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곽영욱 전 대한통운 사장에게서 인사청탁과 함께 뇌물을 받은 혐의로 불구속기소된 한명숙 전 총리가 지난 9일 오후 서울 서초동 서울중앙지법에서 열린 1심 선고공판에서 무죄를 선고 받은 뒤 법원을 나서고 있다.
 곽영욱 전 대한통운 사장에게서 인사청탁과 함께 뇌물을 받은 혐의로 불구속기소된 한명숙 전 총리가 지난 9일 오후 서울 서초동 서울중앙지법에서 열린 1심 선고공판에서 무죄를 선고 받은 뒤 법원을 나서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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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사는 그 직무를 수행함에 있어서 국민 전체에 대한 봉사자로서 정치적 중립을 지켜야 하며 부여된 권한을 남용하여서는 아니된다.'

검찰청법 4조 2항이다. 자주 들춰볼 일이 없는 법률 조항인 탓일까. 한명숙 전 총리의 범죄 사실을 입증하려던 검사들이 법을 어기고 말았다. 정치적 중립을 지켜야 할 이들이 지방선거를 앞두고 정권과 집권 여당의 정적을 집요하게 물고 늘어진 것이다.

확인되지 않은 피의사실을 언론에 흘리고 직접적 연관이 없는 치부도 들춰내 떠들어댔다. 곽영욱 전 대한통운 사장의 증언을 얻어내기 위해 강압적으로 수사를 했다는 의혹마저 받고 있다. 여기에 선고를 하루 앞두고 지금껏 거론되지 않았던 또 다른 업체에 대한 압수수색을 단행했다는 소식이 더해지면서 대한민국 검찰의 위상은 무너져 내렸다. 물론 무엇보다도 심각한 권한 남용은 독점적 공소권을 이용해 한 전 총리를 법정에 세운 행위 그 자체다.

검사들의 위법 행위를 입증할 능력이 필자에겐 없다. 수사권도 없는 필자가 검찰청을 휘젓고 다닐 수는 없는 노릇이니 너무 나무라지는 말기 바란다. 어디까지나 '정황'이 그렇다는 것이다. 따지고 보면 이번 사건에서 검찰이 보인 행태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재판이 끝날 때까지도 검찰은 재판부가 납득할 만한 증거를 확보하지 못 했으니 검찰 자신도 한 전 총리의 유죄를 확신할 근거는 없었던 셈이지 않은가. 어쩌면 한 전 총리에게 혐의를 둔 검찰보다 검찰의 위법성을 따지는 필자의 의심이 더 합리적일지 모른다.

한명숙 법정에 세운 검찰, 검찰중립성 의심하는 국민

지난 1월 21일 오전 서울 서초동 대검찰청 대회의실에서 김준규 검찰총장이 전국 일선 검찰청의 검사와 검찰수사관들과 함께 첫 화상회의를 하고 있다.
 지난 1월 21일 오전 서울 서초동 대검찰청 대회의실에서 김준규 검찰총장이 전국 일선 검찰청의 검사와 검찰수사관들과 함께 첫 화상회의를 하고 있다.
ⓒ 유성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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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판부의 첫 결론 이후 각 정당은 다시 주판알을 튕기느라 분주하다. 특히 한나라당 원희룡·나경원 서울시장 예비후보들의 발언에는 잔뜩 날이 서있다. "무죄 판결이 공직자로서 도덕성이나 부적절한 처신에 대한 면죄부가 아니"라는 원희룡 의원의 발언이나 "법적으로는 무죄 판결을 받았지만, 도덕적으로는 유죄"라는 나경원 의원의 발언에는 한나라당이 느끼고 있을 위기감이 그대로 담겨있다. 이들에겐 지금 여유가 없어 보인다.

반면 안희정 민주당 최고위원은 "야당 지도자를 법정에 세운 최종 책임은 이명박 정부가 져야만 한다"며 기세등등하게 반격에 나설 태세다. 모처럼 불어온 순풍을 타고 하늘이라도 날고 싶은 모양이다.

어쩌면 정치 재판 끝에 정치 논평들이 뒤따르는 건 당연하다. 선거의 계절을 앞두고 있으니 조금 더 나은 사회를 위해 다소의 소란스러움쯤은 참아주는 것이 국민의 도리이기도 하다. 하지만 문제는 정치의 소란스러움이 아니다. 정작 우려스러운 것은 정치의 바깥에 머물러야 할 영역들이 정치에 휘둘려 오히려 소란스러움을 더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법 영역'이 특히 그렇다. 이번 사건은 법이 '정치적 중립'을 벗어나 '정치의 중심'에 서는 것이 얼마나 위험한지를 다시 한 번 확인시켜 주었다.

재판 결과를 두고 정치 공학적 계산에 골몰하는 것이 우스운 일이긴 하지만 그것을 업으로 하는 이들이라면 그럴 수도 있다. 그러나 온 국민이 사법적 판단을 두고 아무렇지도 않게 정치를 떠올리는 건 아무래도 바람직하지 않다.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다시 '법'의 문제다.

