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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삼성동 봉은사 주지 명진 스님. (자료사진)
 서울 삼성동 봉은사 주지 명진 스님. (자료사진)
ⓒ 권우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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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道) 잘 닦고 있다 주지 맡아서 똥 밟은 기분이었지. 허허허…."

지난 2007년 3월 서울 강남의 봉은사를 불쑥 찾아간 <동아일보> 기자에게 명진 스님이 던진 첫마디였다. 법랍(法臘) 30년의 이판승(理判僧, 속세를 떠나 수도에만 전념하는 중)이 졸지에 사판승(事判僧, 절의 재물과 사무를 맡아 관리하는 중)이 되었으니 '똥 밟은 기분'이 들 법도 했다.

사실 명진 스님이 2006년 11월 천년고찰 봉은사 주지에 취임한 것은 대한불교 조계종의 '일대 사건'이었다. 강남 노른자위 땅에 들어서 있는 봉은사는 사판승이라면 누구나 한 번쯤 맡아보고 싶어 하는 큰절이다. 그런데 명진은 사판 경력이라고는 학승들에게 이끌려 1987년 서울 개운사 주지를 1년 한 것이 전부인 선승(禪僧)이었다.

"도(道) 잘 닦고 있다 주지 맡아서 똥 밟은 기분이었지"

그는 성철 스님이 있던 해인사 백련암에서 출가했다. 이후 해인사와 경북 문경 봉암사 선방에서만 20여 년 동안 한 해도 거르지 않고 동안거-하안거를 수행하면서 선승들 말고는 아무도 못 들어오게 봉암사 산문을 폐쇄해 1940년대 봉암사 결사의 선맥(禪脈)을 다시 세우는 데 앞장섰다. 봉암사는 지금도 1년에 딱 한 번 '부처님 오신 날'에만 산문을 여는 전통을 고수하고 있다. 그런 선승에게 1년 예산이 100억 원이 넘는 큰절의 살림을 맡긴 것이다.

더구나 명진 스님은 지관 총무원장 선출 당시에 반대편에 섰다. 그런데 당시 지관 총무원장은 자신을 총무원장으로 추대했던 스님들을 주지로 보내지 않고 오히려 반대편에 섰던 '반골' 스님을 서울 강남 한복판의 큰절에 보냈다. 명진 스님은 많은 스님들이 가고 싶어 하는 부자동네 큰절의 주지로 자신을 보낸 것을 '운명'으로 받아들였다. 그는 기자에게 이런 말을 했다.

"봉은사 주지로 취임하기 전에 강원도에 갔다가 차가 뒤집히는 큰 사고를 당했다. 가까스로 정신을 차려보니 다행히 사지는 멀쩡했다. 그때 차에서 거꾸로 기어 나와 뒤집힌 차와 내 모습을 휴대폰으로 찍었다. 뒤집힌 승용차 사진은 지금도 내 휴대폰 바탕화면에 있다."

명진 스님 휴대폰 바탕화면의 뒤집힌 승용차 사진은 봉은사 개혁을 통한 불교 개혁이 자신의 '운명'임을 한시도 잊지 않으려는 다짐이다. 실제로 그는 임기 4년의 주지로 취임한 이후, 신도들에게 산문 밖을 나가지 않는 천일기도를 약속해 이를 실천했다. 또 봉은사의 재정을 투명하게 공개하고 불전함의 관리를 신도들에게 맡겨 1년 시주액을 80억 원에서 125억 원으로 늘렸으며, 사찰을 인근 시민들에게 개방해 일요법회 참석자 수를 150명에서 1000여 명으로 크게 늘리는 성과를 거뒀다.

그런 명진 스님이 봉은사를 개혁하다가 다시 '똥 밟은 기분'이 되었다. 부자 동네에서 현 정권을 비판하는 명진 스님에 대한 안상수 한나라당 원내대표의 '좌파 낙인' 때문이다. 명진 스님은 21일 오전 일요법회에서 1500여 명의 신도들 앞에서 이렇게 폭탄 선언을 했다.

법회 중인 명진 스님
 법회 중인 명진 스님
ⓒ 김도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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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에 안 들면 '좌파 낙인' 찍어댄 안상수의 '전과'

"(자승 조계종 총무원장 취임 직후인 지난해) 11월 13일 아침 프라자호텔 식당에서 자승 총무원장과 안상수 한나라당 원내대표, 고흥길 한나라당 의원이 만났으며, 이 자리에서 안상수 대표가 '현 정권에 저렇게 비판적인 강남 부자 절의 주지를 그냥 놔둬서 쓰겠느냐'라고 말했다. 또 11월 30일 불광사 회주 지홍 스님과 함께 자승 총무원장을 만난 자리에서도 자승 스님으로부터 안상수 대표가 '좌파 주지' 운운했다는 얘기를 들었다."

