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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가야를 어떻게 기억할까. 최근 언론이 가야를 자주 다루고, 문화유적으로 개발된 곳이 많아 예전보다 인식이 많아 나아졌지만, 아직도 백제나 신라에 비해 힘이 약한 약소국으로 보는 견해가 많다. 혹은 자료가 많지 않기에 신비의 왕국으로 여겨지곤 한다.

사실 가야에 대해 알려진 이야기는 그다지 많지 않다. 수로왕과 허황옥의 국경을 넘은 사랑 이야기와 사다함에 의해 허무하게 무너진 대가야, 그리고 가야 후손 김유신 정도뿐이다. 이 외 자세한 내용에 대해서는 알려지지 않은 게 태반이고, 교과서에서도 짧게 언급하고 끝나는 수준이다.

그럼 과연 가야는 이렇게 가볍게 넘어가도 될 역사일까? 우리 역사에 있어서 수많은 국가들이 흥망성쇠를 반복하였고 여러 차례 왕조가 바뀌었다. 전체 흐름에 있어서 가야는 작은 국가였을지 몰라도, 고대사를 이해하는 데에 있어서 가야의 존재는 생각보다도 크고, 또한 강한 국가였다는 점에서 인식의 궤를 달리 할 필요가 있다.

신라를 압박하던 금관가야

수로왕릉 가야의 시조인 수로왕이 묻혔다는 전설이 있다. 수로왕과 파사이사금의 기록을 보아 알 수 있듯이 가야는 신라와 대등하게 어깨를 견주고 있었다.(사적 73호)
▲ 수로왕릉 가야의 시조인 수로왕이 묻혔다는 전설이 있다. 수로왕과 파사이사금의 기록을 보아 알 수 있듯이 가야는 신라와 대등하게 어깨를 견주고 있었다.(사적 73호)
ⓒ 오은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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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야는 약소국으로 알려졌지만 역사를 자세히 살펴보면 꼭 그렇지도 않다. 가야는 신라와 낙동강을 동서로 두고 자웅을 겨루던 사이로서, 신라는 가야와의 싸움을 생각보다 힘겹게 생각하는 경향도 있었다. 사료에서도 이러한 사실들을 군데군데 발견할 수 있다.

<삼국사기> 신라본기 파사이사금(婆娑尼師今) 23년 기사를 보면 음집벌국과 실직곡국이 국경문제로 다투다가 신라왕에게 찾아와 결정해 줄 것을 요구한 기사가 있다. 이에 파사이사금은 쉽사리 결정을 못 내리고 금관가야의 수로왕이 나이가 많고 아는 것이 많다고 하여 초청하여 이 문제를 물었다. 수로왕이 의견을 내어 음집벌국 편을 들어주어 결정이 나자 신라에선 귀족들로 이뤄진 6부에서 수로왕을 위해 연회를 베풀도록 하였다.

6부 중 5부에서 이찬(伊湌 : 신라 17관등 중 둘째 등급)을 우두머리로 보내었는데, 한기부만 직위가 낮은 자를 우두머리로 보냈다. 이에 수로왕이 노하여 부하인 탐하리를 시켜 한기부의 우두머리를 죽이고 돌아갔다. 하지만 신라는 이에 대해 가야에게 아무런 말도 못하고 오히려 음집벌국만 공격하고 말았다. 이를 보면 신라와 가야간의 관계에서 가야가 좀 더 주도적인 위치에 있었다고 해석해 볼 수도 있다.

대성동고분군 원경 금관가야의 수장들의 고분이 집중적으로 분포하였으며, 이곳에서 출토되는 유물들을 미루어보아 당시 활발한 교역들이 이뤄졌음을 알 수 있다.(사적 341호)
▲ 대성동고분군 원경 금관가야의 수장들의 고분이 집중적으로 분포하였으며, 이곳에서 출토되는 유물들을 미루어보아 당시 활발한 교역들이 이뤄졌음을 알 수 있다.(사적 341호)
ⓒ 김해 대성동고분군 발굴보고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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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관가야가 이런 힘을 가질 수 있었던 원천은 무엇이었을까? 바로 교역을 통한 재화의 확보를 들 수 있다. 회현리패총을 보면 알 수 있다. 당시 김해지역은 지금처럼 평야지대가 아니라 시내까지 바닷물이 들어오다 보니 애초에 농사로 국가를 운영하기엔 어려움이 있었다. 하지만 지리적 이점을 이용하여 중계무역을 하였고, 이 과정에서 막강한 부를 거머쥘 수 있었다. 김해 대성동고분군이나 양동리고분군에서 발견되는 교역물품들을 보면 당시 활발한 무역이 이뤄졌음을 미루어 짐작해 볼 수 있다.

