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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김진호 씨(42)는 초등학교에서 미술을 가르치는 선생이다. 20년 동안 교사 생활을 하면서 작품 활동도 부지런히 했다. 개인 전시회만 10번을 했는데, 이 정도면 전업 화가의 활동량에 별로 뒤지지 않는단다.

그가 얼마 전 책을 한 권 냈다. 이 책은 약간 독특하다. 우선, 미술 전문서나 교양서가 아니다. 한 가지 주제를 가지고 깊이 파고들거나 여러 갈래의 관점들을 소개한 것도 아니다. 글쓴이가 아는 사람들, 학교 교육, 미술, 신앙, 읽은 책 등 여러 분야에서 다양한 주제를 가지고 온갖 글을 써서 모은 문집(文集)이다. 두 번째로, 책방에서는 볼 수 없다. 글쓴이에게 요청하거나 그의 '은총'을 받은 행운아만 가질 수 있는 비매품이다. 글쓴이가 표지와 본문을 손수 디자인하고, 인쇄소와 제본소도 직접 찾아다녔다. 그러다 보니 맞춤법이 몇 군데 틀리고, 편집도 조금 엉성하다. 마지막으로, 글쓴이의 병을 호전시킨 '치료의 책'이다.

2008년 4월, 메니에르라는 병이 그를 찾아 왔다. 갑자기 어지러워지고 구토가 일어나고 귀에서 윙윙거리는 소리가 났다. 구역질이 나고 평형감각을 잃을 때도 있었다. 한쪽 귀가 상한 것이다. 책 제목 <여기가 어디지?>는, 40대 중반으로 접어드는 인생길에서 지금 어디쯤 서 있는지 돌아보자는 의미도 있지만, 실제로 길을 가다가 어지러움 때문에 지금 있는 곳이 어디인지 순간 잊어버리고 당황할 때가 있다는 것을 암시하는 것이기도 하다.

지금까지 산 인생의 절반 가까운 세월 동안 열심히 아이들을 가르치고 부지런히 그림을 그리면서 하루하루를 충실히 채워 왔는데, 난데없이 쳐들어 온 질병 앞에서 속수무책이었다. 몸이 건강할 때도 몇 시간 동안 그림 그리기에 집중하면 휘청거리는데, 이 몸 상태로 그림을 그리는 것은 불가능했다. 수업 시간에 한쪽 귀에 귀마개를 꽂고 아이들을 가르칠 수는 있었지만, '언제까지 이런 식으로 교사 생활을 할 수 있을까' 하는 공포에서 벗어날 수는 없었다. 몸도 고생했지만 마음고생은 몇 배였다.

우울증 비슷한 증세가 나타났다. 그림 그리는 것은 불가능해졌고, 사람 만나기가 꺼려져 참여했던 단체를 하나 둘 탈퇴했다. 말수도 적어지고, 세상사에 무심해지고, 우스갯소리에도 웃음이 나지 않았다. '왜 나에게 이런 고통이 왔나' 하고 신앙적으로 해석하고 이겨 보려고 애썼다. 그러느라 에너지만 더 들 뿐, 이렇다 할 해답을 찾지 못했다. 정신과 치료를 받아야 하지 않을까 싶었다.

이 책은 기김진호 씨가 존 홀트의 <학교를 넘어서>를 읽다가 아이디어를 얻어 만들었다. 글쓰기부터 편집, 디자인 등을 손수 진행했고, 출판 비용은 1,000부를 만드는 데 200만 원이 들었다.
 이 책은 기김진호 씨가 존 홀트의 <학교를 넘어서>를 읽다가 아이디어를 얻어 만들었다. 글쓰기부터 편집, 디자인 등을 손수 진행했고, 출판 비용은 1,000부를 만드는 데 200만 원이 들었다.
ⓒ 기김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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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통에서 벗어나려 읽고 쓰기 시작

두려움과 고통을 잊으려고 시작한 것이 책 읽기였다. 화실 가기를 멈추고, 대신 책장에 꽂아 두기만 하고 여태 읽지 않았던 책들에 눈길을 주기 시작했다. 제법 좋은 책들이 주인의 손길을 기다리고 있었다. 사막에서 물을 마시는 것처럼 책들을 들이켰다. 1년에 90권 정도를 읽었다. 처음에는 손에 잡히는 대로 읽었다. 수전 손택, 박노자, 하종강, 강준만, 김종철을 읽으면서 세상 보는 눈을 넓혔다. 이반 일리히, 존 홀트, 후쿠다 세이지를 만나 학교 교육에 대해 고민했다. 윤범모, 박홍규에게서 그림과 세상이 만나는 법을 배웠다. 필립 얀시, 피에르 신부, C. S. 루이스를 통해서 신앙의 깊이가 더해졌다.

