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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산참사부터 두 전직 대통령의 잇따른 서거, 쌍용차 사태, 4대강 사업 강행까지 2009년의 이슈들은 유난히 슬펐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올 한해 뉴스의 중심에 서있었던 인물들을 만나보는 연속 기획인터뷰를 통해 우울한 2009년를 정리하고, 2010년은 새 희망으로 시작하려 합니다. [편집자말]
수배자 신분으로 명동성당에서 농성 중인 박래군 용산철거민참사 범국민대책위원회 공동집행위원장이 29일 오후 서울 명동성당에서 <오마이뉴스>와의 인터뷰 중 용산참사 협상이 "연내 처리를 기조로 대화하고 있는데 아직은 어떻게 될지 가능성이 반반"이라며 말하고 있다.
 수배자 신분으로 명동성당에서 농성 중인 박래군 용산철거민참사 범국민대책위원회 공동집행위원장이 29일 오후 서울 명동성당에서 <오마이뉴스>와의 인터뷰 중 용산참사 협상이 "연내 처리를 기조로 대화하고 있는데 아직은 어떻게 될지 가능성이 반반"이라며 말하고 있다.
ⓒ 유성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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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일 용산참사 협상이 극적 타결 됐다. 2009년을 하루 앞두고 이루어진 합의다.

유가족을 대표하는 용산 범국민대책위원회(이하 범대위)의 박래군 공동집행위원장은 마지막 협상이 벌어진 29일 아주 긴긴 밤을 보냈다. 회의는 30일 오전 6시 반까지 이어졌다. 그는 이날 오후 <오마이뉴스>와의 인터뷰에서 "쉽게 풀리거나 아주 어렵거나 모 아니면 도였다, 어제(29일) 근사치에 대한 답이 나왔다"고 설명했다.

전날 오후만 해도 타결 가능성은 불투명했고, 그는 "타결 가능성은 반반"이라면서 "협상이 결렬되면 자체적으로 참사 1주기에 장례를 치르는 방안도 고민하고 있다"고 전했다.

그렇게 이뤄낸 협상이지만 만족할 수는 없다. 이날 발표된 정운찬 총리 입장글에 대해 박 위원장은 "아주 두루뭉술하고 미흡한 수준"이라고 평가했다. 범대위는 마지막까지 "정부의 책임"이라는 표현을 주장했지만, 결과물은 "총리로서 책임"이었다. 박 위원장은 "처음엔 총리실이 '용산참사'라는 표현도 어려워했다"면서 "예전보다 진전된 내용으로 받아들였다"고 전했다.

참사 책임은 정부 아닌 정운찬 총리에 있다?

용산참사범대위는 30일 낮 용산구 남일당 빌딩앞에서 긴급기자회견을 열어 '용산 참사 유가족이 정부와 협상을 사실상 타결했다' '철거민 희생자들의 장례식은 1월 9일 치르고, 정운찬 총리가 책임을 인정하고 유가족에게 유감을 표명하기로 했다'고 밝혔다. 기자회견이 진행되는 동안 사망한 남편의 영정사진을 껴안고 있는 유가족들이 오열하고 있다.
 용산참사범대위는 30일 낮 용산구 남일당 빌딩앞에서 긴급기자회견을 열어 '용산 참사 유가족이 정부와 협상을 사실상 타결했다' '철거민 희생자들의 장례식은 1월 9일 치르고, 정운찬 총리가 책임을 인정하고 유가족에게 유감을 표명하기로 했다'고 밝혔다. 기자회견이 진행되는 동안 사망한 남편의 영정사진을 껴안고 있는 유가족들이 오열하고 있다.
ⓒ 권우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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협상이 타결됐으니 오는 1월 9일 장례도 치르고 1월 25일까지 유가족들이 남일당 분향소에서 유가족들이 철수한다.

앞으로 용산 투쟁은 어떻게 될까. 박래군 위원장은 "지금은 1단계만 정리된 것"이라고 못박으면서 "준비기간을 갖고 장기 전략을 새로 짜야 한다"고 강조했다. 진상규명과 책임자 처벌, 재개발정책 및 제도 개선 등은 이뤄지지 못한 반쪽짜리 타결이기 때문이다.

