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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며칠 동안 (서울 뿐 아니라) 전주에도 내려가 사람들을 만났어요. 계속 이야기를 들었지요. 그러고는 '이것은 내가 이길 수밖에 없는 싸움이다'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나는 지는 싸움을 하지 않아요."

 

그의 표정은 담담했다. 말소리에선 자신감이 묻어났다. 그의 말은 에둘러 가지 않는다. 직설적인 화법도 여전했다. 유종일 한국개발연구원(KDI) 국제정책대학원 교수. 오는 6월에 있을 전국지방선거에 출사표를 던졌다. 그가 출마하는 곳은 전라북도 도지사. 물론 민주당 후보다.

 

지난 24일 오전 서울 여의도에서 그와 마주 앉았다. 당초 이명박 정부 2년의 경제정책에 대한 그의 생각을 들을 참이었다. 하지만 기대는 보기좋게 빗나갔다. 인터뷰 약속을 잡을 때 유 교수가 했던 "정말 하고 싶은 말이 있다"는 말에 어느 정도 예상은 했지만 말이다.

 

유 교수는 진보개혁적 성향의 경제학자로 널리 알려진 인물이다. 국민의 정부 뿐 아니라 참여정부 출범 때는 고(故) 노무현 전 대통령의 경제교사였다. 초기 경제정책 설계의 핵심 브레인이었다. 이 때문에 정치권 뿐 아니라 정부 입각 등 제의를 받았지만 고사했던 그였다.

 

"진보가 유능하다는 모습을 꼭 보여주고 싶다"

 

과거에 그랬던 그가 이제 '정치'라는 새로운 길에 뛰어든 것이다. 게다가 중앙 무대가 아닌 지방 선거에 뛰어들겠다고 나섰다. 유 교수의 결심을 듣고, 민주당의 중진급 정치인이 "차라리 서울시장에 나서라"고 말할 정도였다.

 

왜 그랬을까. 정년이 보장된 국책연구기관의 교수로, 방송과 신문 등 각종 언론으로부터 항상 주목을 받으면서 자신의 목소리를 내왔던 유 교수였다. 기자가 "왜 나서게 됐느냐"는 질문을 하기도 전에, 유 교수 스스로 먼저 고백했다. 잠시 그의 말을 들어보자.

 

"개인적으로 참 고민 많이 했어요. (웃으면서) 사실 작년 여름부터 내 주변으로부터 (지방선거 출마) 권유를 받기 시작했는데... 최근에 미국에서 돌아온 후 더 깊게 생각하고, 사람들 만나보고 하면서 (출마를) 결심하게 됐지요."

 

유 교수의 고백으로 기자의 질문순서는 자연스레 뒤죽박죽이 됐다. 인터뷰의 머리는 정치이야기로 풀어나갈 수밖에 없었다.

 

- 앞으로 선거까지 90일 정도 남았는데, (후보 출마) 선언이 늦지는 않았나요.

"(고개를 끄덕이며) 그렇게 말씀하시는 분들도 있었지요. 어떤 분은 아예 불가능하다고 말하기도 했어요."

 

- 그런데도 선거에 나와야겠다는 생각을 하도록 만든 무엇이 있었을 텐데.

"(잠시 생각한 후) 2월 중순에 미국에서 돌아오는 길에 많은 생각을 했어요. '직접 시민들을 만나보자'고 생각한 후, (전주 등에) 내려가서 이야기를 들었어요. 그러고는 좀 더 (선거에 대해) 확신을 갖게 됐지요."

 

유 교수는 지역에서 직접 듣고 느낀 것이 바로 "변화를 강하게 바라는 시민들의 마음이었다"고 말했다. 그는 이어 "불과 며칠 안 되는 시간 동안 내가 생각하는 전북지역의 문제와 발전방향에 대해 많은 분들이 큰 관심과 지지를 보여주셨다"면서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큰 반응이어서 나 자신도 놀랐다"고 말했다.

 

"조직, 연고 등 나의 약점이 곧 강점... 지는 싸움은 하지 않는다"

 

다시 그의 말이다.

 

"또 하나는, 국민들에게 '진보가 유능하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었어요. 단지 말로만 그럴듯한 정책이 아니라, 구체적인 성과를 내는 것이지요. 지역의 성장을 통해 좋은 일자리를 만들고, 복지와 삶의 질을 제대로 높이는 모습을 실질적으로 보여줘야 한다는 생각을 했던 거예요."