책을 읽으면 반드시 내용을 요약하고 개인적인 생각도 간단히 정리했다. 그런 작업을 거치면서 생각의 밀도가 높아졌다. 궁금증이 꼬리를 물면 관련된 책을 찾아 읽었다. 기초가 튼튼해지고 논리가 정교해지는 것은 당연하다. 그간 열심히 아이들 가르치고, 그림 그리고, 신앙생활을 해 왔다. 남녀평등 실천의 일환으로 부모 성을 함께 쓰고, 학력 차별에 반대한다는 의미로 전시회 도록에 프로필을 쓰지 않았다. 2000년 남북 정상 회담을 계기로 통일 통장을 만들어 매월 10만 원씩 적금도 붓고 있다. 그러나 돌이켜 보니 이 모든 것에 대해 근본적인 고민은 제대로 하지 않고 살았던 것 같다. 책을 읽고 글을 쓰면서 내면의 빈약함을 절실히 깨달았고, 기초부터 하나둘 쌓아 올렸다.

기김진호 씨는 독실한 기독교 신자다. 지금까지 '젊은 지구론'을 믿었다. '젊은 지구론'이란 지구의 나이가 6000년에서 길어야 1만 년 정도 된다는 견해이다. 그 주장의 근거는 성경이다. 성경에 등장한 모든 사건을 시간 순으로 계산하면 그 정도 역사밖에 안 된다는 논리다. 창조과학회라는 기독교 과학자 단체가 오래 전부터 대중들에게 이 설을 가르쳐 왔다. 지금도 대부분의 기독교인은 '젊은 지구론'을 믿고 있다. 그들은 당연히 창조론도 믿는다. 기김진호 씨도 그렇게 믿어 왔다. 그런데 지금은 '진화론이 맞을 수도 있다'고 생각이 바뀌었다. 기독교 용어로 부르면 '회심'을 한 셈인데, 정반대 방향으로 회심한 것이다. 어쩌다가 그렇게 되었을까.

그의 주변에 전도하고 싶은 이가 있었다. 책을 많이 읽는 사람이었다. 기독교 진리를 부정하고 비판하는 리처드 도킨스의 <만들어진 신> 같은 유를 좋아했다. 그와 대화하려면 그 책부터 읽어야 했다. 기초가 튼튼하지 못한 탓인지, 처음에는 심하게 흔들렸다. 알리스터 맥그라스가 쓴 <도킨스의 망상>이라는 책을 읽었다. 제목만 봐도 알겠지만, 도킨스의 주장을 반박한 책이다. 그는 다시 프랜시스 콜린스의 <신의 언어>를 읽었다. 세 권에 담긴 내용들을 하나하나 추적하고 그것들을 기록해 나가면서, 그는 다음과 같이 결론 내렸다.

"진화론을 거부감 없이 받아들이면서도 신실한 기독교인이 될 수 있다. 자연 선택이라는 진화론적 원리를 통해서 지구를 풍성한 생명의 별로 이끄신 하나님을 찬양하지 못할 이유가 없다. 이제 나는 교사로서 학생들에게 진화론을 죄책감 없이 가르칠 수 있을 것 같다."

여전히 보수적인 교회를 다니는 신실한 기독교 신자이지만, 자신이 전도하려 했던 그이의 마음을 더 잘 이해하게 되었다. 그에게 자신이 읽고 정리한 것을 보내 줄 생각이다. 일방적인 전도가 아니라 서로 나눔이 가능할 것 같다.