집권여당의 원내대표가 조계종 총무원장을 만나 정권에 비판적인 주지를 교체하라는 압력을 넣은 것이 사실이라면, 이는 정교분리의 원칙을 천명한 대한민국 헌법을 유린하는 행위다. 안 원내대표는 이를 부인했다. 그러나 '진실게임'을 하는 정치인과 종교인 중에서 어느 쪽 말을 더 믿을지는 불문가지다. 더구나 안 원내대표에게는 아무에게나 '좌파 낙인'을 찍어온 '전과'가 있다. 불과 며칠 전에도 그는 이렇게 '좌파 낙인'을 찍어댔다.

"이런 잘못된 교육에 의해서 대한민국 정체성 자체를 부정하는 많은 세력들이 생겨나고 있고, 그야말로 극악무도한 흉악범죄들, 아동 성폭력 범죄들까지 생겨나고 있는 것이다."

안 원내대표는 지난 16일 '바른교육국민연합' 창립대회에 참석해 한 축사에서 "10년간의 좌파정권 기간 동안에 편향된 교육이 이루어졌다"면서 이렇게 말했다. 그는 17일 보도자료를 내고 <오마이TV>가 당일 단독 보도한 <안상수 "좌파 교육 때문에 성폭력 범죄 발생"> 제하의 기사에 대해 발언 취지가 왜곡됐다고 해명했지만 정정보도를 청구하거나 허위 사실에 의한 명예훼손을 주장하지는 않았다.

안상수 원내대표가 좌파 낙인을 남용한 것은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다. 그러나 원내사령탑인 그가 굳이 본분을 넘어서 교육계에 이어 종교계에까지 '좌파 낙인'을 찍어대는 것은 지방선거를 앞두고 우파를 결집해 승리하려는, 눈에 뻔히 보이는 얄팍한 전술이다.

대한민국에서 좌파와 우파를 나누는 기준은 다름 아닌 '북한'이다. 북한을 어떻게 바라보느냐에 따라 이념의 지형이 결정돼 왔다. 한국에서 좌파는 곧 사회주의자고, 사회주의자는 곧 공산주의자다. 결국 좌파는 북한 공산주의자와 동격이 된다. 그래서 일단 좌파로 낙인찍히면 없는 버선목을 뒤집어서라도 좌파가 아님을 입증해야 한다.

명진 스님의 '불행한 가족사'

조계종 총무원이 서울 봉은사를 직영사찰로 전환하기로 한 과정에 한나라당 안상수 원내대표의 외압이 있었다는 봉은사 주지 명진스님의 주장이 파문을 일으키고 있는 가운데, 사실무근이라며 강하게 부인했던 안 원내대표가 22일 오전 최고위원회의에선 이 사안에 대해 한마디 언급도 하지 않은 채 자리를 먼저 뜨고 있다.
▲ 안상수, '외압설' 언급 피한 채 회의도중 퇴장 조계종 총무원이 서울 봉은사를 직영사찰로 전환하기로 한 과정에 한나라당 안상수 원내대표의 외압이 있었다는 봉은사 주지 명진스님의 주장이 파문을 일으키고 있는 가운데, 사실무근이라며 강하게 부인했던 안 원내대표가 22일 오전 최고위원회의에선 이 사안에 대해 한마디 언급도 하지 않은 채 자리를 먼저 뜨고 있다.
ⓒ 남소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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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 원내대표는 명진 스님이 김대중 정부 시절인 2000년부터 조계종 민족공동체추진본부의 상임집행위원장과 본부장 등으로 대북 교류를 주도한 것을 문제 삼아 좌파 낙인을 찍은 듯하다. 명진 스님은 법문에서 이렇게 반문했다.

"종교인 입장에서 남과 북이 평화로운 가운데 서로 오가고, 서로 오판해 전쟁이 나서는 안 된다는 입장에서 조계종 대표로 북한을 오갔다. 북쪽의 경우 이치에 안 맞고 억지소리 하는 것이 많지만 다 굶겨 죽게 내버려두는 것은 아니라고 본다. 이러한 생각을 가진 것이 좌파인가?"

명진 스님에게는 불행한 가족사가 있다. 여섯 살에 어머니를 여의고, 하나뿐인 동생은 스무 살 때 해군 YTL(항내예인선)함 침몰 사고로 죽었다. 1974년 2월 22일 당시 해군 및 해경 신병 311명과 승무원 5명 등 316명을 태운 해군 소속 YTL함은 이순신 장군의 위패를 모신 통영 충렬사를 참배하고 돌아가던 중 통영 앞바다에서 돌풍으로 침몰했다. 이 사고로 배에 타고 있던 해군과 해경 장병 316명 가운데 159명이 한꺼번에 목숨(해군 109명, 해경 50명)을 잃었다.

사고의 배경은 탑승인원이 정원(150명)을 배 이상 초과한 상황에서 불순한 기상조건으로 구조활동이 부진했기 때문인 것으로 지적됐다. 국가의 부름을 받은 생때같은 젊은이 159명이 집단 사고사를 당했으니 정상국가라면 정권이 퇴진할 사안이었다. 그러나 유신독재 시절의 병영국가였기에 쉬쉬하는 가운데 아무도 책임지지 않았다.

