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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판은 승자와 패자가 갈린다. 법원은 어느 한쪽의 손을 들어줄 수 밖에 없고, 다른 한쪽에게는 욕을 먹을 수밖에 없다. 운명이라면 운명이다. 민사 사건뿐 아니라 형사 사건도 마찬가지다. 판사는 검사와 피고인 사이에서 유죄와 무죄를 놓고 판결을 내린다.

 

유죄가 나오면 피고인이 반발하고, 무죄가 나오면 검찰의 불만은 커진다. 애초부터 모두를 만족시키기란 불가능한 것이 판결이다. 따라서 판결에 대한 비판은 어쩌면 자연스러운 것이다. 하지만 최근 검찰과 여당, 조중동 등이 합세한 '법원 때리기'는 아무리 좋게 보려해도 비판이란 말로 미화하기 힘들다. 이건 여론과 힘을 동원한 압박이자 강요이다. 

 

대다수 언론은 이번 사태를 검찰과 법원 사이의 '(이념) 갈등', '충돌', '힘겨루기', '전면전'으로 표현한다. 심지어는 '사법 전쟁'이라는 단어까지 쓰기도 한다. 이런 말을 써도 되는 걸까. 냉철히 돌아보자.

 

가까이는 올해 강기갑, 전교조, 피디수첩 사건에서 법원은 무죄를 선고했다. 더 멀리 보자면 작년 미네르바, 정연주 전 KBS 사장에게 1심에서 무죄판결을 했다. 몇가지 더 붙이자면 용산참사 수사기록 공개와 야당 정치인, 시국선언 전교조 교사에 대한 1심 무죄판결 정도가 될까. 검찰과 여당이 "법원이 편향되었다"며 비난하는 근거는 이게 전부 아닌가.

 

판사가 법을 적용해서 무죄판결을 내린 것이 어떻게 '갈등'이 되고 '전쟁'으로 묘사되어야 하는지 법원에서 일하는 나로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다.

 

검찰, 경기에서 지고 "심판 편파판정 탓"으로 돌리는 꼴

 

 

피고인을 법정에 세우는 것(기소)은 검찰의 권한이다. 검찰이 할 수 있는 건 거기까지다. 법정에 오면 검사 역시 재판을 받는 입장이다. 판결은 판사가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게 권한을 나누고 견제하는 것이 국민들의 권리를 지키는 데 도움이 되기 때문에 법을 그렇게 만들었다.

 

그런데도 검찰은 무죄 판결이 난 이후에 판결에 불만을 품고 '장외투쟁'을 벌이고 있다. 마치 축구 시합에서 진 선수들이 운동장에 남아서 "심판의 편파판정 때문에 졌다"고 시위를 하는 꼴이다. 그것도 중요한 경기에서 질 때마다 매번 같은 방식으로 불만을 표출한다면 조금 우습지 않은가. 더욱 가관인 것은 정치권이 이런 시위에 동참하고 있고, 언론이 이 장면을 흥미 위주로 생중계하고 있다는 점이다. 운동선수가 시합이 끝나고 패인을 냉철하게 분석하듯 검찰도 왜 이렇게 시국사건에서 무죄가 많이 나오는지 스스로 돌아볼 때가 되었다.

 

국가기관인 검찰이 법정 밖에서 판결이 잘못되었다고 비난하는 광경을 어떻게 보아야 할까. 자기가 원하는 판결이 나오지 않는다고(혹은 자신의 정치적 성향과 다른 판결이 나온다고) 법적 절차가 아닌 다른 방식으로 법원을 비난하는 모습, 이거야말로 법과 원칙을 강조하는 이명박 대통령이 극도로 싫어하는 '떼법'이 아닐까.

 

의외로 차분한 법원 내부 ... 판사들 "별다른 부담 없다"

 

외부에서 연일 법원을 공격하지만 법원 내부는 예상외로 조용하다. 대법원은 지난 15일 "최근의 상황에 대하여 심각한 우려와 유감을 표명"한다는 짧막한 입장을 밝혔고, 20일 이용훈 대법원장이 출근길에 "사법부 독립을 지키겠다"고 말한 것 말고는 별다른 의견을 내지도 않았다. 대다수 판사와 직원들도 차분하기는 마찬가지다.  

 

서울 지역의 한 판사는 "예전(80년대)에 정보기관이 몰래 법원에 압력을 넣는 방식보다는 (검찰이 공개적으로 판결을 비난하는 방식이) 오히려 낫지 않느냐"며 검찰의 압박에 대해 "판사로서 별다른 부담이 없다"는 반응이었다. 그는 "시간이 지날수록 검찰도 유리할 게 없을 것"이라며 "검찰에 대응을 할 이유도 없을 뿐 아니라 대응을 않는 게 상책"이라고 밝혔다. 

