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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굴이 끝난 이후 현장을 덮어버렸기에 지금은 유적이 어디인지 분간하기 어렵다. 이곳은 한국에서 발견된 최초의 저습지 유적으로 역사적 가치가 크다(사적 제486호).
▲ 창녕 비봉리패총 발굴이 끝난 이후 현장을 덮어버렸기에 지금은 유적이 어디인지 분간하기 어렵다. 이곳은 한국에서 발견된 최초의 저습지 유적으로 역사적 가치가 크다(사적 제486호).
ⓒ 오은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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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해 봉하마을을 마지막으로 두고 우리는 창녕으로 이동하였다. 창녕은 6가야 중의 하나인 비화가야가 있었던 것으로 전해진다. 비화가야는 다른 가야소국들에 비해 주도적인 위치에서 활동하진 않았지만 신라와 경계에서 자신들만의 독특한 문화를 창조했고, 이는 토기에 그대로 반영되기도 하였다.

창녕에는 이런 비화가야와 관련된 여러 유적들이 있다. 이러한 유적들을 둘러보기 이전에 이왕 왔으니 창녕과 관련하여 다른 시대의 유적들도 살펴보기로 하였다. 창녕에는 생각보다도 많은 유적지들이 있었다. 어디를 갈까 고민하던 와중에 같이 답사에 나선 오은석군이 강력하게 비봉리패총을 방문할 것을 주장하였다. 어차피 답사 코스에서도 무리 없이 소화할 수 있을만한 위치에 있었기에 봉하마을을 떠나 바로 비봉리패총으로 향하였다.

비봉리패총은 신석기시대의 대표적인 유적지이고, 최근에 발굴됐는데 그 성과가 언론에 공개되어 비상한 관심을 끌었다고 한다. 더군다나 내륙에서 최초로 발견된 패총, 즉 조개무지이고, 국내 최초의 신석기시대 배, 동물이 새겨진 토기 등 학술적 가치가 있는 유물들이 발견되었다는 점에서 의의가 있다.

내륙에서 발견된 첫 조개무지 이야기

아래에 흐르고 있는 강이 낙동강이며 청도천의 중간 즈음에 비봉리유적이 위치하고 있다.
▲ 비봉리패총 지형 아래에 흐르고 있는 강이 낙동강이며 청도천의 중간 즈음에 비봉리유적이 위치하고 있다.
ⓒ 창녕 비봉리유적 발굴보고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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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봉리패총으로 가는 길은 상쾌하였다. 날씨가 쾌청하여 하늘도 맑고 바로 옆에 하천이 흘러가고 있어 그 모습 또한 시원해 보였다. 내비게이션에는 정확한 정보가 나오지 않아 대강 추측해서 갔었는데, 처음에 도달한 장소는 잘못 본 곳이었다. 두 번째에 내린 장소에서 비로소 유적을 찾을 수 있었다.

비봉리패총은 생각보다 찾기 어렵지 않았다. 비봉마을로 들어가는 입구에 양배수장이 있는데, 그 양배수장의 바로 옆이 비봉리패총이다. 비봉리패총은 양배수장 신축공사 도중에 발견되어서 세상에 알려졌다. 2004년 양배수장 신축공사를 하면서 유물들이 발견되었고, 창녕군은 이를 국립김해박물관에 의뢰하여 시굴조사를 진행했다. 시굴조사를 하면서 신석기시대의 유구와 유물들이 발견되었음은 물론 저습지의 조건까지 갖추고 있었기에 추가적인 조사, 즉 발굴조사의 필요성이 제기되었다.

저습지유적은 다른 경우에 비해 발굴이 어렵지만, 그만큼 중요한 성격을 지닌다. 저습지에선 오랜 세월 동안 유물들이 보존될 수 있는데, 이로 인하여 다양한 정보들을 얻을 수 있다. 특히 유기물의 경우는 짧은 세월에도 부식되기 쉬운데, 이런 유기물마저 그대로 보존되기 때문에 그 당시의 식생을 분석하는 데 유용한 데이터를 제공할 수 있다. 이 점이 국립김해박물관에서 발굴조사를 결정하는 주요 계기가 되었으며, 실제로 발굴을 하면서 이와 관련된 자료가 쏟아져 나와 관련 연구자들을 흥분시켰다.

