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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야문화권 답사 둘째날, 우리는 아침을 먹기도 전에 길을 서둘렀다. 김해유적들을 둘러보고 난 후 비화가야가 있었던 창녕으로 가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창녕으로 가기 전, 한 군데를 더 둘러보고 가자고 하였다. 바로 노무현 대통령이 태어났던 봉하마을 말이다.

우리가 찾아간 때는 2009년 6월 24일, 노무현 대통령의 49제가 끝나기 직전이었다. 노무현 대통령의 유해는 봉화산 정토원에 안치되어 있었고, 우리는 봉하마을을 들르는 김에 정토원 또한 방문하기로 하였다.

아침에 찾아간 봉하마을은 조용하면서도 손님들을 맞을 준비를 하고 있었다. 아직 이른 시간인 7시였기에 많은 사람들은 보이지 않았지만 묘역 준비공사가 한창이었고, 또 자원봉사자들은 일찍부터 분향소에 나와 준비를 하고 있었다. 우리는 분향소에 찾아가서 참배를 한 후 부엉이바위를 바라보며 천천히 봉화산을 올라갔다.

봉화산 중턱에서 마애불을 뵈다

경남 김해시 진영의 봉하마을 위의 봉화산에 있는 마애불로 고려시대의 작품인 것으로 추정된다.(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40호)
▲ 진영 봉화산 마애불 경남 김해시 진영의 봉하마을 위의 봉화산에 있는 마애불로 고려시대의 작품인 것으로 추정된다.(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40호)
ⓒ 오은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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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화산은 생각보다 크지 않은 작은 산이었다. 노무현 대통령이 생전에 즐겨 올라가고 또한 산책한 곳이며, 돌아가시는 그 마지막 날에도 이곳을 올라갔다고 한다. 유년 시절부터 이곳에서 뛰어놀았을 그 모습을 잠시 상상해 보았다.

봉화산으로 올라가는 길은 간단한 등산로를 정비해 놓아서 부담 없이 올라갈 수 있다. 등산로를 따라 천천히 올라가던 중턱 즈음에서 무엇인가가 눈에 띄었다. 가로뉘어져 있던 석불(石佛). 투박해 보이며 조형성 또한 뛰어난 편이 아니었음에도 불구하고 내 눈에는 뭔가 다르게 보였다.

이 마애불은 자연암벽에 조각되어 있으며 앉아 있는 석불이다. 고려시대의 작품으로 발견 당시 산중턱 바위틈에 끼여 옆으로 누워 있었다고 한다. 아무래도 석공이 마애불을 조각하다가 실수를 하였던지, 자연의 풍화작용으로 인하여 그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이는데 양손의 일부와 왼쪽 어깨 부분이 조금 훼손되었지만 전체적으로는 보존 상태가 좋은 편이다. 조금 훼손된 이유는 발견 당시 암반에 끼어 있어서 떨어져 나왔기 때문이라고 한다.

불상의 머리 부분은 민머리에 상투가 올라가 있는 형태로 그 모양이 다소 크게 표현되었고 둥그스름해 보인다. 목에는 이른바 삼도(三道)라고 하는 3개의 주름 흔적이 남아 있는데, 이는 부처님을 나타내는 주요 특징 중 하나다. 얼굴은 둥그스름하고 풍만하여 복스럽다는 느낌까지 주는데, 눈은 지그시 감고 있으며 입은 자그마하고 약간 마모되었다. 깊은 사색에 잠긴 모습으로서 몸을 옆으로 뉘인 채로 잠든 것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양쪽 어깨에 걸친 옷자락은 U자형으로 자연스럽게 흘러내리고 있으며 수인(手印)은 시무외여원인(施無畏與願印)으로 보인다. 즉 오른손은 중생의 두려움을 풀어주고, 왼손은 중생의 소원을 이루어 주는 것을 상징하는 수인이다. 이러한 수인은 삼국시대에 주로 나타나는데 서산의 마애삼존불에서도 그런 모습을 찾아 볼 수 있다고 한다.

