대통령의 눈에 들어 벼락출세를 했다는 것은 유족들도 인정하는 부분이다. 이 대통령이 수도경찰학교를 시찰하던 도중 사열 구령을 부른 곽씨(당시 생도감)의 훤칠한 키와 외모를 눈여겨보고 청와대 경호원으로 데려갔다는 게 신씨의 설명이다.

그러나 아내의 눈에는 이 대통령을 너무나 극진히 모시느라 가족들을 제대로 챙기지 못하는 '0점 가장'으로 비쳤다.

 곽영주씨의 아내 신옥균(82)씨가 15일 <오마이뉴스>와 인터뷰를 하고 있다.
 곽영주씨의 아내 신옥균(82)씨가 15일 <오마이뉴스>와 인터뷰를 하고 있다.
ⓒ 손병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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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0년 6월 25일 새벽 남편은 집에 돌아오지 않았는데 새벽 3시경 어떤 사람이 남편의 전갈이라며 아무 짐도 챙기지 말고 아이만 데리고 용두동 큰댁으로 가 있으라고 했습니다. 어른(이승만)께서 어디를 가는데 모시고 가느라고 못 들어온다는 것이었습니다.

남편은 이 대통령을 모시고 부산으로 갔었던 것입니다. 남편은 자신의 가족에게 조금의 귀띔도 안 해주고 공무수행에만 철저했던 것입니다. 1·4 후퇴 때도 남들은 부산·대구로 피난을 떠났지만 저와 아이는 남편과 떨어져 있어야 했습니다.

나중에 이런 처사를 두고 뭐라고 한마디 했더니만 그분은 단호하게 '당신도 시민일 뿐'이라고 저를 야단쳤습니다. 저는 남편의 아낙으로 섭섭했지만 남편의 공무에 대한 철저함을 알기에 더 이상 거론하지 않았습니다."

이 대통령의 정치적 라이벌인 신익희씨가 먼 친척인 탓에 신문을 놓고 남편과 언쟁을 빚은 일도 있었다고 한다. 신씨가 전하는 두 사람의 대화 한 토막은 이랬다.

신옥균 : "이 대통령께서는 신문도 안 보세요? 도대체 국민들이 그토록 못 살겠다 갈아보자고 난리인데 이걸 아시는지 모르시는지 모르겠어요? 당신이 말씀 좀 하시면 안 되나요?"
곽영주 : "나는 경호실장일 뿐이야. 나는 이 대통령의 생명을 보호하는 임무를 가졌을 뿐이고 신문을 갖다드리는 것 같은 임무는 다른 비서관들이 하는 일이야. 나는 신문 갖다드릴 처지도 못돼."

"곽영주는 나는 새도 떨어뜨린다"는 말을 사격 솜씨 뛰어난 것으로 오해

이승만 대통령이 독재로 치달아가던 시절에 "곽영주는 날아가는 새도 떨어뜨린다"는 말이 돌았다. 곽영주의 권력이 그만큼 강하다는 의미로 하는 말이었는데, 신씨는 "남편의 사격솜씨가 이리 뛰어나구나"라고 잘못 알아들었다고 한다. 실제로 곽영주는 사격 솜씨가 뛰어나서 경무대경찰서의 사격 대회에서 여러 차례 1등을 차지했다고 한다.

그러나 곽씨 가족의 운명을 바꿔놓은 4·19가 마침내 찾아왔다.

전 국민적인 저항의 물결에 못 이겨 이승만 대통령이 권력을 내놓았지만, 경찰의 발포로 186명의 사망자가 생긴 만큼 누군가는 학살의 책임을 져야 했다. 특히 4월 19일 서울에서의 첫 발포가 경무대 앞에서 이뤄진 만큼 경무대의 경호책임자였던 곽씨에 대한 처벌은 불가피했다.

지인들이 도피를 종용했지만 그는 "나는 죄가 없으므로 도망갈 이유가 없다. 그리고 이 박사가 계시는데 그분을 경호하지 않고 어디로 내 몸을 피하겠냐"고 거절했다고 한다.