또한 이 유적이 패총유적이라는 점도 큰 의의가 있다. 패총, 즉 조개무지는 당시 사람들이 조개를 먹고 버린 게 지속적으로 퇴적되면서 생성된 유적을 말하는데, 지금으로 치면 이른바 쓰레기장이다. 하지만 보통 쓰레기장이 아니기에, 패총을 구성하는 조개들과 생활폐기물 등을 분석하여 당시 사람들이 살던 시대의 상황을 알 수 있다. 특이할만한 점은 조개무지는 주로 해안가에서 많이 찾아 볼 수 있는데, 내륙에 속하는 창녕 비봉리에서 이러한 조개무지가 보인다는 점이다. 비봉리패총이 가장 가까운 해안가인 마산만까지의 거리가 직선거리로만 따져도 20㎞가 넘으며, 낙동강을 따라 낙동강하구까지의 거리를 재보면 70㎞를 웃돈다는 사실은 많은 사람들을 의아하게 만든다.

조개무지가 내륙에서 발견된 이유는?

비봉리패총의 옆에 위치한 하천. 이곳과 비봉리패총은 과거에 연결되어 있었으며, 지금으로부터 6천년 전에는 여기까지 바닷물이 차 있었다.
▲ 청도천 모습 비봉리패총의 옆에 위치한 하천. 이곳과 비봉리패총은 과거에 연결되어 있었으며, 지금으로부터 6천년 전에는 여기까지 바닷물이 차 있었다.
ⓒ 오은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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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륙에서 조개무지가 발견된다는 점, 이는 우리에게 매우 중요한 사실을 가르쳐 준다. 우선 내륙에서 발견된 조개무지의 성격을 파악하려면 어떤 점들을 살펴보아야 할까? 일단 조개무지를 구성하고 있는 조개들의 종류를 살펴보아야 한다. 비봉리패총을 구성하는 조가비들을 살펴보면 다수가 민물조개인 재첩이지만 간혹 굴 껍데기도 발견된다. 지금같이 내륙 깊숙한 곳에 굴이 들어오려면 해안가와 교역을 통하는 방법이 있지만, 해안선의 변화라는 점 또한 염두해 둘 수 있다.

오늘날 우리가 아는 해안선과 당시의 해안선은 생각보다 큰 차이가 있었다. 이를 보여주는 대표적인 예들이 바로 조개무지들이다. 조개무지들은 주로 해안가를 따라 생성되기 때문에 이들을 통하여 당시 해안가를 유추할 수 있으며 이를 위해서는 여러 자료들의 검토가 필요하다. 김해지역에서 발견된 회현리패총의 예를 보더라도 오늘날의 김해 시내가 당시에는 해안가였고, 김해는 이러한 해안을 중심으로 발달하였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점과 마찬가지로 비봉리패총은 그 당시 해안선의 변화를 알 수 있는 잣대를 제공해주는데, 이 근처에서는 다른 조개무지들도 발견된다는 사실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밀양시 하남읍 방면이나 창원시 동읍의 주남저수지 방면에서도 조개무지들이 발견된다. 하남읍 방면에서는 외산리패총, 양동리 환산패총, 양동리패총, 수산리 동촌패총, 귀영리패총, 금포리 환산패총, 금포리 모래들패총 등이 발견되며 주남저수지 방면에서는 합산패총과 용산리패총이 발견되었다.

이러한 점은 유적이 생성되던 당시의 지형, 즉 지금의 청도천이 그 당시와는 다른 모습이었다는 점을 유추할 수 있게 해준다. 청도천은 낙동강의 한 지류로서 비봉리패총의 바로 건너편에 위치한다. 지금은 그 사이를 도로가 막고 있지만 도로가 생기기 전엔 이 비봉리패총까지 물이 들어왔던 것으로 보인다. 바로 그 때문에 이런 조개무지가 생길 수 있었던 것이다.

6800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가다

지금으로부터 6800년 전엔 이곳까지 바닷물이 들어왔으며, 만을 이루고 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시간이 지날수록 퇴적물이 쌓이고 수심이 얕아진다.
▲ 6800년 전의 비봉만 지금으로부터 6800년 전엔 이곳까지 바닷물이 들어왔으며, 만을 이루고 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시간이 지날수록 퇴적물이 쌓이고 수심이 얕아진다.
ⓒ 창녕 비봉리유적 발굴보고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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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의 바다와 육지의 분포나 지형, 기후, 식생, 생물의 분포 등을 연구하는 학문을 고지리학(古地理學 : Paloegeography)이라고 부른다. 고고학에서도 과거의 모습을 복원할 때 이 고지리학을 통하여 많은 연구가 이루어진다. 비봉리패총 또한 고지리학에서 중요한 유적이기에 이를 분석해 놓은 연구가 있으며, 이는 비봉리패총 발굴보고서에 수록되어 있다.