 

그럼에도, 선거는 현실이라는 의견도 많다. 김완주 지사의 현직 도지사로서 인지도 뿐만 아니라 조직 등의 문제도 유 교수 처지에선 여전히 쉽지 않은 것 또한 사실이다. 지난해 말까지 김완주 지사의 지지율은 40%대다. 유 교수는 "이제 시작"이라는 말로 크게 개의치 않는 눈치였다. 지난달 일부 여론조사에선 유 교수를 잠재적 후보군으로 놓았을 경우 10%에 가까운 지지율이 나오기도 했다. 공식 출마의사도 밝히지 않은 상태치고는 나쁘지 않은 수치였다.

 

- 현재 여론조사 등을 보면 김완주 도지사의 지지율이 상당히 높게 나오고 있는데요.

"(곧장) 아직까지는 그렇지요. 그동안 (김 지사에 맞설 만한) 마땅한 대안이 없었잖아요. 참신하고 능력 있는 인물이 나와 새로운 정책과 비전을 제시한다면 달라질 것으로 보는 거죠."

 

- 일부에선 여전히 지역 내 연고주의나 조직 동원 능력 등을 감안할 때, 현 지사를 넘어서기가 어려울 것이라는 시각도 있지 않나요.

"그런 면에서 본다면, 어쩌면 나의 약점이 될 수도 있어요. 집안 어른이나 나의 형(유종근 전 전라북도 도지사) 등을 보면 전혀 연고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결코 그런 부분을 내세우고 싶진 않아요. 하지만 반대로 그런 부분이 오히려 나에겐 강점이 될 수도 있지요."

 

- 어떤 면에서 강점이 될 수 있다는 것인가요.

"(물을 마시면서) 시민들의 의식 수준도 많이 높아졌고, 단지 선거 과정에서 친구나 의리 등을 찾는 시대는 아니지 않은가. 실제로 (지역에) 내려가서 시민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그래요. 또, 그동안 서울과 해외에서 교수생활을 하면서 쌓아온 정부와 국내외 기업, 학계, 문화계 등의 다양한 네트워크를 전북 발전을 위해 쓰겠다는 것이죠."

 

실제 서울대 경제학과를 나와 미국 하버드대 경제학 박사 출신인 그는 국내 뿐 아니라 미국을 비롯해 유럽, 일본 등에서 교수생활을 하면서 광범위한 인적 네트워크를 갖추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세종시 수정안에 충남도지사는 지사직도 내놓았는데..."

 

- 전북도민들은 새만금 사업에 관심이 높은 것 같은데요.

"새만금 사업이 시작된 지 20년이 흘렀지요. 방조제 길 놓는 데만 6년이 걸렸어요. 그러면서도 전혀 경제적 타당성도 없고, 환경문제 등 논란이 많은 말도 안 되는 4대강 사업에 3년 동안 22조 원을 쏟아 붓는다는 거 아니예요. (새만금이) 국책사업이지만, 더 이상 중앙정부 눈치만 보고 기대해서는 안 된다고 봐요."

 

- 정부는 새만금 개발을 당초보다 앞당겨서 추진하겠다고 하는데요.

"(고개를 흔들며) 글쎄요. 그동안 (중앙정부로부터) 그만큼 우롱당했으면 됐는데... 새만금은 전북이 스스로 비전을 갖고 앞장서서 중앙정부를 이끌어야 합니다. 더 이상 전북이나 한국의 새만금으로 보지 말고, 동아시아의 새만금으로 만들어야지요. 이것은 앞으로 한국경제의 미래를 위해서도 중요해요."

 

그는 출마를 결심한 이후, 계속 공부 중이라고 했다. 전북의 비전을 담은 구체적인 공약도 조만간 내놓을 것이라고 했다. 인터뷰를 진행하면서, 유 교수가 전북지역의 발전 밑그림을 이미 상당 부분 그려 놓은 것을 엿볼 수 있었다. 경제지사로서 국내외 기업의 투자유치 뿐 아니라 새만금을 비롯해 전북을 특성화하는 산업 전략 등이 거의 만들어진 상태다.

 

또 유 교수가 관심 있는 분야는 교육 문제. 현 정부가 추진 중인 '부잣집 자식들만을 위한 교육'이 아닌 창의성을 획기적으로 키우는 정책을 추진해나가겠다고 했다. 이를 위해 이번 선거에서 새롭게 뽑힐 신임 도 교육감과 적극적으로 협력해 나갈 것이라고 말했다.

