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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6년 정도 지나니 칼이 그제야 춤을 추고 손끝에 맛이 익기 시작한 것 같아요. 그때 냉면도 만들고 갈비도 직접 잴 수 있었지만 그래도 '이(李)서방'의 맛을 낸 것 아니었어요. 그래서 맛 찾아 각지를 유람했죠. 그런 뒤 내 가게를 낼 수 있었습니다"

이서방 갈비샤브샤브의 이 서방이 삽겹 일부를 두툼히 썰어 낸 다음 별미인 '벌집삼겹'을 만들기 위해 손질을 하고 있다. 그는 '고기는 원래 두툼해야 육질이 살아 있어 맛이 좋다'고 했다. 벌집을 내는 이유는 육즙과 육질을 보조하면서 구울 때 삼겹의 지방을 효과적으로 뺄 수 있기 때문이라고 했다.
▲ 벌집삼겹 이서방 갈비샤브샤브의 이 서방이 삽겹 일부를 두툼히 썰어 낸 다음 별미인 '벌집삼겹'을 만들기 위해 손질을 하고 있다. 그는 '고기는 원래 두툼해야 육질이 살아 있어 맛이 좋다'고 했다. 벌집을 내는 이유는 육즙과 육질을 보조하면서 구울 때 삼겹의 지방을 효과적으로 뺄 수 있기 때문이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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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황 끝에 손에 쥘 수 있게 된 주방 칼

인천광역시 부평구 산곡동에서 '이(李)서방 갈비샤브샤브 전문점'을 운영하고 있는 이재춘(37)씨. 경기 불황이 지속되고 있어 장사가 예전만 못하지만 그는 연신 웃고 있다. 고생 끝에 얻은 가게인 터라 어렵다고 움츠리고 있으면 될 일도 안된다는 게 그의 설명이다.

사람은 서울로 가야 한다기에 소리ㆍ글ㆍ그림 세 가지를 자랑하지 말라고 하는 예향(藝鄕) 진도를 떠나 전학을 왔다. 낯설고 살천스런 서울은 그에게 쉽게 곁을 주지 앉았다. 그렇게 그의 방황도 시작됐다. 아직 마흔도 안 된 그의 구수한 전라도 사투리는 여전히 살갑지만, 청소년 시절 그에게 서울의 문화는 외로움의 다른 이름이었다.

질풍노도의 시기, 사고도 치고 방황도 했다. 때론 가출해 서울을 벗어나기도 했다. 정겨운 고향 생각을 안 해본 것은 아니지만 고향이라고 해서 딱히 무슨 수가 있는 것도 아니었다. 그런 그를 잡아 준 것이 바로 '요리'와 '조리'였다. 이씨는 자신을 '조리사'라고 했다.

이씨는 "사실 고등학교는 검정고시를 봤어요. 마음을 고쳐 잡고 뭔가를 해야겠다고 생각한 거죠. 그런 뒤 군에 다녀오고 나서 음식 만드는 일을 배우기로 하고 무작정 한식집에 들어갔어요. 그렇게 제 인생 2라운드가 시작된 거예요. 지금은 요리학교 같은 곳에서 배우지만 그땐 그런 게 있나요? 설거지부터 하는 거지요."

요즘 한 방송국 음식드라마가 인기다. 이씨도 한식집, 그중에서도 갈비와 냉면을 주로 취급하는 이른바 '가든', '00관', '00면옥' 같은 한식집에서 밑바닥 일부터 배워야 했다. 설거지부터 배워야 하는 그가 칼을 쥘 수 있게 된 것은 한참이 지나서였다.

'아라이' 이서방, 마침내 조리실장으로

스물두 살에 제대한 그가 찾아간 곳은 계양구에 있는 '신라가든'이라는 곳이었다. 거기서 설거지부터 배웠다. 숙식을 모두 그곳에서 해결하며 일을 배우기로 한 것. 그리고 배우기 위해 그의 주머니 한쪽에는 늘 작은 수첩과 볼펜이 따라다녔다.

