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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28일), 다시 한 번 '서자복'을 찾아 나섰다.

찾아 뵈온 지는 그리 오래 전도 아니건만, 전에 기사로 올린 '동자복'과 관련하여 어서 글을 올려 정리하자는 심산에서이다. 전에 비해 날씨는 괜찮은 편이다.

서자복은 제주시 용담동에 있다. 사람들이 자주 찾는 탑동과 용두암, 용연 따위와 가까운 곳이다.

'탑동'이라는 이름은 예전에 방사탑이 있어서 '탑 아래'라는 이름으로 불린 데서 유래한다. 그 탑동의 긴 방파제를 따라 서쪽으로 걸어서 그 끝에 다다르면, 도로 가운데에 '모조' 방사탑 여러 기가 세워져 있는 게 보인다.

방사탑 모양 조형물 탑동 서쪽 끝 복개한 도로 위에 있다
▲ 방사탑 모양 조형물 탑동 서쪽 끝 복개한 도로 위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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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다란 호텔, 탑동광장 등이 서 있는 탑동과 마찬가지로 원래 이곳도 땅이 아니라 하천이었다. 다만 탑동은 '매립'을 한 것이고, 이곳은 그와 달리 '복개 공사'를 하여 길을 내고 땅을 내어 주차장시설도 만들어 놓은 것이다. 이 두툼한 콘크리트 층 아래에 어둠 속에 잠자는 하천이 있는데, 이것이 '병문천'이요, 여기가 그 냇물이 바다와 상봉하는 지점이 되는 것이다.

한두기 표석과 복개한 하천 주차장으로 쓰이는 이 곳도 '병문천' 위를 덮어 복개한 곳이다.
▲ 한두기 표석과 복개한 하천 주차장으로 쓰이는 이 곳도 '병문천' 위를 덮어 복개한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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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전에 큰 비가 오거나 태풍이 닥치고 나면 물이 불어나 인근 집이 물바다가 되기 일쑤였다. 이곳에 살던 사람들도, 다닥다닥 붙어 있던 집들도 사라져 어디로 갔는지 알 수 없다.
물론 그 덕에 교통이 편리해져서 이쪽과 저쪽 간에 드나듦이 자유로워지기는 하였다.

이 하천을 경계로 서쪽은 급경사 언덕지대가 되는데, 이런 높은 언덕에 서자복이 자리하는 것은 동자복이 그러한 것과 같다. 이 일대가 '한두기'이고 더 좁게는 '동한두기'가 된다.

'서한두기'는 이 언덕 서쪽이 절벽을 이루고 그 절벽을 '한천' 지류가 갈라놓은 반대편 서쪽 절벽부터 해당한다. 이 지류가 '용연'이고 절벽의 빼어난 형상과 울창한 나무, 옥빛을 머금은 물의 빛깔로 영주십경의 하나로 꼽은 '용연야범'을 이끌어낸다. 말하자면 '병문천'과 '한천', 이 두 하천 가운데 '한천'의 손을 들어 준 셈이다. '한두기'가 이 '한천',곧 '한내'에서 나온 이름이란 걸 생각하면 말이다.

'한내'는 '크다'는 뜻의 '한'을 쓰고 있으니 그도 그럴만 한 일이다.

두 개의 표석이 나란히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하나는 이곳 '한두기'에 대한 여러 설명을 한 것이고, 다른 하나는 한자로 '선반수'라고 써 있는 표석이다. 복개되어 서 있는 이 자리 아래에 예전에 용천수가 있었다는 설명이다. 그러고 보니 십 수년 전에 들렀을 때까지도  여기에 샘물이 있었던 게 떠올랐다. '선반물'이라고 했었다.

2기의 표석  왼쪽은 '한두기 설촌유래'를 밝히고, 옆 자연석은 '선반물'이 있었음을 밝힌다.
▲ 2기의 표석 왼쪽은 '한두기 설촌유래'를 밝히고, 옆 자연석은 '선반물'이 있었음을 밝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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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 돌담 위에 블록벽돌로 쌓은 개량형 담을 끼고서 그리 높지않은 경사진 골목을 뚜벅뚜벅 걸어 오른다. 이어진 돌담엔 시멘트로 덧발라 견고하게 개량하여 놓았고, 그 담의 몇몇은 검고 둥글고 큰 이른바 '먹돌'이다. 먹돌은 오랜 동안을 바다가 쓰다듬어 빚어낸 자연산 조각품인데 그 모양이 달걀 같은 느낌이 든다. 이 마을 부근 바다 뿐 아니라 저기 탑동에까지 널리 형성되어 있었다. 골목을 더 들어가면 먹돌 양이 더 많은 담들이 보인다. 두어 채 남짓 되는 초가는 겨울 바람을 의식한 듯 초록빛 모자를 썼다. 몇 채 안되는 집들이 더 있지만 예전에는 이 집들 모두 먹돌을 쌓아서 담과 집을 만들었을 것이다.

