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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로에 선 '연합정치'

 

6.2지방선거에서의 야5당의 '연합정치'가 위기에 처해 있다. 진보신당이 '민주당의 선 양보'를 주장하면서 1차로 협상테이블에서 빠져나가더니, 야5당의 '맏형'격인 민주당은 급작스레 돌출해버린 '경기지사 유시민'이라는 변수 앞에 느닷없는 '분노의 감정'만 표출하면서 4+4합의안을 '보란 듯'이 걷어차 버렸다. 민주당 역시 처음부터 양보할 생각은 없었던 듯하다.

 

"대의를 위해서 작은 것을 양보하는 정신이 우리에게는 훈련되지 못한 것 같다."

 

신필균 녹색교통운동 이사장은 이렇게 안타까움을 토로했다.

 

 

"연대와 연합이란 기본적으로 남과 함께 같이 가는 것을 말한다. 이를 위해서는 자신을 버릴 줄 알아야 하는데, 우리는 이걸 할 줄 모르는 것이다. 내가 해외에서 눈물을 흘린 것도 전부 다 이런 것 때문이었다."

 

신필균 이사장이 처음 사회운동을 시작한 것은 지금부터 약 40여 년 전인 1969년이었다. 당시 이화대 기독교학과에 재학 중이던 그는 2년간의 진부한 대학생활에 회의를 느껴 휴학을 하고 있던 상태였다. 하이힐과 미니스커트의 유행 속에서 그가 느낀 대학이란 마치 '결혼 잘 하기 위해 다니는 곳'일 뿐이었다. 막연하나마 어떤 삶의 의미를 찾고 있던 그에게 그런 대학생활이란 전혀 무의미한 것일 뿐이었다.

 

'연합'의 힘을 느낀 최초의 경험

 

그러던 어느 날 그는 신문기사를 소개받게 된다. 일명 '공덕동 철거민사건'으로 땅 주인인 한전이 깡패들까지 동원하여, 지금까지 3-40년간 별 탈 없이 그곳에서 잘 살아오고 있던 거주민들을 강제로 몰아내고 있다는 기사였다. 한전은 해방 이후 그 땅을 사들이기는 했지만, 그때까지 개발은커녕 당시의 거주민들에게 어떠한 조치도 취해오지 않고 있었다. 그러다 갑작스럽게 강제철거에 나섰는데, 사실 그 땅은 원래 조선왕실의 땅으로 조선 말기 수재민 구제사업의 일환으로 왕실에서 이들에게 무상으로 불하한 땅이라는 것이었다.

 

신필균 이사장은 이것은 부당한 처사라고 생각했다. 1969년 3학년으로 복학한 그는 동료 6명과 함께 'The Power'란 단체를 조직하여, 대표로서 이 문제에 적극적으로 대응해나가기 시작했다. 당시 한전에서 1가구나 2가구씩 묶어서 개별소송을 벌여나가고 있던 것에 맞서 100여 가구를 모아 집단소송으로 대응한 끝에 승소를 이루어냈던 것이다.

 

"연합의 힘을 느낀 최초의 경험이었죠. 1,2가구가 재판을 할 때와는 달리 100여 가구가 공동으로 재판에 대응하자, 같은 사안을 가지고도 재판부에서 다른 판결을 내려준 거예요."

 

그는 변호사의 도움을 받아 '주거권(땅주인이 있었다 하더라도 20년 이상 아무런 통보가 없었다면, 그곳에 살고 있는 거주민들이 주거할 권리) 조항'을 찾아내었다고 했다. 그것만이 아니었다. 공덕동 철거민 소송에 대응해 나가는 그 바쁜 와중에도 회원 중 3명은 인천에 있는 중앙도자기 공장에 위장취업을 하였던 것이다. 그리고 전태일 열사의 분신사건이 벌어진 뒤에는 이화여대생들을 이끌고 동숭동 서울대 앞에서 시위에 적극적으로 참가하기도 했다.

