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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톡홀름, 오후 두 시의 기억>을 출간한 소설가 박수영.
 <스톡홀름, 오후 두 시의 기억>을 출간한 소설가 박수영.
ⓒ 박수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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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년 8월 어느 날. 스웨덴 웁살라 중앙역. 길고 검은 머리칼과 까만 눈동자를 가진 조그만 동양 여자 하나가 모습을 드러냈다.

커다란 여행가방 2개엔 40kg에 육박하는 무거운 짐이 담겨있었고, 양 손에 들 수 없어 어깨에 가로질러 멘 노트북 컴퓨터의 무게도 만만찮았다. 하지만, 여자는 별 걱정을 하지 않았다.

몇 해 전 영국 여행에서 미리 체험한 유럽 남자들의 친절을 믿었기 때문이다. 런던 지하철 계단에서 끙끙거리며 짐을 옮길 때 아무 말 없이 묵묵히 자신의 큼직한 가방을 대신 들어주던 신사도를 스웨덴에서도 기대했던 것이다. 그러나, 그건 착각이었다.

낑낑대며 플랫폼을 거쳐 역을 빠져나갈 때까지 자신보다 머리 하나가 더 큰 건장한 스웨덴 사내들 중 누구 하나도 도움의 손길을 내밀지 않았다.

여자가 스웨덴 남자들의 첫인상을 '차갑고 매몰찬 등을 가졌다'고 말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그런데, 왜 그들은 그녀를 돕지 않았을까? 어떤 이유가 있어 스웨덴 남자들은 여자의 무거운 짐을 들어주는 인간적인 매너를 발휘하지 못했을까?

여행서? 체류일기? 아니, 꿈과 지향에 관한 자기고백

위에 소개한 일화는 소설가 박수영이 직접 겪은 것이다. 2000년대 초반, <매혹> <도취> 등의 장편소설을 발표하며 작가로서의 입지를 굳혀가던 그녀가 마흔 셋이라는 적지 않은 나이에 낯설고 물선 스웨덴으로 건너가 웁살라대학에서 유럽 현대사를 공부하고 있다는 이야기를 몇 해 전 지인을 통해 들었다.

작가들의 모임에서 서너 번 만난 박수영은 말수 적고, 속내를 드러내는 법이 거의 없는 사람으로 보였다. 조용하고, 차분한 느낌. 그랬던 그녀 안에 어떤 들뜬 열망이 숨어 있었기에 천리타국 먼 곳에서 쉽지만은 않았을 '존재의 방향전환'을 도모한 것일까. 그것도 불혹을 넘긴 나이에. 이런 궁금증은 비단 나 하나만의 것이 아니었다.

동료와 독자들의 이런 의문을 미리부터 짐작했던 것인지 2년 6개월 남짓의 스웨덴 생활을 끝내고 올해 초 한국으로 돌아온 박수영이 세 계절을 모조리 집필에 쏟아 부어 대중들의 궁금증에 답했다. <스톡홀름, 오후 두 시의 기억>(중앙북스)을 출간한 것이다.

책의 부제는 조금 더 구체적이다. '북유럽에서 만난 유쾌한 몽상가들'. 그래, 결국 인간이 머물거나, 떠나거나, 돌아오는 것에는 이유가 있고, 그 이유의 배후에는 언제나 꿈(夢)이 있다. 해서 이 책은 여행기 혹은, 체류일기라기보다는 사십대 중반을 살고 있는 한 여성작가의 꿈과 지향에 대한 고백서로 읽힌다.

머나먼 거리 탓이었을까? <스톡홀름, 오후 두 시의 기억>을 읽기 전 내게 스웨덴은 실물이 아닌 추상으로 존재했다.

나라 이름을 입 속으로 중얼거릴 때면 '성장영화의 백미'로 불리는 <개 같은 내 인생>과 <길버트 그레이프>를 연출한 라세 할스트롬 감독이 떠올랐고, 기이한 관점으로 뱀파이어를 해석한 <렛 미 인>에서 화면 가득 펼쳐지던 은빛 칼날을 깔아놓은 듯 눈으로 뒤덮인 북유럽의 쓸쓸한 풍광이 그려졌을 뿐이다. 여기에 '걸어 다니는 조각상'이란 별명에 걸맞게 너무나 잘 생긴 남성모델 마커스 쉔켄버그가 스웨덴 출신이라는 것 정도만을 어렴풋이 알고 있었다.