살인·부정축재·공무집행 방해 등의 혐의로 기소된 곽씨는 4월 19일 전날 밤 양홍식 동대문경찰서장에게 고려대 시위대를 습격한 정치깡패들을 석방하라고 압력을 행사한 혐의(공무집행 방해)만이 유죄로 인정되어 같은 해 10월 8일 징역 3년형을 선고받았다.

논란이 됐던 경무대 앞 발포 명령 용의자로는 홍진기 내무장관과 조인구 치안국장, 곽영주, 유충열 서울시경국장, 백남규 서울시경 경비과장 등 5명이 압축됐지만, 혁명재판부는 발포명령자를 끝내 가려내지 못했다.

남편이 경무대 경호관 직위를 이용해 부정축재를 저질렀다는 주장에 대해서도 아내 신씨는 단호하게 항변한다.

"저희는 그렇게 가난하지 않았습니다. 마치 가난하던 경찰관이 세도를 잡자 모리배들과 어울려 재산을 모은 것처럼 선전하기 위해 말들을 퍼뜨렸지만 사실과 다른 소문입니다. 저와 제 남편이 얼마간의 재산을 모을 수 있었던 것은 시댁에서 주신 소 두 마리와 돼지 두 마리를 기초로, 특별한 생활비가 들어가지 않는 상태에서 남편의 봉급을 모두 모았기 때문입니다.

그것들이 불어나는 동안에도 사택이 주어졌기에 집은 전세를 주어 그 전세금도 늘려나갔습니다. 시부모님이 살아계실 때까지 쌀 등이 시골에서 올라왔기에 특별히 생활비가 들어갈 리가 없었으므로 저는 남편의 월급을 열심히 불렸습니다."

1961년 1월 병보석으로 잠시 풀려난 곽씨도 가족들에게 "부정축재한 게 있으면 다 가져가라고 해. 몸뚱이만 있으면 돼. 젊은 놈이 제 가족의 생활을 위해 무슨 일 못하겠어?"라고 당당한 태도를 취했다.

한편으로, 곽씨는 이승만 대통령을 제대로 보필하지 못한 점을 아쉬워하는 말을 남기기도 했다.

"이 대통령이 인의 장막에 싸여 귀먹고 눈멀었으면 나도 마찬가지야. 정직한 보고가 들어오지 않는데 어떻게 정당한 명령을 내릴 수가 있었겠는가? 그런 것에 책임이 있다면 있는 거야."

1961년 1월 4·19의 원흉을 가려내겠다고 특검이 출범했지만, 특검 수사도 별다른 진척을 보이지 않았다. 그 해 2월 27일 김용식 특검은 "홍진기·곽영주·조인구가 경무대 경비실에서 모의, 경찰에 발포를 지시했다"고 수사결과를 발표했지만 이를 뒷받침할 증거를 내놓지 못했다.

경무대 발포 명령, 4·19 재판에선 무죄 - 5·16 재판에선 사형

 4.19 혁명 가두행진 및 시위 모습
 4.19 혁명 가두행진 및 시위 모습
ⓒ 대통령기록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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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해 5·16 군사정변은 곽영주에게 또 다른 분기점이 됐다.

군인들이 판·검사를 맡은 '혁명재판소'는 "경무대 앞 발포명령자는 곽영주이고, 서울시내 일원의 발포명령자는 홍진기"라며 두 사람에게 사형을 선고했다(1961년 9월 30일).

두 사람의 운명은 혁명재판소 상소심에서 다시 바뀌었다. 곽영주에게는 원심대로 사형이 선고됐지만, 홍진기는 무기징역으로 감형된 것이다(1961년 12월 19일)

곽씨는 이틀 뒤 서대문형무소에서 교수형을 당했고, 홍진기씨는 1963년 12월16일 형집행정지로 석방됐다. 삼성그룹 창업자 이병철씨의 사돈이었던 홍씨는 중앙일보 회장 등을 지내다 1986년 별세했다.