 

통일사회당 김철 당수와 스웨덴

 

대학졸업 후 그는 KSCF(한국기독학생총연맹) 간사로 일하면서 학생운동과 사회운동, 그리고 민주화운동에 적극 가담하게 된다. 지금의 남편을 만난 것도 바로 그 당시였다. 그러나 그는 사회운동을 본격적으로 시작하면서부터 '좌절'을 느꼈다고 했다. 잘못된 사회를 바꾸어나가기 위해서는 '실력'이 필요하다는 점을 절실하게 깨달았던 것. 그는 1973년 이화여대 사회학과 대학원에 진학을 했다. 그리고 이효재 교수의 소개로 5월 당시 유일한 진보정당이었던 통일사회당의 김철 당수를 만나게 된다.

 

"김철 당수는 그때 해방이후 6.25전쟁을 거치면서 척박해진 진보정당운동을 이어가려고 개인적으로 국제사회민주주의 연합체인 '사회주의인터내션날(SI)'과 접촉을 하고 있었어요. 국내에서는 자생적 기반은커녕 '빨갱이'로 정권의 탄압을 받기만 했으니, 일종의 고육지책이었죠. 김철 당수는 한국에서도 후계자를 키워야겠다고 생각해 외국의 사민주의 정당에 도움을 요청했는데, 스웨덴의 사민당 정부에서 장학생으로 초청하겠다는 연락이 온 거예요."

 

신필균 이사장은 많이 망설였다고 한다. 당시 그가 몸담고 있던 기독교운동진영에서의 반대도 만만치가 않았다. 그러나 그에게는 이상하게도 '가야 한다'는 느낌이 더욱 강해지기만 했다. 그는 '가겠다'고 결심을 했다. 스웨덴 정부에서도 특별하게 2배의 장학금을 주겠다는 아주 좋은 조건이었다.

 

그런데 정부에서 여권을 발급해 주질 않았다. 몇 번의 연기 끝에 그는 개강을 이틀 앞둔 1973년 9월 11일 스톡홀름 공항에 혈혈단신으로 내리게 된다. 마중 나온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몇 번의 연기 끝에 그는 '양치는 소녀'가 되어 있었던 것이다. 그의 약 20여 년에 걸친 스웨덴에서의 생활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유신체제와 5공화국

 

"당시 일본을 거쳐 스웨덴으로 들어갔는데, 그곳에서 처음으로 김대중 납치사건의 전말을 알게 되었어요. 국내에서는 '김대중 대통령 후보가 공산주의 활동을 하다 체포되었다'고 발표돼 '이상하다'는 생각만 하고 있었는데, 일본을 거쳐 가면서 그것이 '정보부에 의한 납치'였다는 사실을 알게 된 거죠."

 

그가 스웨덴에 정착한 그 다음해(1974년) 봄, 한국에서는 민청학년사건으로 함께 일하던 동료 선후배 들이 모두가 투옥되었고 이후 긴급조치 9호가 선포되었다. 그는 귀국을 할 수가 없었다. 그리고 1980년 광주항쟁을 짓밟고 들어선 5공화국이 1987년 6월 항쟁으로 무너지기까지 그는 스웨덴에서 '스웨덴한국민주화운동본부'를 결성해 스웨덴 동지들과 함께 북미와 유럽전선으로 이루어진 해외 기독교민주화운동 대열에서 활동하였다. 또한 1980년대 중반까지 SI의 사무총장과 연계해 한국대표로서 정보를 전달하는 역할을 맡게 되었다.

 

"가장 고통스러웠던 것은 '나 혼자'라는 생각보다도 세계 각지의 한국 민주화운동 단체에서 모인 그룹과 사람들 사이의 '갈등'이었어요. 서로 의심하면서 보수냐, 진보냐를 두고 다투고, 모두들 내가 '정통'이라면서 서로들 대화도 안 하는데, 그것만큼 저에게 큰 고통을 준 것은 없을 거예요."

 

그는 1981년 SI 마드리드 총회에 한국대표 자격으로 참가해 윤이상 선생을 만나 '읍소'를 한 경험이 있다고 한다. 언제까지 우리가 외면하고 대립하면서 살 것이냐고. 젊은 사람으로서 이러한 대립은 너무나 뼈아프다고. 이후 윤이상 선생은 신필균 이사장을 매우 '귀여워' 해 주셨다고 한다. 그는 선생이 준 음반(LP)을 아직도 소중하게 간직하고 있다고 했다.