그는 귀에 병을 얻기 전까지 20년 동안 학교에서 아이들을 가르치고, 개인전만 10회 넘게 여는 등 작품 활동도 했다. 병을 얻은 다음에는 책 읽기와 글쓰기를 통해 내면이 더 깊어지고, 그림에 이어 글로도 사람들과 소통할 수 있는 새로운 길을 발견했다.
 그는 귀에 병을 얻기 전까지 20년 동안 학교에서 아이들을 가르치고, 개인전만 10회 넘게 여는 등 작품 활동도 했다. 병을 얻은 다음에는 책 읽기와 글쓰기를 통해 내면이 더 깊어지고, 그림에 이어 글로도 사람들과 소통할 수 있는 새로운 길을 발견했다.
ⓒ 기김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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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 홀트에게 받은 도전을 감행하다

기김진호 씨가 처음부터 출판을 목표로 책을 읽고 글을 쓴 것은 아니었다. 교육 관련 책 중에 존 홀트의 <학교를 넘어서>를 읽다가 아이디어를 얻었다. 존 홀트는 이 책에서 '염가 출판', '자유 출판', '민간 출판'이라는 단어를 섞어 쓴다. 이 아이디어는 원래 존 홀트의 것이 아니라 뉴욕 주의 한 도서관에서 관리자로 일하는 머리에 밥이 제안한 것이다.

'뭔가 할 말이 있는 사람'이 상업 출판의 시스템에 지배되지 않고, 소규모로 적은 비용으로 책을 만들어 자기 목소리를 낼 수 있도록 하자는 것이다. 물론 고급스럽고 세련된 디자인이나 대중적 인기를 기대하면 안 된다. 존 홀트는 "만약 서로의 공동 관심사에 관해 이야기할 수 있고, 바깥의 사람들에게 이 관심사를 알릴 수 있는 방법을 가진다면, 정신적으로 훨씬 더 통합되고, 정치적으로나 경제적으로 더 큰 영향력을 발휘하게 될 것"이라고 기대했다. 기김진호 씨는 이 책을 읽으면서 도전과 자극을 많이 받았다. 책 읽기에 머물지 않고 그것을 진짜로 행동에 옮긴 것이다.

그가 시도한 것은 출판뿐이 아니다. 존 홀트는 학교 교육 시스템을 대단히 불신한다. 글쓴이가 존 홀트의 주장을 전부 수긍하는 것은 아니지만, 학교 교육에 큰 문제가 있다는 점에는 동의한다. 학교 교육에 들어가는 사회적 비용이 도대체 어느 정도이며, 그에 비해 결과는 만족한가. 글쓴이는 부정적인 결론을 내렸다.

그렇다고 학교 자체를 완전히 포기하자는 것은 아니다. 존 홀트의 아이디어처럼 '누구나 가르치고 누구나 배울 수 있는 공동체'를 시도해 보기로 했다. 가령 기김진호 씨는 미술을, 누구는 축구를, 누구는 건축을, 누구는 자동차 수리를, 이렇게 내가 가지고 있는 재능을 남에게 가르쳐 주고, 내가 가지고 있는 않은 것을 남에게 배우는 공동체를 시도해 보고 싶다. 마을 회관이나 도서관을 빌려도 되고, 주중에는 텅 비는 교회를 이용해도 된다. 거기서 서로가 서로를 가르치고 배우는 공동체를 만들어 보고 싶다. 이제 개학했으니 학교에 가서 동료 선생들을 은근히 꾀어 볼 작정이다.

소통의 즐거움 누리다

깨달음, 변화, 이런 것들은 책을 읽고 글을 쓰는 선에서도 어느 정도 해결이 가능하다. 책까지 낸 까닭은 무엇일까. 그는 '소통' 때문이라고 했다. 존 홀트도 이야기했듯이, 재능이나 깨달음을 다른 사람과 나누는 것의 즐거움을 누리고 싶었다. 학교에서 동료 선생들과 교회에서 교우들과 신변잡기를 나누기는 쉬워도 깊이 있는 대화를 하기는 쉽지 않다.

"책은 훌륭한 소통 도구라고 생각합니다. 그림도 좋은 도구이지만, 소통의 도구로서는 책만큼 논리가 명료하지는 않은 편입니다. 그림의 경우 작가 자신도 모르는 무언가가 화폭 어딘가에 그려 있기도 하지요. 그게 뭔지 그걸 그린 사람도 제대로 설명할 수 없는 것이 그림의 매력이기도 하지만, 때로는 좀 더 명확하게 소통하고 싶을 때가 있습니다. 그래서 만화를 그리기도 하지만, 글을 따라갈 수는 없는 것 같아요."

