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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내는 기분이 계속 고조되어 있었다. 사람 많은 도쿄를 아침에 떠나 오후에는 가족과 함께 홋카이도(北海道) 노보리베쓰(登別)의 산길을 편안하게 걷고 있었기 때문이다. 한여름이지만 홋카이도의 산 위에 부는 바람은 산들거리기만 했다. 우리는 아내가 좋아하는 쾌적한 여행 속에 있었다.

 

"오늘은 정말 여행을 다니는 기분이야. 가족끼리 산 속에 소풍을 나온 것 같아!"

"정말, 도쿄와는 완전히 다르지. 으, 온몸에 느껴지는 이 피톤치드! 공기가 너무 신선해. 여름인데도 너무 시원해."

 

산길을 따라 노보리베쓰 천연족탕 가는 길의 안내판이 계속 설치되어 있었다. 일본답게 친절한 안내판 덕분에 천연족탕 찾아가는 길이 어렵지는 않다. 가는 내내 홋카이도 깊은 산속의 풍경도 좋고 계곡의 물 흐르는 소리는 마음을 온통 상쾌하게 한다.

 

천연족탕으로 이어지는 개천은 온천수가 용솟음치는 오유누마(大湯) 호수에서부터 흘러내려오고 있었다. 우리는 그 오유누마 천을 따라 산길을 조금씩 아래로 내려갔다. 오유누마 천은 수증기가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신비스럽기 그지없는 곳이었다. 온천수가 흘러내려 계곡의 바위는 황이 눌러 붙어 짙은 황토색을 띠고 있었고, 계곡수는 희뿌연 회색빛으로 흘러내리고 있었다.

 

 

조금 더 내려가니 사람들이 걸터앉아서 계곡물에 발을 담그고 있는 곳이 보였다. 이곳이 바로 천연족탕이었다. 계곡 위에서 끊임없이 온천수가 내려오고 있었다. 졸졸 흐르는 계곡물에서 온천수가 뜨겁다는 것을 알려주려는 듯이 김이 모락모락 올라오고 있었다. 우리나라에서는 도저히 볼 수 없는 이국적인 풍경이다.

 

오유누마 호수의 바닥에서 끓어오른 물이 조금씩 넘쳐서 이 계곡에 뜨거운 물을 공급하고 있는 것이다. 호수의 물이 언제 끓어오르고 넘치는지는 정해져 있지 않지만 호수물이 많이 끓어올라 호수가 넘치면 이 천연족탕에 공급되는 온천수도 많아지고 물의 온도도 상당히 뜨거워진다고 한다.

 

나는 이곳까지 산길에 취해서 걸어오고 있었다. 천연족탕에 도착해 곰곰이 생각해 보니 노보리베쓰 마을에서부터 이 천연족탕까지 꽤 걸었다. 사진기에 기록된 사진을 보니 약 1시간 반을 걸었다. 길에 취해 걸으니 얼마 동안 걸었는지도 모르고 있었던 것이다. 생각해 보니 산길을 오르내린 발이 조금 피곤했다.

 

천연족탕에는 이미 몇 명의 가족들이 이곳저곳에 앉아서 족욕을 하고 있었다. 족욕을 할 수 있도록 계곡의 가장자리에는 자작나무를 마치 뗏목처럼 잘라서 엮어 놓은 자리가 마련되어 있었다. 나무계단을 내려가자 계곡의 공기에서 온천수의 따뜻한 온기가 느껴졌다. 나와 아내, 딸은 그 나무의자 위에 걸터앉았다. 계곡 가장 위쪽에는 부부로 보이는 남녀가 앉아 있었지만 우리 가족의 자리도 계곡에 발을 올려놓기에는 아주 좋은 자리였다.

 

나는 오늘도 수고한 운동화를 바로 옆의 나무 그루터기 위에 올려놓고 양말도 벗어서 운동화 안에 꾸겨 넣었다. 나무 그루터기 위에는 누군가가 계곡의 검은 모래를 퍼 올려서 발라놓았다. 검은 모래가 말라붙은 모습이 마치 석탄가루를 발라놓은 것 같았다. 주변에는 음료수와 가방을 놔둘 수 있는 작은 나무탁자도 뗏목의자 위에 올려져 있었다. 여행객들이 짐을 편하게 올려놓도록 배려한 것이다.

 

 

손을 먼저 온천수 계곡에 담가보았다. 너무나 따뜻했다. 나는 졸졸 흐르는 작은 계곡의 물 속으로 발을 얼른 담가보았다. 물은 목욕탕의 약한 온탕 정도로 따뜻했다. 약간 뜨겁다 싶기도 했지만 시간이 얼마 지나지 않아 나의 발은 완전히 적응을 했다.

 

발가락 사이로 온천수가 이리 저리 빠져나가고 있었다. 온몸의 피가 발가락으로 모였다가 다시 나가는 느낌이다. 발에 쌓였던 피로가 점점 달아나면서 발이 가벼워지고 몸이 가뿐해졌다. 내가 언제 지쳤었는지도 모르겠다.

 

인공족탕 같이 고여 있는 물속에 발을 담근 것이 아니라 물이 흘러가면서 발에 계속 자극을 주고 있어서 너무 시원했다. 나는 이 온천수 물에 침을 맞고 있는 것같이 움찔거리는 즐거움을 맛보았다. 느낌이 아주 좋았다. 나는 작은 폭포처럼 떨어지는 온천수에 발을 대 보았다. 산 속을 걷느라 고생한 발이 홋카이도의 따뜻한 온천수 안에서 호강을 하고 있었다.