 

유 교수는 특히 최근 정국의 최대 이슈인 세종시 논쟁을 두고, 상대적으로 전라북도가 자신의 목소리를 제대로 내지 못하고 있다고 비판했다. 그의 말이다.

 

"세종시라는 거대한 블랙홀이 지방의 각종 기업투자를 빨아들이는데, 전라북도도 마찬가지로 큰 피해자 아니예요. 그러면 (현 도지사가) 적극 나서서 반대 입장을 내야 하는 것 아닙니까. 충남도지사는 자신의 '도지사 직'까지 내던지면서 싸우는데 말이죠. 지역의 발전과 고용에 막대한 영향을 끼치는 사안에 대해 지역의 정치적 리더가 제대로 대응도 하지 못한다면, 주민들이 어떻게 믿고 따를 수 있겠어요."

 

"조직 동원 가능한 후보 경선은 민주당이 죽는 길... 호남에서 개혁 공천해야"

 

- 지방선거에 나가려면, 당장 민주당 내부의 당내 경선에서 이겨야 할 텐데요.

"(물을 마시면서) 그렇죠. 아직 당에서도 후보 선출 방식이 최종 확정되지 않은 것 같은데... 우선 민주당이 이번 선거를 통해 국민의 신뢰와 주목을 받기 위해선 과거 기득권에 안주하는 구태의연한 경선방식에서 철저히 탈피해야지요. 자신들의 텃밭이라는 호남지역부터 참신하고 개혁적인 인물 중심의 완전히 달라진 모습을 보여야 한다고 봐요."

 

- 세종시에 대해 말씀을 하셨지만, 이번 논쟁에서 '야당이 안 보인다'는 지적도 많은 것 같습니다.

"(답답하다는 듯이) 민주당의 현실이죠. 지도부 스스로 정말 대오각성해야 합니다. 현 정부 2년 동안 일자리는 줄고, 서민이나 중소기업 등은 더욱 어려워지면서 양극화는 더욱 심해져도 야당이 제대로 대안을 내놓지 못했잖아요. 최근 다시 지지율이 10%대 후반 수준까지 떨어졌던데..."

 

유 교수는 "민주당의 철저한 반성과 자기 혁신이 필요하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그는 야당이 제대로 된 대안세력으로 자리 잡지 못하고 있는 현실을 매우 안타까워했다. 인터뷰 내내 담담하게 자신의 생각을 내비치던 그의 목소리 톤이 어느새 높이 올라가 있었다. 열변에 가까웠다. 그의 이야기를 들어보자.

 

"민주당이 지난 대선과 총선에서 진 것은 민주정부 10년의 성과에만 머물러 있었을 뿐 잘못한 부분에 대한 철저한 반성을 하지 않았기 때문이에요. 물론 새로운 대안도 제시를 못했지요. 자신들의 기득권에 스스로 안주했던 것이지요."

 

유 교수의 말은 계속됐다.

 

"이번 지방선거는 제1 야당인 민주당으로선 '사느냐, 죽느냐'의 문제예요. 여기서 제대로 국민들로부터 신임을 받지 못하면, 호남 기득권 정당으로밖에 안 되지요. 그러면 민주당의 미래는 더 불투명해집니다. 국민들로부터 다시 바람을 일으키려면 변화가 있어야 해요. 변화는 사람을 바꾸는 것입니다. 텃밭인 호남부터 개혁적인 모습을 보여야지요."

 

인터뷰가 끝날 즈음, 그의 모습에선 예전 경제학자로서 유종일의 그림자는 많이 빠져 있었다. 그는 "정치 리더는 민심을 잘 수렴하고, 지도력과 정치력을 발휘해 미래의 비전을 국민들에게 실현시키는 것"이라고 말했다. 경제학자로서 넓고 순탄한 길을 놔두고, 한번도 가보지 않은 좁은 가시밭길을 선택한 그가 지방선거에서 새 바람을 불러일으키며 흥행카드로 성공할 수 있을지 자뭇 궁금해진다.

 


태그:#유종일, #지방선거, #민주당, #전라북도지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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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공황의 원인은 대중들이 경제를 너무 몰랐기 때문이다"(故 찰스 킨들버거 MIT경제학교수) 주로 경제 이야기를 다룹니다. 항상 배우고, 듣고, 생각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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