 

스웨덴에서의 공직활동, 그리고 귀국

 

신필균 이사장은 스웨덴에서 민주화운동을 진행하면서도 1987년까지 스톡홀름대학에서 국제대학원과정과 사회학 석사, 그리고 박사과정(학위는 받지 않음)을 마쳤다. 그리고 1988년부터는 스웨덴에서 공직생활을 시작한다. 1987년 6월 항쟁으로 이제는 한국 민주화운동에서의 자신의 역할이 끝났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이후 그는 1995년까지 스웨덴 국가사회보험청 책임연구원, 스웨덴 스톡홀름 광역시 정보센터 컨설턴트, 스웨덴 스톡홀름 광역시 시의회 전문위원 등으로 일하면서 스웨덴의 복지정책들에 대해서 본격적인 경험을 쌓아가게 된다. 그리고 1995년 말 다시 한국으로 영구 귀국하게 된다.

 

"항상 머릿속에는 돌아가야 한다, 돌아가야 한다는 생각이 부채처럼 자리 잡고 있었어요."

 

 

이후 그는 한국크리스찬아카데미 사회교육원 원장, 지구를 위한 세계운동(GAP) 한국본부장, 대통령비서실 민정수석실 민정2 비서관, 정책기획수석실 시민사회 비서관, 한국장애인고용촉진공단 이사장, 사회복지공동모금회(CCK) 사무총장 등을 거쳐 2009년부터 지금까지 (사)녹색교통운동 이사장으로 활발한 활동을 벌여나가고 있다. 그 와중에서 그는 이명박 정부의 압박으로 8개월 동안이나 싸우다 본의 아니게 공동모금회 사무총장 직을 물러나기도 했다.

 

"서구에서는 정권이 바뀌어도 국민이 바라는 정책은 아무리 이념이 다른 정당이라고 하더라도 자기들 마음대로 바꾸는 법이 없어요. 국민에 대한 예의와 소통을 중시하는 자세 때문이지요. 그런데 국민들이 선거를 통해 선출한 전 정부에 대해 '좌파정부'나 '잃어버린 10년'이라 낙인찍고, 모든 정책을 '반대'로만 수행하려는 태도는 21세기라는 시대적 환경을 인식하지 못한, 매우 비민주적이면서도 근시안적인 태도예요."

 

'역주행' 이명박 정부의 과오

 

그는 이미 우리나라가 OECD 11위-13위를 오가는 국제적 위상을 가지고 있다고 강조했다.

 

"복지와 환경은 국제적 맥락을 따라야 하고 다문화 현상에서 통합적인 관용을 우선시해야 해요. 서로 다름을 인정하고 함께 가려는 노력이 민주주의의 기본이고 이에서 얻어지는 상승효과가 사회발전에 도움을 주는 것이죠"

 

그러나 이명박정부는 초기부터 '잃어버린 10년'을 강조하면서 전 정권에서 임명된 사람들을 '물갈이'했는데, 이는 정권적 차원을 떠나 국정운영의 측면에서 대단한 비효율적 결과를 가져왔다는 것이다.

 

"기업에서도 성과를 올리기 위한 경영조건 중 가장 중요한 것으로 직원의 인사이동의 안정성을 꼽고 있어요."

 

'좌파 척결'을 앞세운 이명박정부의 전폭적인 '물갈이' 정책이 오히려 조직의 혼란을 가져왔고, 이것은 또한 고스란히 국정운영의 혼란상으로 반영되고 말았다는 것이다.

 

"지난 10년 동안 이룬 것 중 가장 눈에 띄는 성과는 민주화(권위주의 타파: 관료체제의 변화, 보스중심의 정당체제 개혁)에 기반을 둔 문화의 다양성, 한마디로 말해 자유가 우리 사회문화 속에서 살아 있었던 것을 들 수 있어요. 창조와 창의를 중요시하고 다름을 인정한 것 때문에 가요계, 드라마, 영화 등 많은 영역에서 한류를 만들어낼 수 있었던 거예요. 젊음과 맥이 통하는 IT와 아이디어는 자유가 없이는 절대로 발전 불가능한 것이죠."