책임은커녕 제사조차 지내지 못했다. 해군은 이순신 장군이 왜군을 물리친 통영 앞바다에서 벌어진 부끄러운 사건이 알려지는 것을 꺼려 위령제조차 지내지 않았다. 그러다가 김대중 정부가 들어선 1998년부터 통영해군전우회 주관으로 민관군 합동위령제를 개최해 오고 있다. 스님의 동생은 국립묘지에 안치돼 있다.

석연찮은 병역면제자와 맹호부대 참전용사 중에 누가 더 우파일까?

조계종 총무원이 서울 봉은사를 직영사찰로 전환하기로 한 과정에 한나라당 안상수 원내대표의 외압이 있었다는 봉은사 주지 명진스님의 주장이 파문을 일으키고 있는 가운데, 사실무근이라며 강하게 부인했던 안 원내대표가 22일 오전 최고위원회의에 참석했으나 이 사안에 대해 한마디 언급도 하지 않았다.
 조계종 총무원이 서울 봉은사를 직영사찰로 전환하기로 한 과정에 한나라당 안상수 원내대표의 외압이 있었다는 봉은사 주지 명진스님의 주장이 파문을 일으키고 있는 가운데, 사실무근이라며 강하게 부인했던 안 원내대표가 22일 오전 최고위원회의에 참석했으나 이 사안에 대해 한마디 언급도 하지 않았다.
ⓒ 남소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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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명진 스님이 좌파가 아님을 입증하기 위해 굳이 '불행한 가족사'를 들먹일 필요도 없다. 오죽 억울했으면 명진 스님이 주위에 '안상수 대표는 병역도 안 한 사람이고 나는 맹호부대원으로 월남전에 참전했는데 도무지 누가 더 좌파냐'라고 항변했을까 싶다.

그러나 이쯤 되면 '공산주의로부터 자유진영을 구한' 베트남전 참전용사를 좌파로 낙인찍은 우파의 가치는 무엇인지 되묻지 않을 수 없다. 멀리 갈 것도 없다. 한나라당 안에서조차 이명박 정부 외교안보라인의 안보의식을 걱정하는 목소리가 크다.

"정말 우리 외교·안보 라인의 안보 의식에 큰 문제가 있다고 생각한다. 특히 우리 외교·안보 라인의 성층권에 군 미필자가 너무 많다. 국무총리 군대 안 갔다 와, 청와대 비서실장 군대 안 갔다 와, 청와대 정책실장 군대 안 갔다 와, 청와대 정무수석 군대 안 갔다 와, 국정원장 군대 안 갔다 와, 그래서 지식과 두뇌는 있어도 경험이라는 필드 매뉴얼이 약한 외교·안보 라인이 아닌가 이렇게 생각한다."

한나라당 구상찬 의원이 지난해 11월 6일 국회 본회의 외교통일안보 분야 대정부질의에서 한 말이다. 그는 국군통수권자인 대통령의 체면을 고려해서인지, 정작 이명박 대통령의 군 미필 사실은 적시하지 않았다.

사실 눈을 씻고 찾아도 지구상에 이런 '이상한 우파의 나라'는 없다. 국가안보라는 우파 최고의 가치를 망각한 가짜 우파들이 권력의 정점과 안보라인을 독점하는 이런 정부는 기네스북 감이다. 진짜 우파로서는 '똥 밟은 기분'이 들 수밖에 없다. 그래서일까? 정통우파임을 자임하는 이상돈 교수(중앙대 법대)는 21일 자신의 블로그에 이렇게 썼다.

"안상수씨가 석연치 않은 이유로 병역을 하지 않았다는 사실은 널리 알려진 일이다. 반면 명진 스님은 베트남 전쟁이 한창일 때 맹호부대로 베트남에 갔다 오셨다. 그렇다면 도무지 누가 더 좌파에 가까운가? 좌파와 우파를 나누는 기준 중의 하나는 국가 안보에 대한 충실성인데, 그렇다면 명진 스님이 오히려 우파라고 말할 수 있지 않을까?

내가 제일 보기 역겨운 모습은 자신은 병역을 안 한 공직자들이 검은 옷 입고 국립묘지에 가서 엄숙한 표정 지으면서 분향하는 꼴이다. 그것이 내가 현 정권을 싫어 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도무지 대통령, 국무총리, 국정원장, 여당 원내대표가 모두 병역면제인 경우가 우리 말고 또 있던가."

'큰집'에서 조인트 까이고 매 맞아야 공영방송 사장 되는 더러운 세상, '큰절'에서 정권 비판하는 스님은 좌파로 낙인찍히는 '이상한 우파의 나라'에 사는 필자도 영 '똥 밟은 기분'이다.


태그:#명진, #봉은사, #안상수, #좌파 낙인, #진실게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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