 

그는 검찰뿐 아니라 여당까지 나서서 연일 법원에 연일 과도한 비난을 하는 것을 두고 "세종시 문제의 분위기 전환용"이라고 조심스럽게 분석했다. 또다른 판사도 이런 분석에 동의했다. "여당이 세종시 문제로 집안 단속이 안 되니 바깥(법원)을 향해 목소리를 높이면서 해결하려는 꼴"이라는 것이다. 그러고 보니 한동안 신문과 방송을 도배하다시피 하던 세종시 문제가 쏙 들어갔다. 지금 그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것은 '법원 때리기'다.

 

지방에 근무하는 한 판사는 이번 사태를 두고 "오히려 잘된 것 같다"는 태도를 보였다. 이 판사는 "작년엔 언론과 한나라당이 '우리법연구회' 소속 판사의 판결을 문제삼더니 올해는 우리법연구회와 아무 관련 없는 판결들을 좌편향으로 몰면서 또다시 '우리법연구회 해체'라는 모순된 주장을 하고 있다"며 "검찰과 한나라당의 정체성이 국민들에게 제대로 드러나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이번 사태가 판사들에게 미칠 영향에 대해서 묻자 그는 "당연히 영향을 미칠 것이다. 그런데 (그 영향 때문에) 오히려 무죄 판결이 많아질지도 모른다"고 내다봤다. "판사들이 심리적으로 위축될 우려는 거의 없다"는 것이다.

 

"한나라당의 '법원 때리기'는 세종시 분위기 전환용" 지적도

 

수도권의 또다른 판사는 한나라당이 판사들에 대해 사상검증을 추진하겠다고 밝힌 것을 두고 불쾌한 심기를 감추지 않았다. 그는 "정권이 바꿨다고, 판사들 판결이 바뀌는 것이 맞느냐"고 반문했다.

 

그는 "한나라당 주장대로 하려면 판사들을 아예 A그룹, B그룹 2배수로 선발해놓고 정권이 바뀔 때마다 (정권의 성향에 맞게) 어느 한 그룹의 판사들을 전부 임용하는 방식을 쓸 수밖에 없을 것"이라고 꼬집었다.  

 

법원공무원들로 구성된 전국공무원노조 법원본부는 "사법부가 민주사회를 지탱하는 든든한 버팀목 역할을 해낼 것이라 믿는다"며 "법관들이 용기을 잃지 말고 국민의 마지막 보루로서 그 역할을 다하기를 바란다"는 논평을 냈다.

 

오병욱 법원본부장은 21일 기자회견을 통해 "조중동과 한나라당은 사법부를 향해 색깔론으로 덧칠하며 난도질하고 있다"면서 "보수언론과 집권정당의 행동은 3권 분립이라는 헌정질서를 무너뜨리고 있는 행태를 보이고 있다"고 질타했다. 그는 검찰에 대해서도 "'제멋대로 기소'를 남발하는 검찰부터 개혁해야 한다"며 고 주장했다.

 

진보진영에 유리한 판결은 좌편향?

 

최근 여당의 법원 공격은 단순한 정치공세로 보기엔 도가 지나치다. 한나라당은 사법부의 좌편향을 바로잡기 위해서는 사법 개혁이 절실하다고 연일 목소리를 높인다. 일부 언론도 젊은 판사들의 튀는 판결이 문제의 본질인 것처럼 호도하고 있다. 하지만 사법부가 좌편향되었다는 주장은 사실이 아니다.

 

단적인 예로 최근 강기갑, 전교조, 피디수첩 무죄 판결을 내린 판사들은 이른바 진보적이거나 좌편향적인 판사가 아니다. 그건 법원 안팎에서 인정하는 점이다. 언론에서 그들의 얼굴과 신상, 과거 판결 등을 공개했지만 좌편향이라는 근거는 나오지 않았다.

 

다만 이 판사들의 판결이 '결과적으로 진보진영에 유리한 결과'를 가져왔을 뿐이다.  많은 사람들이 진보적인 판사는 진보진영에 유리한 판결을, 보수적인 판사는 보수진영에 유리한 판결을 내릴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다.

 

서울지역의 또다른 판사는 "법관은 진보냐 보수냐의 잣대가 아닌 증거가 있느냐 없느냐로 판결을 한다. 이건 상식 있는 판사들이라면 다 마찬가지"라며 항간의 진보-보수 이념구도로 접근하는 시각을 일축했다. 최근의 무죄 판결 역시 엄격한 증거조사와 법리적용에 따른 결과일 뿐이지 판사 개인의 정치적 성향과는 무관하다는 지적이다. 

 

재판의 승자는 사법부를 추켜세우고, 패자는 사법부를 매도한다. 이런 분위기는 정도의 차이는 있을지언정 어느새 우리 사회에서 자연스러운 풍토가 되어 버렸다. 특히 최근 검찰과 여당, 일부 언론은 법원을 매도하는 차원을 넘어서 이참에 법원을 길들이려고 작정한 것처럼 보인다. 그렇게 길들여진다면 법원이 아니다. 법원은 정부와 여당을 옹호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견제하기 위해서 있는 기관이기 때문이다.  


태그:#법원죽이기, #법원때리기, #판사, #법원, #보수진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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