 

계곡의 바닥에는 작은 자갈돌들이 조금 있고 대부분 곱고 가는 모래가 깔려 있었다. 모래를 손으로 집어 들어 보았다. 굵기는 보통 모래와 비슷했지만 모래의 색이 마치 갯벌의 뻘흙과 같이 새까맣다. 발로 모래 사이를 헤집고 다니다가 감촉 좋은 모래 속으로 발을 파묻어보았다. 나는 천연 머드 속에 마사지를 하듯이 발을 문질렀다. 발톱 속으로 모래가 검은 때같이 끼었다. 개구리의 발가락같이 발가락을 쫙 벌려서 펼치니 시원한 온천물살이 발가락을 흐르며 검은 모래를 싣고 가면서 마음도 상쾌해진다.

 

 

우리 가족 앞쪽의 젊은 부부는 천연족탕에 한참 동안 발을 담그고 있는 것 같았다. 그들은 말을 많이 하지 않았다. 약간 어색한 듯 하면서도 함께 편히 쉬고 있었다. 자꾸 계곡 위의 조그만 폭포를 보고 있으려니 그들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나는 그들이 아마도 이 시원한 온천의 계곡을 찾아온 젊은 부부일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들은 별 말이 없이 김이 모락모락 올라오는 온천수 계곡을 응시하고 있었다.

 

잠시 후 나는 그들이 이야기를 나누는 소리를 듣고 깜짝 놀랐다. 그들이 저 동해 바다 건너의 한국어를 사용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홋카이도로 신혼여행을 온 신혼부부였던 것이다. 요새는 왜 이리 한국사람과 일본사람이 잘 구별되지 않는지 모르겠다. 과거 일본여행 시에는 한국여행자는 탁 보면 알 수 있었는데 말이다. 그만큼 우리나라 경제가 발전하여 일본사람에 비해 유행도 뒤지지 않고 더욱 세련되어진 때문인 것 같다.

 

"아! 한국에서 오셨어요? 신혼여행 나오셨어요?"

"네, 신부랑 노보리베쓰에 신혼여행 와서 푹 쉬고 있어요. 노보리베쓰는 신혼 여행지로 참 편안한 곳인 것 같아요."

"참 한적하고 공기가 좋네요. 신혼여행은 이런 차분함 속에서 이야기를 나누어야 할 것 같아요."

"오랫동안 기억에 남을 것 같아요. 오늘까지 노보리베쓰에 있다가 내일은 삿포로로 올라가려고 합니다. 홋카이도를 차분히 둘러보려고 합니다."

"두 분만의 사진 찍어드릴까요?"

 

나는 온천수 계곡을 배경으로 그들의 신혼여행에 남길 사진을 찍어줬다. 내 머리 속에서는 신영이가 태어나기 전 아내와 함께 여름에 일본여행을 왔던 기억이 겹쳐졌다. 나는 그들이 예쁜 아이 낳고 행복하게 잘 살기를 진심으로 빌어줬다.

 

 

나는 정녕 이곳에서 여유로운 시간을 보냈다. 나는 뜨거운 온천수에 발을 담그고 홋카이도의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온천수의 뜨거운 온기에도 용케 잘 버티는 초록색 자작나무 잎이 계곡과 하늘을 뒤덮고 있었다.나뭇잎이 조금씩 살랑거릴 때마다 그 사이로 햇빛이 내려앉았다가 다시 사라진다.

 

여름날의 더위는 사라진 지 오래이다. 온천계곡에 담근 발은 몸의 상체로 따뜻함을 전달하지만 하늘을 향해 내놓은 얼굴은 시원하기만 했다. 나는 초록색 나무 아래에서 지구 속의 열을 받고 올라온 온천수를 영접하고 있었다. 어떻게 산 속 계곡에 뜨거운 물이 끊임없이 흐를 수 있을까? 계곡에는 찬물만 흐른다는 사실이 나의 선입견인가? 따뜻한 온천수에 발을 넣고 있으니 솔솔 잠이 왔다.

 

 

조금 있으니 천연족탕에 아이들을 동반한 일본인 가족들이 들어왔다. 그들은 천연족탕 안을 걸어 다니며 온천수를 즐기고 있었다. 두 가족의 아이들은 여러 명이었지만 소란스럽게 움직이지 않았다. 다른 사람들을 불편하게 하지 않는 공중도덕이 몸에 밴 아이들이었다. 엄마와 아이들은 낮은 소리로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온천의 나라에 사는 일본 사람들에게도 이 천연족탕은 신기한 듯 했다.

 

일어나고 싶지 않았지만 나는 일어섰다. 발톱 사이에 때같이 낀 검은 모래를 흐르는 물에 씻고 호텔에서 가지고 간 작은 수건으로 발을 닦았다. 새 양말까지 갈아 신으니 몸이 정갈해지고 한층 개운해 지는 느낌이다. 산 속에서는 새들이 울고 있었다. 그리고 계곡에는 계속 김이 모락모락 올라오고 있었다.

덧붙이는 글 | 이기사는 U포터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태그:#일본, #노보리베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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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와 외국을 여행하면서 생기는 한 지역에 대한 궁금증을 해소하는 지식을 공유하고자 하며, 한 지역에 나타난 사회/문화 현상의 이면을 파헤쳐보고자 기자회원으로 가입합니다. 저는 세계 50개국의 문화유산을 답사하였고, '우리는 지금 베트남/캄보디아/라오스로 간다(민서출판사)'를 출간하였으며, 근무 중인 회사의 사보에 10년 동안 세계기행을 연재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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