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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세기 말, 우리나라 사람들은 민족 정체성을 어디에 두었을까? 중앙에서 정치하는 사람들은 개화파와 수구파로 나뉘어져 난타전을 벌이고 있었고, 보통 서민들은 그 논쟁을 두고 또 입씨름 정도는 했을 것이다. 요즘 뜨고 있는 KBS 드라마 <추노>에서도 보여주듯이, 소현세자도 그 싸움에 휘말려 이생을 달리하지 않았던가.

 

그 당시 기독교인들은 어느 위치에 서 있었을까? 오리엔탈리즘을 덧입고 왔던 서양선교사들로부터 의료와 구제를 덕보고 있었으니, 개화파 쪽에 힘을 실어주지 않았나 싶다. 물론 조선인들 심성에 그토록 깊게 뿌리내려 온 수구 유교사상이 쉽게 가시는 것은 아니었을 것이다.

 

양현혜 교수가 개정판으로 낸 <윤치호와 김교신>(한울·2009)은 그 당시 우리나라가 기독교를 수용할 때, 그들 두 기독 지식인이 어떻게 하나님을 이해했는지, 또 어떤 기독교세계관을 받아들였는지 보여준다. 이른바 유교적 틀 속에서 자란 그들 두 사람이 제국주의 기독교를 어떻게 해석하며, 우리 안에 배태시키려 했는지 깨달을 수 있다.

 

"1994년 초판이 나올 때나 지금이나 한국 개신교의 역사의식에는 큰 변화가 없다. 윤치호의 유형으로 대표되는 역사의식이 여전히 주류를 이루고 있다. 굳이 달라진 것을 말하라면 그때보다 상황이 더 심화되었다는 점이다. 이윤과 능률의 극대화를 가치로 하는 자본주의적 약육강식의 세계질서를 칭송하고 그 질서 안의 모순을 약자에게 이전할 수 있는 강자로서의 모습을 개신교가 이제 아무런 도덕적 꾸밈없이 노골적으로 욕망하고 있기 때문이다."(개정판서문)

  

윤치호는 흔히 알려진 대로 초창기 유교적 세계관의 틀 속에 머물다가 훗날 일본, 중국, 그리고 미국에 유학하면서 서구학문을 흡수한 근대조선의 대표적인 유학파 지식인이다. 그는 서구적인 외부나 아래로부터의 구조개혁이 아닌 왕이 주도하는 '안민의 내정개혁'을 주창하다 실패하자, 1885년 망명을 겸한 유학길에 올랐고, 1888년 4월에는 미국 남감리교 최초의 한국인 세례교인이 될 정도로 미국의 기독교에 심취했다고 한다.

 

물론 그가 기독교를 받아들인 것은 절대타자의 신체험보다는 세계질서를 좌우하는 기독교 산업문명의 영향이 컸다고 할 수 있단다. 이른바 그 당시 윤치호에게 자리 잡은 신앙세계는 제국주의적 기독교 세계관이었다는 점이다. 그로 인해 귀국한 이후 '독립협회' 회장을 맡아 민중운동을 일으키지만, 그가 본 민중은 어리석은 백성일 뿐 나라를 개혁할 주체는 아니었다고 단정했다 한다.    

 

그래서 그는 고종에게 기대를 걸었지만 그 계획 또한 무산되자 다른 권력자를 찾아 나섰고, 그것이 식민지 말기 일본정부의 귀족의원이 됨으로서 적극적인 대일 협력자가 된 배경이라고 한다. 물론 1945년 해방 후에 민족반역자로 고발되어 80세에 자결하지만, 그때까지 그는 일본 제국주의를 신의 대리적인 지배체제로, 그들의 식민지 정책을 우리의 우민을 향한 도덕적인 가르침으로 정당화했다고 한다.

 

"윤치호는 미국사회에서 강자의 권력을 정당화한 일종의 강자의 권력사상이라고도 할 수 있는 '사회진화론'을 흡수해서 그의 세계관의 근간으로 삼았다. 또 서구의 비서구에 대한 정복 확대를 기독교의 신의 축복으로 칭송하는 '행복의 신의론'에 취해 있던 19세기 말의 '그리스도적 제국주의' 형태를 기독교의 원리적 본질로서 이해하고 수용했다."(55쪽)

 

한편 김교신은 1919년 3·1독립운동에 참가한 후 동경에 유학하여 동경고등사범학교를 졸업한 기독교인로 알려져 있다. 그는 그곳에서 우찌무라 간쪼(內村鑑三)의 성서연구회에 출석하여 귀국할 때까지 7년 간 성서를 배우기도 한 신실한 기독교인으로 자랐다고 한다.

 

국내에 귀국한 그는 양정보통고등학교와 경기중학교에서 교사로 민족교육에 힘을 쏟는 한편 함석헌과 함께 <성서조선>을 발간하여 무교회주의(無敎會主義)적 입장에서 '조선산 기독교'를 주장하며 그 사상을 펼쳐 나갔다고 한다. 그 뒤 흥남 일본질소비료회사에 취직하여 조선인 노동자의 복지 향상을 꾀했으나, 1945년 4월 해방을 목전에 두고 병을 얻어 44세로 생을 마감한 참된 거목이라 한다.

 

"김교신은 미국 기독교로부터 많은 영향을 받은 조선 기독교 안에도 비기독교적인 요소가 적지 않다고 생각했다. 교회 관계 잡지의 발행부수와 광대한 교회의 건축, 또는 종교집회에 있어서 신자 동원수로 교회의 성공 여부를 판가름하는 조선 기독교회의 사고방식과 활동을 김교신은 특히 엄하게 비판했다."(182쪽)

 

김교신 역시 유학자 집안에서 자랄 정도로 유교에 깊은 뿌리를 두었고, 일본 내에 깊이 자리 잡은 제국주의 기독교를 접하지 않는 것은 아니었다. 그렇지만 그는 '서구문명=강자=도덕적인 선, 비서구 문명국=약자=도덕적인 악'이라는 제국주의 기독교가 추구하는 독특한 등식에는 반기를 든 게 분명했다. 그만큼 같은 기독지식인 윤치호와는 전혀 다른 기독교 세계관을 추구했음을 알 수 있다.

 

앞서 개정판 서문에 양현혜 교수가 밝힌 바 있듯이, 한국개신교에 드리우는 어두움은 16년 전보다 더 깊어진 것 같다. 2010년이 된 지금에도 한국개신교의 역사의식엔 큰 변화가 없는 것 같기 때문이다. 아무쪼록 이 책이, 개신교내에 깊숙이 뿌리내린, 이윤과 능률을 극대화하는 자본주의적 약육강식의 세계질서를 일깨울 수만 있다면, 강자의 모습을 약자에게 이식시키려는 못된 습관들을 들춰낼 수만 있다면, 그리하여 약자의 자존을 보존하려는 자발적인 사랑의 힘을 키울 수만 있다면, 그것으로 책임을 다하지 않겠나 싶다.


윤치호와 김교신 - 근대 조선의 민족적 아이덴티티와 기독교, 개정판

양현혜 지음, 한울(한울아카데미)(2009)


태그:#윤치호와 김교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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