용화사 가는 골목길 걷기 어렵지 않은 동산길 따라 조금 걸으면 '용화사'에 닿는다
▲ 용화사 가는 골목길 걷기 어렵지 않은 동산길 따라 조금 걸으면 '용화사'에 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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멀리 붉은 지붕이 보인다. 이 곳이 서자복이 있는 용화사이다. 예전에는 해륜사가 있었다고 전하는데 고려시대 절로 추정한다. 조선 숙종 때 당시 제주목사 이형상의 지시로 유명무실해진 절을 폐사하였다고 전한다.

마치 가정집 같은 조촐한 분위기의 용화사는 왼쪽에 관리사로 쓰이는 듯한 건물이 있고 그 옆에 대웅전이 입구 정면을 바라보고 있다. '대웅전' 편액 좌우에 새겨놓은 용왕상이 눈을 부릅뜨고 인상을 잔뜩 찌푸리고 있는데 그다지 무서워보이지는 않는다.

용왕상 돌하르방도 이렇게 인상쓰고 있지만 무섭지 않다.
▲ 용왕상 돌하르방도 이렇게 인상쓰고 있지만 무섭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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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대웅전의 오른쪽 한편에 주인공인 서자복이 미소를 지으며 서 있다. 오른쪽엔 남자 성기 모양의 석상이 꼿꼿하게 서 있는 게 특이한데, 자식을 바라는 이의 염원을 들어준다는 '기자석'의 기능을 지녔다. 화강암으로 된 하얀 빛깔이 잿빛의 미륵불과 대비된다.

예전에는 사각 정자 형식의 미륵전 안에 있었는데 이제는 헐리고 없다. 그래서 시원하게 보일만도 한데 협소한 공간이라 뒤쪽 높은 개인 건물이 더욱 높아만 보인다. 또한 담벽을 사찰 벽이나 기둥에 주로 쓰는 검붉은 빛깔로 칠해 놓아서 눈에 거슬리기도 한다.

서자복 정면에서 본 사진이다. 그 곁에 기자석이 있다.
▲ 서자복 정면에서 본 사진이다. 그 곁에 기자석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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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자복은 아무리 봐도 동자복보다는 완성도가 떨어진다. 그 이유를 따져보니 몇 가지로 정리된다.

먼저 두 미륵은 현무암을 써서 만들긴 했지만 엄밀히 보면 같은 재료가 아니다. 서자복의 것이 동자복의 것보다 무른 다공질 현무암인 것이다. 이런 재질은 같은 현무암이라도 꼼꼼하게 새기기 더욱 힘들었을 것이다. 다공질 현무암이 무르다는 것은 세월이 흐름에 따라 마모가 되는 정도가 심하다는 뜻도 된다. 그렇게 생각하고 보니 확실히 여러 선들이 각이 살지 않아 음영이 뚜렷하지 않고, 마무리가 덜 된 느낌을 준다.

서자복과 동자복 네모꼴과 세모꼴의 차이를 보인다.
▲ 서자복과 동자복 네모꼴과 세모꼴의 차이를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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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체 외관을 보면 동자복은 위쪽이 좁아지는 삼각형에, 서자복은 사각형에 가깝다. 머리와 몸체 사이 비례도 서자복이 훨씬 크다. 동자복이 '왕머리'라면 서자복은 '대왕머리'쯤 되는 것이다. 키는 동자복(360Cm)보다 서자복(336Cm)이 작으니 비례로는 더욱 차이가 나는 셈이다.

이 두 가지를 함께 보면 동자복은 세련된 귀족형, 서자복은 소탈한 서민형으로 대비된다.
양영순이 그려내어 폭발적인 인기를 끌었던 만화 <누들누드>에 선보였던 그 '마당쇠 같은' 캐릭터가 떠오르기조차 하는데 이는 뒷모습에서 더욱 두드러진다.

서자복의 뒷모습 건물이 차지해 가로막은 조망이지만 구제주시내권을 향한다.
▲ 서자복의 뒷모습 건물이 차지해 가로막은 조망이지만 구제주시내권을 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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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자복은 동자복과 달리 뒷모습을 볼 수 있는데, 단촐하게 두 줄을 그어 표현한 띠와 풍성하게 내려앉은 소매 자락이 몸체와 더불어 푸근한 인상이다. 얼핏 보면 옆에 놓인 기자석과 비슷하다는 인상도 풍긴다. 그러고 보니 '마당쇠 같은' 캐릭터가 더욱 떠오르는 것이다.

이제 돌아갈 때이다. 잠시 이 공간을 둘러 본다. 오래 전 고려시대에 만들어졌을 이 불상과 마주하여 고통을 누그러뜨리고 가는 이가 아직도 있다는 것을 간접적으로나마 확인하게 되었다. 나무로 만들어 놓은 간단한 제단 아래에 누군가 끼워놓은 천원짜리 한 장이 바람에 살랑거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천원 바람에 살랑거리고 있었다.
▲ 천원 바람에 살랑거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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