이씨는 "이 세계에선 '아라이'라고 해요. 설거지부터 잡일, 심부름을 맡은 막내를 그렇게 불러요. 아라이 다음이 '막시다'인데 사실 막시다와 아라이가 하는 일은 큰 차이 없어요. 먼저 들어온 사람이 막시다인 게죠. 그렇게 일을 하면서 어깨너머로 일을 배우는 거예요. 그런 뒤 찬모(=반찬 만드는 역할) 또는 반모(=밥 짓는 역할)를 지나 냉면장(=냉면 만듦)과 육부장(=고기 만짐)을 지나면 조리실장에 오를 수 있게 돼요"라고 설명했다.

이재춘 씨가 최근에 메뉴를 추가하면서 내놓은 한우육회다. 그는 한우육회를 내놓을 때 가급적 양이 적은 부위를 고른다. 이씨는 "육회를 좋아하는 사람들이 술 안주로 즐겨 찾기 때문에 많이 나가는 편이 아니다. 그래서 소량을 주문해 둬야 신선도가 좋고 먹는 손님들도 육질 맛을 제대로 느낄 수 있다"고 했다.
▲ 한우육회 이재춘 씨가 최근에 메뉴를 추가하면서 내놓은 한우육회다. 그는 한우육회를 내놓을 때 가급적 양이 적은 부위를 고른다. 이씨는 "육회를 좋아하는 사람들이 술 안주로 즐겨 찾기 때문에 많이 나가는 편이 아니다. 그래서 소량을 주문해 둬야 신선도가 좋고 먹는 손님들도 육질 맛을 제대로 느낄 수 있다"고 했다.
ⓒ 김갑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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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라이에겐 칼이 주어지지 않는다. 그저 산더미 같은 설거지와 청소만 기다리고 있을 뿐이다. 음식을 조리하는 방법을 가르쳐주지 않기 때문에 그때그때 냉면장이나 육부장, 조리실장이 하는 요리를 어깨너머로 배워야한다.

이씨가 칼을 잡을 수 있는 때는 오직 새벽이었다. 그는 먹고 자는 모든 것을 식당에서 해결했기 때문에 일찍 일어나 칼을 쥐고 연습했다.

그는 "6시 정도에 일어나 조리실장이 오기 전까지 된장국 등에 들어갈 야채나 냉면에 들어갈 배와 오이, 그밖의 야채 등을 썰어 놓는 거죠. 조리실장이 별말 없으면 계속 썰어 놓는 겁니다. 그러다 차츰 칼질이 손에 익으면 고급 칼질로 옮아가는 거예요. 그래도 손님에게 나가는 음식의 마지막 정교한 칼질은 여전히 조리실장 몫이에요"라고 했다.

6년 정도를 그렇게 일하고 나니 칼질과 손맛이 몸에 뱄다. 그러는 동안 곳곳을 두루 거쳤다. 한 식당에선 승진이 잘 안 이뤄지고 음식을 배우는 방식이 '도제' 방식이라 다른 곳으로 옮겨야 새로운 음식을 익힐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이씨는 "여러 군데를 돌아다녔어요. 영화 <식객>에 운암정 나오죠? 전 뭐 솔직히 그 정도의 실력은 아니고, 또 주로 고기를 다루는 대부분의 식당이 그렇게 배워서 문을 여는 것도 아니에요. 다만 주방에 열대여섯 명이 일하는 정도면 그래도 제법 큰 식당이라 나름의 룰이 있는 거예요. 그 어깨너머로 배운 음식솜씨를 가지고 다들 식당을 내는 거지요. 그러면서 이 식당 저 식당 옮겨 다니면서 자기만의 맛의 세계를 구축하는 겁니다"라고 말했다.

"제 입맛도 변하기에 지금은 간을 데이터화합니다"

이 사장이 제일 자신 있어 하는 메뉴는 단연 돼지갈비다. 그의 삶이 돼지갈비에 고스란히 배어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공을 들여 돼지갈비 양념을 만드는 법, 재는 법, 숙성하는 법 등을 연구했다. 그래서 그는 갈비를 제일 자신 있어 한다. 그밖에 모든 밑반찬도 이 씨가 만든다. 아내가 집에서 하는 요리는 정말 간단한(?) 요리라고 전했다.
▲ 이재춘 이 사장이 제일 자신 있어 하는 메뉴는 단연 돼지갈비다. 그의 삶이 돼지갈비에 고스란히 배어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공을 들여 돼지갈비 양념을 만드는 법, 재는 법, 숙성하는 법 등을 연구했다. 그래서 그는 갈비를 제일 자신 있어 한다. 그밖에 모든 밑반찬도 이 씨가 만든다. 아내가 집에서 하는 요리는 정말 간단한(?) 요리라고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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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년 드디어 자신의 이름을 걸고 '이서방 숯불갈비'를 처음 내던 날, 이재춘씨의 심장은 뛰고 있었다. 결혼과 함께 이듬해 태어난 큰아이도 걸음마를 떼며 그의 개업을 축하했다.