 

그런데 신필균 이사장은 이명박정부가 소수의 부자 중심의 사회(산업이전의 사회)로 다시 돌아가고 있는 것 같다면서, 지난 10년이 창조의 시대, 공조의 시대, 나눔의 시대, 기업의 사회적 책임 등 공동체에 대한 의식이 겨우 새싹으로 자라나고 있었던 시대라고 한다면, 지금은 이러한 싹들이 모두 잘려져 나가면서 새로운 '억새풀'이 다시 등장하고 있는 시대라고 강조했다.

 

'연합정치'는 새로운 밭갈이

 

"다시 밭갈이에 나서야죠."

 

신필균 이사장은 야5당의 '연합정치 실현'의 의의를 이렇게 설명했다.

 

"다원화된 현대 사회에서 하나의 사회세력과 이를 대변하는 하나의 정당이 전체 국정을 이끌어가는 것은 쉽지도 않을 뿐만 아니라 바람직한 일도 아니에요. 현재 유럽에서는 연합정치와 연합정권이 보편적 모델로 등장하고 있는데, 한국에서도 이제 그런 실험을 할 때가 왔다고 봐요. 특히나 현 정권에 대한 강력한 견제세력이 매우 필요함에도 힘이 약한 현재의 야당들을 보면, 선거연합은 어느 특정정당을 위하는 것이 아니라 야당의 전체적인 세력화를 이루는 일로 매우 시급한 과제이죠."

 

그러나 현재 야5당은 연합정치의 길로 가고 있다기보다는 현실정치의 이해득실만 더욱 중요시하면서 '이명박정부 심판'이라는 국민의 여망을 저버리는 길로 나서고 있는 것 같다.

 

"야5당은 국민을 실망시키지 말고, 또한 향후 연합정치의 미래(2012년 연립정부의 수립)까지 생각하여 다소간 불만스럽더라도 협상을 반드시 성사시켜야 해요. 양보란 항상 강자가, 혹은 나눌 것이 있는 측에서 할 수 있는 일인 만큼 가장 큰 정치세력인 민주당이 더 큰 책임감을 가져야만 해요. 지금까지 협상과정에서 보여 왔던 안하무인의 패권주의적인 모습은 버려야만 한다는 것이죠. 물론 진보신당을 비롯한 소수정당들도 현재의 이익을 필사적으로 고수하는 것보다 대의에 따랐다는 정당성과 이를 통한 대중의 인정과 지지 속에서 자신을 키워나가는 안목을 가져야만 하겠지요. 진보의 의미는 포용과 연대에 있는 것인데, 여기서 독불장군의 모습을 보인다면 그것은 진보의 가치를 훼손하는 일이 될 거예요."

 

다행히도 신필균 이사장과의 인터뷰를 끝내고 난 이후인 3월30일 민주당 최고위원회에서의 수용거부로 인해 중단 위기에 처했던 야4당의 선거연합(연합정치 실현) 협상이 재개된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그러나 이미 한 번 협상의 틀이 깨어졌던 경험이 있었던 것처럼 재개된 협상이 최종타결로 이어질지는 누구도 장담을 할 수 없는 형편일 것이다.

 

"현재 우리나라가 처한 가장 중요한 정치적 사안이 정치와 사회전반에서 집권세력의 독주와 오만을 견제하는 일이라고 본다면 각 당의 사소한 차이를 극복하는 것이 불가능하지는 않을 거예요. 선거기간 동안의 어느 시점에서라도 (야5당이) 양보의 선언으로 국민을 감동시켜주기를 간절히 바라고 있어요."

 

신필균 이사장은 아직도 야5당의 연합정치 실현이라는 '희망과대안'의 목표를 포기하지 않고 있는 듯 보였다.