그는 특히 재개발 정책을 보편적인 사회문제로 만들어야 한다는 문제의식을 강하게 드러냈다. 중산층이 재개발로 쪽박을 차는데, 이대로 가면 서민들이 서울에서 다 밀려날 텐데, 왜 사람들은 용산참사를 '안타깝지만 남의 문제'라고 생각할까. 지난 1년을 평가하면서도 그가 가장 아쉬운 점이 이 대목이었다.

용산참사 협상은 연내 처리됐지만, 박 위원장은 연초에 구속된다. 지난 3월 20일 사전구속영장이 떨어진 뒤 그는 "용산참사를 해결하고 자진출두하겠다"면서 수배자가 됐다. 얼마 전까지 그는 협상이 결렬되더라도 1주기가 넘어가면 자진출두하는 방안을 고민했다. 들어갔다가 나와서 현장에서 뛰는 게 낫다는 생각에서다.

그 약속대로 박 위원장은 오는 1월 20일 용산 철거민 다섯 분의 장례를 치른 뒤 수배생활을 끝낼 생각이다. 90년대 초반 열사정국에서 각종 장례를 도맡아 하면서 '재야의 장의사'라는 별명을 얻었던 그가 약 20년이 흐른 지금 다시 장의사로 돌아온 셈이다.

다음은 박래군 용산 범대위 공동집행위원장과의 인터뷰 일문일답.

박래군 용산철거민참사 범국민대책위원회 공동집행위원장.
 박래군 용산철거민참사 범국민대책위원회 공동집행위원장.
ⓒ 유성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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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막바지 협상은 어떻게 진행됐나.
"풀리려면 쉽게 풀리지만 아니면 어렵고 '모 아니면 도'였다. 그동안 서로 가지고 있는 패도 다 보여줬고, 결국 어제 사과나 보상 등에 대해 근사치에 대한 답이 나왔다. 아주 긴긴 밤이었다. 그 뒤에는 유가족·철거민·대표자들과 얘기하느라 오전에 협상 타결을 발표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 협상 결과는 어떻게 평가하나.
"1년 동안 겨우 이거 했냐는 사람도 있다. 우리도 성에 차지는 않는다. 정운찬 총리 입장글이 아주 두루뭉술하고 미흡한 수준이다. 그러나 책임을 인정하고 있어서 '사인(私人)간의 문제'라고 규정하던 예전 태도보다 진전된 내용으로 받아들였다.

그동안 협상에서 우리는 '공권력 투입에 대한 사과'까지는 못 들어가도 '정부가 책임을 통감한다'고 해주길 바랐는데, 결국 '총리로서 책임'으로 합의됐다. 처음엔 (총리실이) '용산참사'라는 표현도 어려워했다."

- 유가족들은 협상 타결을 결정하면서 어떤 입장을 보였나.
"유가족들도 1주기 전에는 장례를 치른다는 생각이 있었다. 범대위에서는 협상이 결렬될 경우 1주기에 맞춰서 자체적으로 장례를 치르는 것도 심각하게 고민했다. 투쟁 명분도 중요하지만 그동안 유가족들이 너무 힘들었다.

그런데 막상 장례가 구체화되니까 만감이 교차할 수밖에 없다. 그동안 갈등도 있었지만 유가족들끼리 서로 의지하면서 왔는데, 앞으로 남편 없이 혼자 살 생각에 복잡하기도 하고. 그런 모습 지켜보면서 나도 한편으로는 허탈하고 한편으로는 '해냈다'는 마음도 들더라."

용산참사의 '불편한 진실'

- 그동안의 협상 과정을 설명해달라.

"12월 초부터 협상이 재개됐다. 누가 먼저 제안했다기보다 주변에서 중재하면서 자연스럽게 이뤄졌다. 저 쪽(서울시)에서 '크리스마스 전에 처리하자'고 압박하기도 했다. 우리는 애초 대정부 요구안보다 많이 (수위를) 낮췄지만, 당장 협상 타결에 목매지는 않았다

지난 8월에 송영길 민주당 의원이 당시 한승수 국무총리와 4자협의 테이블까지 이야기됐는데 정운찬 총리가 내정되면서 2달 넘게 시간을 버렸다. 정 총리가 추석 때 남일당을 방문했지만, 분향만 하고 갔고 깊이 있는 고민은 없었다. 본인은 (해결할) 마음이 있었는데 정부에서 조율되지 않았던 것 같다. 그 뒤 총리실과 매듭을 푸는 과정들이 꽤 지지부진했다.