개업하기 전까지 이씨가 기억하는 식당만 열서너 개에 이를 정도로 많이 돌아다녔다. 대략 1년에 한 번 꼴로 이 식당 저 식당 옮겨다니며 이 서방만의 음식 맛을 키워갔다. 그리고 2004년 개업한 이서방 숯불갈비는 산곡1동 주민들로부터 큰 호응을 얻었다.

이씨는 "맛을 배우러 돌아다닌 것은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맛만 배우러 돌아다녔다고 하면 너무 고상한 얘기에요. 사실 맛을 익히는 것도 중요했지만 언젠가는 내 가게를 내려면 돈을 벌어야 했어요. 그래서 좀 더 좋은 조건의 식당을 찾아다닌 거지요. 의정부와 분당, 서울, 인천 등 정말 많이 돌아다녔어요"라고 했다.

그렇게 돌아다니던 중 의정부에서 일할 때 지금의 아내를 만나 2000년에 결혼식을 올렸다. 그때는 이씨도 제법 큰 식당에서 조리실장으로 탄탄하게 자리를 잡고 있었다.

그는 "여기저기 돌아다니다 조리실장으로 올라간 후에는 오래 있었어요. 사실 맛을 배우러 돌아다니는 것도 있지만 경영주가 곳곳에 프랜차이즈 형태로 사업을 진행했기 때문에 옮겨다닌 측면도 있어요. 다만 그래도 조리 실력이 있어야 옮겨갈 수 있는 거죠(웃음). 그러다 지금 아내를 만났어요. 그렇게 결혼하고 나선 이젠 정착해야겠다 싶어 그때부터 개업을 준비했어요"라고 전했다.

첫 가게를 열었지만 직접 식당을 운영한다는 것은 만만치 않은 일이었다. 조리실장으로 있으면서 음식 맛은 인정받은 터였지만 직접 식당을 경영하고 지역에서 자리를 잡는다는 것은 30대 초반의 그에게 어려운 일이었다. 그래도 특유의 낙천적인 성격으로 버티고 장사를 해나갔다.

이씨가 가장 자랑하는 음식은 뭐니 뭐니 해도 이서방표 숯불갈비다. 제일 잘하고 제일 자신 있는 음식이 바로 갈비인 것. 거기엔 숱한 세월을 거쳐 그의 몸에 밴 칼끝의, 손끝의 맛이 살아 흐르기 때문이다. 그리고 최근에는 이서방표 한우육회를 내놓으면서 산곡동 주민들의 입맛을 자극하고 있다.

그는 "음식 만드는 사람이 달리 할 말 있겠어요? 맛있게 만드니 오셔서 맛있게 드시고 행복하시라는 말밖에"라고 한 뒤 "사실 저도 입맛이 변합니다. 그래서 간을 데이터화하고 있어요. 이를테면 갈비를 잴 때 맛이 일정하려면 들어가는 각종 양념의 배율이 일정해야 해요. 그래서 저는 그것을 정해 놓았습니다. 전에는 손대중 눈대중으로 했는데 그러면 맛이 일정하지 않아요. 물론 간혹 별미가 탄생하기도 합니다"라고 전했다.

새해가 밝긴 했지만 여전히 체감 경기는 싸늘하다. 그런데도 이씨는 "장사 안되는 게 저만 안되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축 처져 있으면 저도 손님도 일하는 식구들도 모두 힘들어요. 그래서 씩씩하게 갑니다. 올해는 자영업자들에게 좋은 소식이 많았으면 해요"라고 바람을 전했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부평신문(www.bpnews.kr)에도 실렸습니다.



태그:#자영업자, #부평구 산곡동, #이서방, #돼지갈비, #조리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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