그는 요즘 글 잘 쓰는 사람이 그렇게 부러울 수 없단다. 글쓰기 관련 책을 사서 읽다 보면 글 잘 쓰는 사람들이 너무 많아서 기가 죽기도 하지만, 글을 잘 쓰지 못하는 사람도 책을 만들 수 있다는 것을 보여 주고 싶었다. 이 책을 읽고 후원금을 보내 주는 사람, 밥을 사 주는 사람이 많았다. 부모 성 함께 쓰기 등과 같은 문제로 토론하는 경우도 늘었다. 가장 반가운 일은 자기도 책을 만들어 보겠노라고 도전장을 내민 사람도 있다는 것. 의도가 적중한 셈이다.

출판 비용이 그리 적게 드는 것은 아니다. 1,000부를 찍는 데 200만 원가량 들었다. 이 책은 비매품인 대신에 후원을 받고 있다. 다음 책을 낼 수 있을 만큼의 돈이 들어와야 이 작업을 꾸준히 이어 갈 수 있기 때문이다. 5,000원에서 10만 원까지 다양한 후원금이 들어와서 지금까지 약 40만 원 정도가 통장을 채웠다.

잊을 수 없는 사연도 있다. 영남대 박홍규 교수는 글쓴이와 일면식은 없지만, 평소 존경하는 학자인지라 박 교수에게 책을 보냈는데 박 교수가 후원금을 넣은 것이다. 게다가 글쓰기를 격려하면서 건강을 염려하는 편지까지 보내 주었다.

웃음도 사라지고 다른 사람들을 만나는 것도 꺼렸던 시절이 있었다. 하지만 책을 읽고 글을 쓰고 책을 만드는 과정을 통해서 건강도 좋아졌고, 사람들과 더 적극적으로 소통하고 싶은 열망도 생겼다.
 웃음도 사라지고 다른 사람들을 만나는 것도 꺼렸던 시절이 있었다. 하지만 책을 읽고 글을 쓰고 책을 만드는 과정을 통해서 건강도 좋아졌고, 사람들과 더 적극적으로 소통하고 싶은 열망도 생겼다.
ⓒ 기김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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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소 남편이 하는 모든 일을 지지하고 씀씀이에 넉넉하던 동갑내기 아내 백인옥 씨가 처음에는 시큰둥했다. "책 만드는 데 돈이 그렇게 많이 들어?" 했다. 돈 때문에 그런 건 아니었다. 몸이 아프면 쉬어야 하는데, 엉뚱한 곳에 에너지를 쏟고 있으니 몸이 더 나빠질까 봐 걱정한 것이다.

하지만 책이 나온 다음 마음이 바뀌었다. 편집하고, 책이 나오고, 주문을 기다리고, 주소를 쓰고, 택배로 보내주고, 후원 계좌를 확인하는 모든 과정 속에서 남편의 얼굴이 차츰 밝아졌다. 그 모습을 보니 참 좋았다. 아프기 전 모습으로 돌아간 것 같았다. 주위 사람들도 같이 기뻐하고 격려해 주니 더 감사했다. "신경 정신과 의사의 상담을 받는 데 10분에 1만 원이라는데, 상담비와 약값 따지면 훨씬 싸게 먹혔다"고 부부가 함께 웃었다. 생각의 깊이가 깊어지고, 소통의 폭이 넓어지고, 육체의 병까지 좋아졌으니, 이게 '기적의 치료법' 아닌가.

기김진호 씨가 준비하고 있는 두 번째 작품은 아이들에게 그림을 통해서 세상 보는 법을 가르쳐 주는 책이다. 그가 기다리던 책이 며칠 전 도착했다. 영화 제작 입문서다. 그는 내친 김에 영상으로 소통하고 싶은 욕심이 생겼다. 그래서 영상 만드는 방법을 소개한 책을 주문한 것이다. 10~20분짜리 짧은 다큐멘터리를 만들려고 한다. 시나리오를 만들고 콘티를 짜면서 상상의 세계에 빠져 있다. '자유 출판'에서 '자유 영상'으로 기김진호 씨의 소통 도구는 진화하고 있다.

* 책을 받아 보기 원하면 이름과 주소를 문자로 보내면 된다. 후원금은 자발적으로 알아서 하면 된다. (신한 110-165-409013 기진호 / 010-2403-8238)

홈페이지 http://www.artkee.com
블로그 http://blog.naver.com/artkee
이메일 artkee@hanmail.net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뉴스앤조이>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태그:#기독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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