교역 대상은 주로 낙랑군과 왜였다. 중계교역은 물론이거니와 철을 교역품으로 사용해 번성할 수 있었다. 특히 철은 고대시대에 화폐처럼 쓸 수 있었을 뿐 아니라, 철제 무기나 갑옷, 농기구를 만드는 중요한 원료였다는 점에서 의의가 있다. 금관가야는 이런 활발한 교역과 뛰어난 철기문화를 바탕으로 신라를 압박할 만큼 강한 국가일 수 있었다.

광개토태왕의 말발굽에 역사의 뒤안길로

광개토태왕 영정 고구려 19대왕으로서 고구려의 전성기를 이끈 정복군주이다. 신라의 구원요청을 받아 5만의 군대를 파견하여 가야와 백제, 왜를 공격하였다.
▲ 광개토태왕 영정 고구려 19대왕으로서 고구려의 전성기를 이끈 정복군주이다. 신라의 구원요청을 받아 5만의 군대를 파견하여 가야와 백제, 왜를 공격하였다.
ⓒ 선현의 표준영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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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야와 신라의 경쟁은 국제 경쟁으로 번지게 된다. 낙동강 서안의 가야가 낙동강 동안의 신라를 압박하고 공격하였고, 이에 백제와 왜도 가세하게 된다. 이 때문에 신라는 매우 시달린 것으로 보이는데, 여기에 가야가 상상하지도 못했던 변수가 개입한다. 그 변수는 바로 고구려 광개토태왕이다.

그 당시 백제와 고구려의 관계를 간단히 살펴보면 이렇다. 백제와 고구려는 낙랑군을 몰아냄으로서 그 국경이 맞닿게 되었고, 이후부터 대립이 격화되기 시작한다. 백제는 근초고왕 때 정복전쟁을 통하여 영토를 넓히며 강국으로서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하였고, 고구려와도 전쟁을 치렀다. 북방의 강자로서 막강한 힘을 가진 고구려와의 전쟁에서, 백제는 고구려 왕인 고국원왕의 목을 베는 성과를 거두게 된다.

이로 인하여 백제와 고구려는 원수 사이가 되고, 고구려는 힘을 키우면서 백제와 전쟁을 준비한다. 그리고 광개토태왕이 즉위하여 할아버지인 고국원왕의 원수를 갚기 위해 백제로 출정한다. 광개토태왕은 맹공을 퍼부으며 백제를 공격하고, 결국 백제는 고구려에게 잠깐 항복하게 된다.

광개토태왕릉비문 광개토태왕의 아들인 장수왕이 세운 비석으로서, 광개토태왕의 활발한 정복활동 내용들을 수록해 놓았다.
▲ 광개토태왕릉비문 광개토태왕의 아들인 장수왕이 세운 비석으로서, 광개토태왕의 활발한 정복활동 내용들을 수록해 놓았다.
ⓒ 송영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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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이후 백제는 왜, 가야와 연합하여 신라를 공격하게 되었고, 이에 신라는 고구려에게 구원 요청을 하게 된다. 고구려 광개토태왕은 이러한 신라의 부름에 응하여 보병과 기병 도합 5만을 보내어 신라를 구원하게 된다. 그리고 이곳의 왜군을 비롯한 연합군들을 격퇴시키고 그 기세를 몰아 가야의 종벌성(從拔城)에 이르러 항복을 받게 된다. 이 과정에서 금관가야는 고구려에게 직접 공격을 받게 된 것으로 보인다.

고고학적으로도 이 시기를 전후하여 대성동고분군의 축조가 더뎌지고 수장 급 무덤들이 더 이상 조성되지 않는다. 이는 금관가야가 쉽게 벗어나지 못할 정도로 타격을 입었고 서서히 쇠퇴의 길을 걷게 된다는 것을 뜻한다. 결국 이때부터 가야와 신라의 주도권이 신라 쪽으로 점점 더 기울어진다.