곽씨가 경무대 앞 발포 명령 혐의로 처형된 것에 대해 유족들은 지금도 억울하다는 입장이다. 생전의 곽씨도 아내에게 "날 이걸로 죽인다면 억울하다. 이승만 박사를 모셨다는 죄로 죽는다면 거역 안 하겠지만 발포 명령은 억울한 죄명"이라고 호소했다고 한다.

곽씨 유족들은 곽씨의 죽음과 관련해 두 가지 아쉬운 점을 얘기했다.

그의 손자 곽병민씨는 "할아버지가 경기공업고등학교(서울산업대)를 나오셨는데, 막상 감옥에 가고나니 도움 주실 분들이 없었다. 반면, 홍진기 장관은 경성제국대학 법학과 출신이었으니 법조계에서 도움을 주실 분들이 꽤 있어서 막판에 감형된 게 아니었을까"라고  말했다.

"곽영주는 공고 나와서 죽고, 홍진기는 서울법대 나와서 살았다"

신옥균씨는 남편 얘기가 나올 때마다 "우리 남편은 공고 나와서 죽고, 홍진기씨는 서울법대 나와서 살았다"는 말을 되뇌었다고 한다. 병민씨는 "4·19와 같은 국가적 위기상황에서 그만큼 많은 희생자들을 냈다면 내무장관이 더 큰 책임을 져야 하지 않냐"고 반문했다.

곽씨 유족들은 박정희 전 대통령(당시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과의 불화도 그의 죽음에 일정한 영향을 미친 게 아니겠냐고 조심스러운 의견을 내놓았다.

1958년 3월 박정희 7사단장이 소장으로 진급할 때, 곽씨가 경무대에 올라온 진급자 명단을 본 뒤 "박정희에게는 좌익활동 경력이 있다"며 반대한 일이 있었다. 이종찬·송요찬 등 군 선배들의 보증으로 박정희의 진급은 별 무리 없이 풀렸고, 공교롭게도 3년 뒤 박정희가 곽영주에 대한 사형 판결 확인서에 서명을 하게 된다.

이러한 집안 내력을 타고난 곽씨의 아들 승근(73년 작고)씨는 학창 시절 박정희 정권 반대 시위에 나섰고, 이 때문에 블랙리스트에 올라 취업에 어려움을 겪었다고 한다. 남편의 죽음에 오기가 생겨 박정희 정권 시절에도 청와대 인근에 계속 살았다는 신씨는 박 전 대통령에 대한 질문에 "원수는 (내가 아닌) 남이 갚아준다는 말이 있는데, 그 말이 맞다"고 답했다.

곽씨 유족들은 생전의 곽씨에 대해 "이승만 대통령이 선정을 베풀었다면 달리 평가됐을 인물"이라고 말한다.

"4·19 희생자들에게 죄송함과 고마움 혼재"

손자 병민씨는 "할아버지에게 이승만은 민주국가의 첫 대통령이라기보다는 조선왕조의 마지막 왕으로 인식됐던 것같다"며 "당시는 민주국가의 원칙이 정리되지 않은 혼란기였는데, 할아버지가 지금 청와대 경호원이었다면 그와 같이 행동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말했다.

"할아버지는 이승만 대통령을 충성으로 모시는 신하였다. 사실 그러한 인식이 문제였다. 국가지도자보다는 국가를 더 생각했어야 하는데, 할아버지는 이승만에 대한 충성을 국가에 대한 충성으로 받아들였다. 그러한 인식에서 역사와의 어긋남이 시작된 게 아닐까? 할아버지가 지난 역사에서 책임져야 할 부분이 분명히 있다고 본다. 이승만 대통령과 워낙 각별한 관계였기에 월권으로 해석될 수 있는 행위를 하지 않았을까?"

병민씨는 "4·19 희생자들에게는 할아버지로 인한 죄송함과 민주화를 이끌어냈다는 고마움의 감정이 혼재되어 있다"며 "지금은 조용히 지내지만 조그마한 사회 사업을 해볼까 하는 생각을 하고 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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