적어도 지금까지 밝혀진 정황과 사법 당국의 판단에 비추어 이번 사건은 대한민국 검찰이 정치적 중립이라는 궤도에서 한참 벗어나 멋대로 공소권을 휘두른 결과다. 그것이 사건의 본질이다. 따라서 다행스럽게도 1심에서 검찰의 정치적 의도를 막아냈으니 이제 모두 투표소로 달려가자는 결론은 여전히 불안할 뿐이다. 4년 임기의 서울시장에 누구를 앉히는가보다 중요한 것은 대한민국 검찰을 다시 제 궤도로 돌려놓는 일이기 때문이다. 

검찰에 '김예슬'이 준 교훈을 보낸다

김준규 검찰총장
 김준규 검찰총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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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결 뒤 김준규 검찰총장은 간부회의를 열어 대책을 논의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 자리에서는 "금도를 넘어선 일방적인 판결", "검찰이 제출한 증거를 깡그리 무시한 판결"이라는 등의 성토가 쏟아졌다고 한다. 기자 브리핑에 나선 서울중앙지검 김주현 3차장검사 역시 "여러 가지로 납득하기 어려운 판결"이라는 공식 입장을 밝혔다. 여기까지가 검찰 상층부의 의견이다.

그러나 이것이 대다수 평검사들의 생각이라고 믿고 싶지는 않다. 대다수의 검사들은 과연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혹시 자신이 몸담은 조직이 보이는 납득하기 힘든 행태를 지켜보며 몹시 부끄러워하고 있지는 않을까. 가족과 친구들 얼굴 보기가 민망해 밤새 휴대전화를 꺼둔 채 쓴 소주를 들이키지는 않았을까.

이런 허무맹랑한 상상 끝에 문득 얼마 전 공개 자퇴서를 쓴 고려대학교 김예슬 학생이 떠올랐다. '나는 오늘 대학을 그만둔다, 아니 거부한다'던 그의 선언을 두고 어떤 이들은 냉소를 보내기도 했지만 적어도 그의 선언이 이 시대의 대학 사회에, 아니 우리 사회 전체에 대학의 존재이유를 둘러싼 의미있는 화두를 던졌다는 사실만은 분명해 보인다. 비슷한 선언들이 뒤를 잇고 있다는 점도 이를 뒷받침한다.

검사들에게 그러한 선언을 기대하는 것은 무리일까. '나는 오늘 검사이기를 거부한다'는 선언 말이다.

대학생이기를 포기하는 것과 검사직을 포기하는 것 가운데 어느 쪽이 더 힘들까. <헌법의 풍경>(김두식, 2004)이란 책에 적힌 다음 구절을 음미해보자. 국가 권력이란 이름으로 정치범들에 대한 온갖 폭력이 아무렇지도 않게 자행되던 시절, 자신의 손에 피 한 방울 묻히지 않았을 판검사들의 죄가 결코 지하 고문실을 들락거린 고문 형사들의 그것보다 가볍지 않음을 지적한 대목이다.

"왜냐하면 판검사는 '그 자리를 그만두고 나와도 오히려 더 많은 수입을 올릴 수 있는' 이 나라에서 거의 유일한 직업이기 때문이다. 그때도, 지금도 그들에게는 공직을 떠나 변호사로 일할 무궁무진한 기회가 열려 있습니다."

책의 저자 역시 검찰에 몸담았던 인물이다.

검찰은 특별한 사명감·용기 지닌 사람들 집단이어야 한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기소편의주의나 기소독점주의가 지닌 문제를 새삼스럽게 파헤치거나 개혁의 방향을 새롭게 모색하는 일이 아니다. 스스로 신뢰의 위기를 깨닫고 개혁의 주체로 서고자 하지 않는 한 바깥의 힘만으로는 도대체 어찌하기 힘들만큼 검찰이란 조직은 우리 사회의 높은 곳에 자리 잡은 단단하고 폐쇄적인 권력집단이기 때문이다. 오늘 침묵하는 대다수 검사들의 목소리가 정말이지 아쉬운 이유다.

"지나치게 많은 권한을 가지고도 제대로 일할 자신이 없는 검사들은 저처럼 빨리 옷을 벗고 나와야 한다는 말씀으로 검사들에 관한 이야기를 마칩니다. 검찰은 특별한 사명감과 용기를 지닌 사람들의 집단이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역시 <헌법의 풍경>의 한 대목이다. 그렇다. 당사자들에겐 가혹한 얘기로 들릴지 모르지만 대다수의 국민들도 책쓴이와 마찬가지로 검찰이 '특별한 사명감과 용기를 지닌 사람들의 집단'이길 바랄 것이다. 그리고 한 가지 덧붙이자면 필자는 대한민국 검사의 대다수가 실제로도 그럴 것이라 믿는다. '특별한 사명감과 용기를 지닌' 다수의 검사들이 더 늦기 전에 이 숨 막히는 침묵의 카르텔을 깨주길 기대한다. 


태그:#한명숙, #검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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익산옆 앞 '기찻길옆골목책방' 책방지기. 서울에서 태어나 줄곧 수도권에서 살다가 2022년 2월 전라북도 익산으로 이사해 지방 소멸의 해법을 찾고 있다. <로컬꽃이 피었습니다>(2021), <슬기로운 뉴 로컬 생활>(2020), <줄리엣과 도시 광부는 어떻게 마을과 사회를 바꿀까>(2019), <나는 시민기자다>(2013) 등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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