그 뒤 10월 말에 1심 재판 선고가 나오면서 총리실이나 서울시 쪽에서는 '정부가 책임 있다고 할 수 없지 않냐'는 고압적 분위기였는데, 11월 말부터 연내 해결하겠다는 쪽으로 달라졌다."

용산참사범대위는 30일 낮 용산구 남일당 빌딩앞에서 긴급기자회견을 열어 '용산 참사 유가족이 정부와 협상을 사실상 타결했다' '철거민 희생자들의 장례식은 1월 9일 치르고, 정운찬 총리가 책임을 인정하고 유가족에게 유감을 표명하기로 했다'고 밝혔다. 고 이성수씨 부인 권명숙씨가 남편 영정사진을 꼭 끌어안고 눈물을 흘리고 있다.
 용산참사범대위는 30일 낮 용산구 남일당 빌딩앞에서 긴급기자회견을 열어 '용산 참사 유가족이 정부와 협상을 사실상 타결했다' '철거민 희생자들의 장례식은 1월 9일 치르고, 정운찬 총리가 책임을 인정하고 유가족에게 유감을 표명하기로 했다'고 밝혔다. 고 이성수씨 부인 권명숙씨가 남편 영정사진을 꼭 끌어안고 눈물을 흘리고 있다.
ⓒ 권우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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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용산참사를 모르쇠 하던 정부의 태도가 왜 바뀌었다고 보나?
"참사 6개월이 지날 때까지는 완강했다. 유가족이나 용산 범대위가 지치길 기다린 것 같다. 그러나 지금까지 오면서 대중 동력을 동원한 집회 등은 줄었을지 몰라도, 갈수록 특히 종교계에서 여론이 확산됐다. '용산참사 해결 없는 친서민 행보는 기만'이라는 비판도 계속 나오고, 특히 서울시 같은 경우 내년 지방선거에서 안 좋다. 대정부 투쟁으로 정부를 압박했다기보다, 용산이 자꾸 걸림돌이 되니까 가급적 빨리 풀고 가려는 의도로 생각한다."

- 장례는 치르지만, 진상규명이나 제도 개선은 이루지 못했다. 숙제가 많다.
"지금은 1단계만 정리된 것이고, 재개발정책에 대한 과제는 계속 가야 한다. 1주기까지야 범대위라는 틀을 유지하지만 그 뒤에는 현실에 맞는 변화가 필요하다. 준비기간을 갖고 장기적 계획을 세워야 한다.

범대위 안에서는 '지방선거와 연계해서 움직이자'는 입장도 있는데, 그에 대한 구체적 고민은 못하고 있다. 재개발정책 토론회를 열고 후보들에게 입장을 내게 할 수도 있고 방식은 여러 가지 있을 수 있다.

나는 지방선거와 무관하게 운동하자는 생각이다. 한쪽은 진상규명과 책임자 처벌, 재판 대응을 맡고, 다른 쪽은 재개발 문제에 대해서 사회적 이슈로 제기하면서 만들어가는 두 축으로 가야 한다고 본다. 철거민 당사자 운동을 보편적으로 만들어 가자는 것이다."

- 지난 1년 가까이의 투쟁에서 가장 아쉬운 점은 무엇인가.
"이렇게 오래갈 줄 몰랐다. 과거 정권들은 사람들이 죽으면 빨리 해결하려 했으니까. 1년 투쟁으로 생각했으면 전략적으로 접근하면서 사업을 배치했을 것이다. 제일 아쉬운 것은 개발 정책의 문제점을 공론화하지 못한 것이다. 예를 들어, '한강 르네상스니 디자인 서울 사업의 결과가 어떻게 될 거냐, 명품도시 된다고 내가 행복해지냐' 하는 쪽으로 사고가 이어져야 한다.

