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세기가 저물어 가던 1999년 연말, 대중가요 각 분야에서 20세기 최고를 선정한 조사 결과가 어떤 월간지를 통해 발표되었다. 현업 작사가와 작곡가 백 명을 대상으로 한 설문에서 20세기 한국 대중가요 최고의 작곡가로 선정된 사람이 바로 지난 14일에 타계한 박춘석이었다.

한 세기를 마무리하는 시점에서 어떤 분야의 최고로 선정되기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런데도 박춘석이 많은 이들의 지지를 받은 데에는 당연히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다. 전체 작품 수가 많은 것은 물론이고, 히트를 기록한 곡도 적지 않다. 1955년에 작곡가로서 공식적으로 데뷔한 이후 30년 넘는 동안 히트곡이 끊이지 않았던 점 역시 아무나 간단히 이룰 수 있는 일이 아니다.

게다가 박춘석의 음악은 그 폭이 다른 어떤 대중가요 작곡가보다도 넓었다. 같은 조사에서 최고의 가수로 선정된 조용필 또한 그러했지만, 특정 장르에 치우치지 않은 다양한 노래로 오랫동안 대중을 매료시킨 점은 그의 두드러진 강점이었다. 일본에서 1980년 이전 한국 대중가요 역사를 정리해 낸 박찬호씨는 최근 저서에서 그런 박춘석에 대해 '재즈에서 트로트까지'라는 수식을 붙이기도 했다.

1930년에 태어난 박춘석은 이미 10대 후반에 재즈 피아노의 명수로 이름을 날렸다고 한다. 실제 1949년 신문에 실린 공연 광고에서는 '서울스윙킹밴드'의 일원으로 송민영, 손석우, 전봉수(=전오승) 등 이후 1950년대 대중음악계를 주름잡은 이들과 함께 출연한 박춘석의 이름을 확인할 수 있다. 그의 나이 만 스무 살도 되지 않은 때였다.

1949년 신문 광고에 실린 서울스윙킹밴드 멤버들. 하단 가운데에 박춘석의 이름이 보인다.
▲ 서울스윙킹밴드 광고 1949년 신문 광고에 실린 서울스윙킹밴드 멤버들. 하단 가운데에 박춘석의 이름이 보인다.
ⓒ 이준희

관련사진보기


1950년대 중반에도 선구적인 모던재즈 그룹 '식스 자이언츠'의 일원으로 활발한 연주 활동을 하며, 한편으로 자신의 이름을 건 악단을 이끌었던 박춘석은, 바로 그 무렵 손꼽힐 만한 대표곡으로 전형적인 트로트풍의 <비 내리는 호남선>을 발표하기도 했다. 그의 폭넓은 음악적 행보는 이미 활동 초기부터 뚜렷했던 것이다.

가수 이미자의 인기에 힘입어 트로트의 재흥 분위기가 완연해진 1960년대 중후반 무렵, 그때는 곧 숱한 작품이 연이어 히트한 작곡가 박춘석의 전성기이기도 했다. 당시 상황을 두고 일각에서는 박춘석이 트로트로 전향(?)한 것이다, 트로트에 투항(?)한 것이다, 은근히 부정적인 묘사를 하기도 했지만, 오히려 그 모습을 통해 대중음악가 박춘석이 얼마나 빼어난지를 볼 수 있기도 하다.

그냥 대중의 입맛에 맞는 음악을 만들거나 오로지 자신의 음악적 입장을 고수하거나, 둘 중에 하나를 택하기는 차라리 쉬운 일이다. 자신의 의지를 포기하지 않는 동시에 대중의 취향을 외면하지 않는 것이야말로 도달하기 쉽지는 않지만 그래도 나아가지 않을 수 없는 대중음악가의 지향점일 것이다. 분명 박춘석은 누구보다도 그 지점 가까이에 있었다. '좌 미자 우 패티'의 경지에 이른 작곡가가 달리 또 뉘 있었던가.

20세기 한국 최고의 대중가요 작곡가로 거론될 만큼 음악적 성취를 이룬 동시에, 문학적으로도 뛰어난 감각을 발휘해 자신의 많은 작품에 직접 가사를 붙이기도 한 박춘석은, 때로 가수로서도 대중 앞에 나섰다. 혼자만의 느낌일 수도 있겠지만, 그가 직접 부른 노래를 듣고 있노라면 고독을 음악으로 달래고 나아가 즐기기도 했던 자연인 박춘석의 면모가 보이는 듯하다.

1985년에 박춘석 작곡생활 30주년 기념으로 발매된 <박춘석 가요극장>.
▲ 박춘석 가요극장 1985년에 박춘석 작곡생활 30주년 기념으로 발매된 <박춘석 가요극장>.
ⓒ 이준희

관련사진보기


지난 1985년에 작곡생활 30주년 기념으로 직접 녹음한 앨범 <박춘석 가요극장>을 보면, 전체 열한 곡 가운데 뜻밖에도 박춘석의 작품이 아닌 것이 세 곡 들어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선배 작곡가 이재호의 작품인 <나그네 설움>과 <아리랑><매화타령>이다. 맨 마지막 곡으로, 낭창낭창 흥겨운 굿거리장단에 얹어 부른 <매화타령>의 사설 첫머리가 예사롭지 않게 심금을 울린다. '인간 이별 만사 중에 독수공방이 상사난이란다'.  

이제 장례도 끝났고, 박춘석은 노래를 남기고 떠났다.


태그:#박춘석, #작곡가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노래를 찾는 사람, 노래로 역사를 쓰는 사람, 노래로 세상을 보는 사람.




독자의견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