지금으로부터 6800여 년 전, 즉 기원전 4800년 전의 비봉리패총과 그 주위의 환경은 어떤 모습이었을까? 그 당시에는 이곳에 바닷물이 들어왔던 것으로 보인다. 지금의 낙동강 하류 쪽은 모두 바닷물로 채워져 있었으며, 이곳은 만(灣 : bay)이었을 것으로 보이는데 이를 비봉만이라고 부르면서 간단하게 이야기를 하면 이렇다. 당시 비봉리에 살던 주민들은 배를 이용하여 교류하였으며, 그 교류의 대상은 인근 지역 뿐만이 아니라 남해안에 살던 사람들도 포함되었다. 그리고 비봉리와 인근 해안에는 어류와 굴과 같은 조개류가 서식하고 있었다.

그리고 지금으로부터 6100년 전인, 기원전 4100년 전 경에는 이전에 비해 수심이 다소 얕아졌지만, 여전히 깊은 해역이 유지되고 있었다. 비봉리에서 검출된 규조를 보면 염수규조가 90% 이상 검출되고, 담수규조와 기수규조가 5% 정도 검출된다. 규조(硅藻)란 돌말이라고도 하는 플랑크톤의 일종으로 밀물과 바닷물에 널리 분포하는데 이게 퇴적되면 규조토가 된다. 이들을 통해 당시 환경을 살펴볼 수 있는데, 염분이 높다는 점으로 미루어보아 당시에도 이곳은 바다였다는 점을 알 수 있다.

비봉만은 시간이 지나면서 염수가 빠지고 담수가 그 자리를 채우고 서서히 퇴적물이 쌓인다. 신석기시대의 유적 환경과 청동기시대의 유적 환경에 큰 변화가 생긴 셈이다.
▲ 기원전 500년 경의 비봉만 비봉만은 시간이 지나면서 염수가 빠지고 담수가 그 자리를 채우고 서서히 퇴적물이 쌓인다. 신석기시대의 유적 환경과 청동기시대의 유적 환경에 큰 변화가 생긴 셈이다.
ⓒ 창녕 비봉리유적 발굴보고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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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원전 3000년경의 해수면을 살펴보면 해발고도 1.5m로, 그로부터 1100년 전의 해발고도가 0.4m라는 점과 비교하면 고도가 더 높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는 현재 낙동강 하상과 범람원이 분포하는 공간에 지난 세월 동안 상류에서 공급된 퇴적물들로 인해 수심이 상당히 얕아졌기 때문이다. 이 당시 낙동강은 아직도 염수(鹽水)로 채워져 있었으며, 비봉리 부근은 기수환경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기수(汽水)는 민물과 바닷물이 섞여 있는 곳을 말하며, 여기에 재첩들이 서식하였을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신석기 말기인 기원전 1500년 전의 이른바 비봉만의 입구는 상당히 많이 좁혀져 있었으며 수심도 얕아졌다. 낙동강 유역은 여전히 염수가 우세한 환경이지만 수심은 많이 얕아지고 이에 따라 비봉만의 염분 농도는 전체적으로 이전에 비해 낮아져 있었다. 비봉리유적의 근처엔 당시 삼각주가 있었던 것으로 보이며 이곳에는 재첩이 서식하고 비봉만의 가장자리를 따라 갈대가 빼곡하게 분포하고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마지막으로 청동기시대인 기원전 500년경의 환경을 살펴보면 이렇다. 청동기시대에 들어서면서 해수면이 서서히 하강하기 시작하며, 서서히 오늘날의 모습과 가깝게 변화하고 있던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비봉만은 서서히 퇴적물이 쌓이고 염분 농도가 낮아지면서 거의 담수에 가까웠을 것으로 보인다. 특히 비봉리패총은 이때 들어서는 담수지역이 되어 생성 당시와는 전혀 다른 환경을 보여줬던 것으로 생각된다.

당시 해수면의 변화와 이로 인한 환경의 변화를 간단히 알아보았다. 우리는 흔히 현재의 환경이 과거와 똑같았다고 생각하기 쉽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고 수많은 변화를 거쳤다. 유적 또한 그 유적이 생기는 시점과 지금의 환경이 다르며, 우리는 이 점을 염두에 두고 과거의 모습을 살펴보려는 노력을 해야 한다. 이렇게 비봉리패총은 우리에게 유용하고도 다양한 자료들을 제공한다는 점에서 매우 의미가 있는 유적이라 하겠다.

덧붙이는 글 | 가야문화권 답사의 지역을 옮겨 창녕편 연재를 시작합니다. 이번 기사에서는 창녕 비봉리패총에 대해서 다루어 보았습니다.



태그:#비봉리패총, #창녕, #고지리학, #가야문화권 답사, #신석기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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