다리는 가부좌를 틀고 있으며 그 모습이 전체적으로 둥그스름하다. 아랫부분은 풍화작용으로 인해서인지 마모되어 흐릿하지만 전체적인 틀은 그대로 남아 있다. 정돈되고 깔끔한 그 모습이 보는 이를 감탄하게 만든다. 균형이 잘 잡히고 세련된 모습을 보아 도공의 정성이 가득 들어있음을 느끼게 한다. 하지만 지나치게 화려하지 않고 수수한 모습이 오히려 더 고고하게 생각된다.

봉화산 마애불에 얽힌 전설 한 토막

마애불의 머리 부분을 확대해 찍은 사진이다. 민머리에 상투가 올려져 있고. 자애로운 미소를 띄고 있다.
▲ 봉화산 마애불 세부 마애불의 머리 부분을 확대해 찍은 사진이다. 민머리에 상투가 올려져 있고. 자애로운 미소를 띄고 있다.
ⓒ 오은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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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화산을 자암산(紫岩山)이라고도 한다. 그래서 봉화산 마애불이라고 부르지 않고 자암산 마애불이라고도 불린다. 이 마애불에 대해서는 예로부터 전설이 하나 전해져 내려오고 있다. 전설의 배경은 신라시대로, 당나라 황실의 이야기가 나온다.

당나라 황제에겐 어여쁜 황후가 있었다고 한다. 그런데 어느 날부터 그 황후가 시름시름 앓으면서 몸이 허약해져갔다. 황제는 훌륭한 의사와 약을 써도 황후의 병이 차도가 없자 크게 근심하였다. 그러던 어느 날 황후가 헛소리를 하며 괴로워하는 것을 보았다. 황제는 재빨리 황후를 깨워 진정시키고, 왜 그런지에 대해 물어보았다.

그러자 황후는 잠이 들면 꿈에서 한 청년이 자신을 괴롭힌다고 하면서 흐느껴 울었다. 황제는 이를 듣고 여러 유명한 절을 찾아다니면서 불공을 드렸다. 그러던 어느 날 황제도 이상한 꿈을 꾸게 된다.

두 승려가 남쪽으로 걸어가고 있는데, 황제는 그 두 승려에서 신비한 느낌을 받아 서서히 따라갔다고 한다. 얼마쯤 가니 남쪽에 산이 하나 나오고, 그 산에서는 황후의 꿈에서 나오던 청년이 두 승려의 앞으로 나와 무릎을 꿇었다. 그러자 두 승려 중 한 승려가 크게 꾸짖으며 말했다.

"네 이놈! 너는 불법을 어기고 당나라 황후를 밤마다 괴롭힌 놈이로다. 내 너를 가둬 그 버릇을 고쳐 주겠다. 백년이고 천년이고 네가 죄를 뉘우치는 날 다시 구해주리라."

라고 하며, 그 청년을 바위 틈에 넣고 두 승려는 가던 길로 떠나갔다. 꿈에서 깬 황제는 사람들을 시켜 그러한 산과 바위를 찾도록 신하들에게 시켰다. 하지만 당나라 어디에도 그 산과 바위가 보이지 않아, 다른 나라까지 뒤져보게 되었다.

마침내 신하들은 신라의 김해에 당도하고 자암산에 이르게 되었다. 그리고 그곳에서 황제가 말한 바와 같은 모습의 청년과 꼭 같이 생긴 석불이 새겨져 있는 것을 발견하게 되었다. 그리고 황제에게 가서 이를 보고하니, 황제가 매우 기이하게 여겼다. 그리고 그 후부터 차츰 황후의 병이 차도가 생기더니 결국 완쾌되었다. 하지만 석불 속의 청년은 황후를 연모하는 마음을 아직도 버리지 못하여 아직도 바위틈에서 고뇌를 계속 하고 있다고 한다.