 

그의 꿈, 그의 소망

 

 

"세계사적인 측면에서 한 국가의 정당들의 면모를 살펴보면 산업사회를 거치면서 진보정당과 보수정당이 함께 자라는 것이 순례이며, 이를 통해 국민의 생활상(복지)이 정치의 중심에 서게 되는 것인데, 우리의 근대사 100년은 항상 외세에 억눌려 왔고, 또한 해방 후 남북분단을 거치면서 (특히 진보라는) 다양성 자체를 역적으로 몰아오곤 했어요."

 

그러다보니 우리(국민)는 정치가 국민 생활현장의 연속선상에 위치한 매우 중요한 영역이라기보다는 권력집단 간의 이전투구, 즉 더러운 '싸움'이라는 잘못된 인식을 하게 된 것이라고 그는 강조했다. 이제 정치가 국민을 위한 '생활정치'라는 본연의 역할을 되찾게 하기 위해서라도 진보정당과 보수정당이 함께 국민들 속에 자리를 잡아야 할 때가 되었고, 이를 위한 첫 걸음이 바로 '비대한' 정부여당의 오만을 가능케 한 일당독주를 멈추게 할 수 있는 유일한 방책인 야5당의 연합정치를 실현하는 것이라고 그는 덧붙였다.

 

"이번에 야5당이 연합정치를 실현해내는 것은 한국 정치사에서 매우 획기적인 일이 될 거예요. 그저 '마주 보고 달리는 기차'처럼 치열하게 맞서 '대결'의 정치만 벌여왔던 우리 정치사에서 '정책'과 '가치'를 중심으로 한 협상(대화)과 타협의 정치로 가는 길을 여는 셈이 되는 것이니까요. 이를 기반으로 우리의 정치는 장기적으로 보수정당과 진보정당이 함께 양립하면서 국민들의 생활(복지)을 중심에 놓고 경쟁하는 새로운 시대가 열리게 될 거예요."

 

그는 자신이 직접적으로 진보정당을 지지하는 것은 아니지만 '희망과대안'과 함께 현재 '진보정당의 통합을 위한 모임'에도 참석하고 있는 것은 바로 이런 이유라고 강조했다.

 

"다원화된 현대사회에서 하나의 사회세력과 이를 대변하는 하나의 정당이 전체 국정을 이끌어가는 것은 가능한 일이 아니예요."

 

그가 이명박 정부의 일방독주를 강력하게 비판하면서 '희망과대안'을 통해 야5당의 연합정치 실현을 위해 지금 현재 온 힘을 다하고 있는 것, 그것은 바로 '진보'와 '보수'의 지독한 '이념' 중심의 양자대결을 뛰어넘어, '진보'와 '보수'의 건전한 민주적 '경쟁'을 통해 국민의 생활을 기반으로 한 '정책'중심의 '생활정치'를 실현하기 위해서였다. 최근 지방선거와 관련된 논점으로 '4대강 반대'만이 아니라 '무상급식' 문제가 전국적 의제로 떠오르고 있는 것은 그런 의미에서 매우 바람직한 일인 셈이다.

 

"젊은 사람들이 좀 더 정치에 관심을 갖고, 특히나 내가 사는 지역에 관심을 갖고 미래를 위해 선거에 참여하는 적극성을 가져주었으면 좋겠어요. 또한 정치가 우리 국민들의 삶에 매우 커다란 영향을 미치고 있음을 자각하고, 복지와 환경의 중요성과 교육의 기회가 골고루 주어질 때 지역사회의 발전과 더불어 우리 사회가 발전해나갈 수 있다는 선진 사례를 생각해 기성세대와는 다른 합리적 사고를 갖추어나가길 바라요."

 

일찍이 시민운동과 국내외에서 공공기간의 행정경험을 두루 거친 신필균 이사장, 그의 꿈과 소망은 젊은이들에게, 그리고 우리의 보다 나은 '미래'에 있었다.


태그:#신필균, #지방선거, #선거연합, #야권연대, #희망과대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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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망과대안은 대안적 메시지 생산 등을 통해 민주주의의 균형회복과 좋은 정치세력 형성에 기여하기 위한 목적으로 2009년 10월 19일 학계, 종교계, 시민사회 인사 113명이 참여하여 창립된 모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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