멀기만 했던 스웨덴, 그 실체를 이해하려면...


박수영이 최근 출간한 <스톡홀름, 오후 두 시의 기억>
 박수영이 최근 출간한 <스톡홀름, 오후 두 시의 기억>
ⓒ 중앙북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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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웨덴에 대한 관심과 배경지식 없음'은 나만이 아니라 대부분의 한국 사람들도 마찬가지일 것 같다. 그 나라의 정치제도와 역사, 사회민주주의 전통과 공존하는 시니컬함과 다정다감함을 제대로 알고 있는 독자 역시 많지 않다.

그런 이유에서다. 그곳에 머물며 인간과 세계를 꼼꼼하게 들여다본 박수영이 들려주는 진솔한 자기고백은 추상이 아닌 실체로서 스웨덴을 이해하는데도 크게 기여한다.

책은 국적과 나이, 인종이 각기 다른 7명의 웁살라대학 역사학과 학생들(여기엔 물론 박수영이 포함돼 있다)의 일상에 밀착해 전개된다. 그들의 사랑과 실연, 공부의 힘겨움을 호소하다가도 사소한 것에서 발견하는 생활 속 행복에 기뻐하는 역사학도들을 따라가다 보면 공감과 즐거움을 동시에 느낄 수 있다.

하지만, 박수영은 '즐거움'만으로 만족하지 않는다. 스웨덴에서 살아가는 청년들의 표면적 일상에서 인간과 세계의 내면적 비밀을 찾아내려는 노력을 게을리 하지 않은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스톡홀름, 오후 두 시의 기억>이 여타의 가벼운 여행서나 해외 체류일기와 변별되는 가장 큰 미덕이다.

더할 것 없는 최고의 사회복지 시스템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국민소득이 몇 백 달러에 불과한 가난한 아프리카 국가들보다 스웨덴의 자살률이 훨씬 높은 이유는 뭘까? 왜 스웨덴 대학생들은 블루칼라 노동자에게 연민을 가지지 않을까? 앞서 언급한 것처럼 어째서 스웨덴 남성들은 무거운 가방을 든 여성에게 선뜻 도움의 손길을 내밀지 않는 걸까?

이 물음들에 대한 답을 알려주는 것은 어렵지 않다. 그러나, 그처럼 성급한 '답안지 공개'는 박수영의 책을 펴들고 하나하나 정답을 찾아갈 독자들의 행복을 방해할 것이 분명하다. 허니, 여기서는 내 역할을 '질문하는 사람'에 한정하려 한다. 모두가 알다시피 답은 책에 다 있다.

하지만, 사흘에 걸쳐 비교적 세세히 <스톡홀름, 오후 두 시의 기억>을 읽은 내 감상 두어 줄 정도는 남겨도 좋을 것 같다.

"가진 자가 오만하지 않고, 가난한 자는 비굴하지 않아도 되는, 부(富)가 개인적 능력이 아닌 합리적이고 효율적인 사회제도에서 탄생한다고 믿기에 그것을 나눠 쓰는 것이 당연하다고 말하는 스웨덴식 사민주의가 부럽다. 정말이지 부럽다."


스톡홀름, 오후 두 시의 기억 - 북유럽에서 만난 유쾌한 몽상가들

박수영 지음, 중앙books(중앙북스)(2009)


태그:#스웨덴, #박수영, #스톡홀름 오후 두 시의 기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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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꽃> <한국문학을 인터뷰하다> <내겐 너무 이쁜 그녀> <처음 흔들렸다> <안철수냐 문재인이냐>(공저) <서라벌 꽃비 내리던 날> <신라 여자> <아름다운 서약 풍류도와 화랑> <천년왕국 신라 서라벌의 보물들>등의 저자. 경북매일 특집기획부장으로 일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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