이러한 전설은 사실 우리나라의 다른 지역에서도 널리 볼 수 있다. 전남 고흥의 팔영산에서도 중국 황제의 세숫대야에 8개의 봉우리가 비쳐서 기이하게 여겼다고 한다. 그래서 신하들을 시켜 찾게 하였더니 바로 고흥의 팔영산이라고 한다. 이러한 전설들이 정겹게 느껴지는 것은, 중국의 산천보다 해동의 산천이 더 뛰어나다고 생각하였던 선조들의 자랑 섞인 기개가 그대로 남아있기 때문이 아닌가 싶다.

기구한 마애불의 인생역전?

봉화산 마애불이 위치한 봉화산의 모습. 사진에 보이는 바위는 노무현 대통령이 운명을 달리한 부엉이바위이다.
▲ 봉화산의 모습 봉화산 마애불이 위치한 봉화산의 모습. 사진에 보이는 바위는 노무현 대통령이 운명을 달리한 부엉이바위이다.
ⓒ 정동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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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화산 마애불의 이야기를 들으면 왠지 화순 운주사의 와불 이야기가 떠오른다. 화순 운주사의 와불은 일어서지 못하고 누워있는 미완성된 불상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 지역 사람들은 이 와불이 일어서는 날 미륵이 와서 세상이 평화로워 질 것이라는 믿음을 갖고 있었다. 마찬가지로 봉화산 마애불의 청년 또한 자신의 죄를 뉘우치면서 앞서 자신을 가둔 신승(神僧)들을 기다리고 있을지 모른다.

하지만 전설은 그럴지라도 불상 조성 이후의 일반인들의 마음은 또 달랐을 것이다. 매일처럼 산에 올라 이 마애불에게 기도를 하고 절을 올리면서 자신들의 소원을 빌고, 또 가정의 안녕을 기원하였을 것이다. 마애불의 미소를 보면서 부처님의 가호가 자신들을 감싸주길 기대하였고, 그렇게 하루를, 일 년을, 그리고 일생을 보냈으리라.

또한 지나가던 아이들도 장난을 멈추고 불상 앞에 와서는 경건하게 고사리 손을 모아 합장을 했을지 모른다. 부처님이 제대로 앉아있지 못하고 옆으로 뉘어 있는 모습이 자못 의아해 보일 수도 있지만, 그 온화한 미소에 저도 모르게 마음이 편해짐을 느꼈을 것이다.

마애불의 운명을 생각해보니 어찌 보면 참 기구하다. 고려시대의 한 이름 없는 석공의 손에서 만들어졌지만, 석공의 실수인지, 하늘의 조화인지 무너져버려 누워있는 불상이 되어 버렸다. 그리고 그 마애불에 대한 과거의 경건한 믿음은 중국 황후에게 몹쓸 짓을 한 청년의 설화로 변해버렸다. 그리고 최근에 와서야 다시 빛을 보게 되었지만, 여전히 예전처럼 눕혀져서 그 자리에 덩그러니 놓여 있을 뿐이다.

하지만 불행 중 다행인 점은 이곳을 찾는 이들이 많아지면서 이 마애불의 존재도 서서히 알려지고 있다는 점이다. 기억에서 잊힌 문화재의 경우 그 보존과 관리가 다소 부실해 질 수도 있지만 많은 관광객들이 찾아오기에 정토원에서는 물론 김해시 차원에서도 지속적인 보존이 이뤄질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이곳에 묻힌 한 사람과 함께 세인들의 기억 속에서 다시는 잊히지 않기를 기대해 본다.

덧붙이는 글 | 김해 봉하마을에 있는 봉화산 마애불에 대해 다루어 보았습니다.



태그:#봉화산 마애불, #봉하마을, #김해, #노무현 대통령, #봉화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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