대가야의 부흥과 백제·신라의 견제

고령 지산동고분군 대가야의 대표적인 고분군으로서 금동관이나 수많은 순장유골들이 출토되어 왕족들이나 귀족들이 주로 매장되었음을 알 수 있다.
▲ 고령 지산동고분군 대가야의 대표적인 고분군으로서 금동관이나 수많은 순장유골들이 출토되어 왕족들이나 귀족들이 주로 매장되었음을 알 수 있다.
ⓒ 송영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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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관가야는 쇠퇴의 길을 걷게 되지만, 피해를 덜 받은 다른 가야 소국들은 재기를 꾀하며 서서히 국력을 키운다. 이러한 상황에서 다른 국가들보다 좀 더 두드러진 모습을 보이는 게 바로 대가야, 아라가야, 소가야 등으로서, 이 중 대가야는 강국으로서의 면모를 보이게 된다.

대가야는 반파국이라고도 하며, 지금의 경북 고령지역을 중심으로 번성하였다. 고령군 일대는 예로부터 안정적인 농업 입지조건을 갖추고 있었다. 지금 야로지역에서 철산지가 확인되는 등 철기문화를 위한 기반이 있었다는 점이 지역연맹체로 성장하는 데 중요한 동력이 된 것으로 보인다.

대가야는 고령 지산동고분군을 중심으로 번성하였으며 이곳에서 거대한 고총고분들이 조성되기 시작하였다. 고분들 외형도 클 뿐만 아니라 내부에서도 금동관 같은 최고 지배층들이 쓴 위세품들이 다수 출토되어, 당시 대가야인들이 화려한 문화를 꽃피웠음을 알 수 있다.

또한 대가야는 고령 일대에만 머물지 않고 섬진강유역으로 진출해나간 것으로 보인다. 순천 운평리고분군이나 남원 월산리고분군, 장수 삼봉리고분군 등 전남이나 전북 일대에서도 대가야 고분군이 발견된다. 이 점은 대가야가 활발한 정복과 진출을 한 구체적인 증거로 볼 수 있으며, 하동까지 진출하여 남해안까지 그 영향권을 미친 것으로 보인다. 당시 대가야는 신라 및 백제나 왜와의 물자교역을 장악할 수 있는 위치에까지 성장하기에 이르지만 아직 주변 소국들을 정복할 만한 능력은 갖추진 못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선덕여왕의 사다함 MBC드라마 선덕여왕에 출연한 사다함(박재정 분)의 모습. 사다함은 이사부와 함께 대가야를 멸망시키는 공을 세운다.
▲ 선덕여왕의 사다함 MBC드라마 선덕여왕에 출연한 사다함(박재정 분)의 모습. 사다함은 이사부와 함께 대가야를 멸망시키는 공을 세운다.
ⓒ MBC드라마 <선덕여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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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가야는 후기가야연맹체 맹주로서 군림하며 강력한 왕권을 보인다. 이는 지산동 44호분에서 순장유골이 22구나 나오는 것을 통하여 미루어 짐작해 볼 수 있다. 하지만 이러한 대가야의 번성도 오래 가지는 못한다. 이미 고대국가의 면모를 갖춰 따라잡기엔 힘들 정도로 강한 국력을 지닌 백제나 신라가 꾸준히 압박했기 때문이다.

대가야는 당시 국제 상황에 맞추어 친백제적인 면모를 보이기도, 친신라적인 면모를 보이기도 하였다. 이는 가야제국 내 경쟁 대상이었던 아라가야를 다소 의식하였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러나 관산성전투를 계기로 백제가 신라에게 패배하자 가야의 외교 노선은 흔들리게 되고, 결국 신라의 이사부와 사다함의 공격을 받아 멸망하게 된다.

가야는 당시 활발한 국제교역과 철 생산, 농업 등을 통하여 번성하였고 발전하였다. 그래서 한때는 신라와 경쟁하고, 오히려 압박할 정도의 힘을 과시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국제 상황이나 고대국가로의 진입이 쉽지 않았다는 점, 그리고 절대 강자가 없이 서로간 이해에 따라 움직임을 달리했다는 점 등이 한계로 작용하여 결국 멸망하게 된다. 국가의 흥망성쇠야 당연한 것이지만, 가야는 그 자료의 부족과 무관심으로 인하여 다른 국가들에 비해 적극적인 연구가 덜 된 측면이 많다. 하지만 가야는 결코 약소국에 불과하지만은 않았다. 우리는 이 점을 이해하여 가야를 역사의 한 축으로서 활동하였다고 볼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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