올해 김수환 추기경, 노무현·김대중 전 대통령에 대한 대중적 추모 열기가 놀라울 정도였는데, 반면 용산 철거민은 광장에서 추모받지 못했다. 사람들에게 용산은 '불편한 진실'을 마주 대하도록 요구한다. 사람이 죽은 것은 안타깝고 이명박 정부에 규탄하는 마음도 생긴다. 그러나 세입자들이 권리를 주장하면서 재개발에 문제 제기하는 것은 흔쾌히 동의하기 어려운 것이다.

경제위기가 심해질수록 땅에서 이득을 취하게 되고, 중산층들에겐 재개발이 남의 문제 같다. 실제로는 중산층이 재개발로 쪽박 차는데도 말이다. 철거 지역 안에서도 '옆집은 부서지지만 설마 내 집은 괜찮겠지' 하는데, 떨어져 사는 사람은 오죽하겠나. 이대로 가면 '울타리치기(신 앤클루저)' 현상으로 10년이나 20년 뒤에는 서울에서 서민들이 밀려난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공동체도 사라진다. 주로 재개발되는 지역이 그나마 공동체적 요소가 남아있는 동네다. 사람과의 관계도 파괴된다."

"문규현 신부님 쓰러지시고, 별별 생각이 다 들었다"

용산참사 해결을 촉구하며 단식농성을 벌이다 쓰러진 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 문규현 신부가 퇴원해 지난 1일 오전 서울 한강로 용산참사 현장인 남일당 건물을 찾아 전종훈 신부와 인사를 나누고 있다.
 용산참사 해결을 촉구하며 단식농성을 벌이다 쓰러진 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 문규현 신부가 퇴원해 지난 1일 오전 서울 한강로 용산참사 현장인 남일당 건물을 찾아 전종훈 신부와 인사를 나누고 있다.
ⓒ 유성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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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긴 투쟁인데 그동안 포기하고 싶었던 적 없었나.
"외부에는 말하기 어려운 갈등이 있다. 유가족끼리 용산4구역 철거민끼리…. 사람들 설득하고 다독여서 끌고 오면서 편한 날이 없었다. 정신적인 에너지 소모가 굉장히 많다. 어떤 때는 유가족들이 장례 치르자고 해주길 기다리기도 했다. 그래도 그분들이 날 믿어주고, 그 힘으로 여기까지 왔다.

진짜 힘들었던 때는 용산 재판 변호인단이 바뀔 때였다. 1차 변호인단이 검찰 수사기록 3000쪽 공개를 요구한 당위성은 존중하지만, 현실적으로 재판을 거부하면 잃는 게 너무 많았다. 입장이 팽팽하게 좁혀지지 않았고 오해도 있었다. 지금 와서 보면 1차 변호인단도 나름대로 역할을 했고, 2차 변호인단도 내용상으로 재판에서 이겼다고 본다. 2심에서 정치적 판단 없이 형사사건으로 판결하면 이긴다고 본다. "

- 심장마비로 쓰러진 문규현 신부 일도 충격적이었다.
"그때도 진짜 고통스러웠지. 내가 아는 문 신부님은 워낙 건강하신 분이다. 전날이 마침 재판 선고 날인데 일부러 분위기 더 밝게 하려고 '재롱'도 떨면서 노력하셨다고 한다. 그러다 쓰러져서 3일 만에 (의식을 회복해) '부활'하신 건데, 초조하고 불안해서 별별 생각이 다 들었다. 그대로 가시면 용산 투쟁하다가 돌아가신 거잖아. 종교가 없는데도 기도하고 싶어져서 성당에 앉아있기도 했다."

- 참 길게도 갇혀 지냈다. 언제까지 수배자 생활을 할 것인가.
"(철거민들) 보내드리고 곧바로 자진출두할 생각이다. 당장은 어떻게 장례 치를지 논의하느라 바쁘다. 그동안 후회한 게 사전구속영장 나왔을 때 잡혀갔으면 이미 나오지 않았을까하는 점이다.  김태현 상황실장은 체포영장 나온 거 모르고 나가다가 지난 3월 20일에 구속됐는데 100일 있다가 나왔다."


태그:#용산 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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