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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북한산 자락 인수동, 우리 마을에도 첫눈이 내렸습니다. 첫눈이 항상 그렇듯 온지 모르게 지나갔습니다. 이후로 흐린 날이 이어집니다. 추적추적 비까지 내립니다. 가을과 겨울이라면 하늘이 청명해 북한산은 물론 건너편 수락산・불암산도 훤히 보여야 하는데, 흐리기만 하니 몸까지 찌뿌드드합니다. 그래서 간간이 가을햇살이 구름 사이로 삐져나옵니다. 이때를 놓칠세라 유재철 할아버지(70)도 분주합니다.

유재철 할아버지 할아버지는 오른손이 불편합니다. 한국전쟁 때 총을 맞아 손목을 들어올리지 못합니다. 그래도 마을 노인들 집을 수리하는 일을 척척 해냅니다. 텃밭을 가꿔 이웃과 나누는 걸 인생의 재미로 여기며 삽니다.
▲ 유재철 할아버지 할아버지는 오른손이 불편합니다. 한국전쟁 때 총을 맞아 손목을 들어올리지 못합니다. 그래도 마을 노인들 집을 수리하는 일을 척척 해냅니다. 텃밭을 가꿔 이웃과 나누는 걸 인생의 재미로 여기며 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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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씨 할아버지는 인수동 516번지에 사십니다. 형제배달마트에서 삼광빌라를 지나 언덕을 따라 올라가다보면 아름다운마을어린이집과 수유5동세탁소가 나옵니다. 골목길은 왼쪽으로 꺾어집니다. 바로 그곳에 유씨 할아버지가 가족과 함께 사는 작은 빌라가 있지요. 할아버지는 빌라 주차장에 작은 비닐하우스를 지어 가을걷이한 고추와 배추, 콩 따위를 저장합니다.

날씨가 풀리는 날에는 어김없이 주차장에 수확물을 펼쳐놓습니다. 제가 찾아뵈었을 때는 참깨와 검은콩, 고추를 말리고 계셨습니다. 이 고샅을 지나는 이웃들도 발걸음을 멈추고 할아버지의 '건조장'을 둘러봅니다. 회색도시에서는 보기 힘든 구경거리니까요.

200평짜리 할아버지 텃밭은 북한산 너머 원당에 있습니다. 사실 텃밭이라고 하기에 무안할 만큼 멀리 있지요. 그렇지만 매일 다니다시피 하시면서 웬만한 밭작물은 물론 쌀과 보리까지 짓습니다.

밤에는 경비, 낮에는 텃밭

유재철 할아버지네 주차장 흐리다가 볕이 들자마자 할아버지가 콩이며 깨를 말렸습니다.
▲ 유재철 할아버지네 주차장 흐리다가 볕이 들자마자 할아버지가 콩이며 깨를 말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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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아버지는 전문 농사꾼은 아닙니다. 104번 버스를 운영하는 선일교통에서 경비 일을 맡고 있습니다. 저녁 7시부터 새벽 6시까지 근무합니다. 아침에 잠깐 쉬었다가 바로 텃밭으로 달려가십니다. 그렇게 정성껏 키웠으니 작물이 잘 자랄 수밖에요. 200평이라지만 제법 많은 양이 나온다고 합니다. 고추나 상추, 배추 같은 것들은 이웃과 자주 나누어 먹습니다. 할아버지가 총무로 있는 무너미경로당에도 가져가 나눠먹습니다.

밤새우며 일한 뒤에 텃밭 가꾸러 달려가면 힘들지 않느냐고 여쭈었습니다. 도대체 잠은 언제 주무실까요. 대답은 명쾌하고 간단했습니다. "짬짬이." 그래도 그렇지 몸이 상하지 않을까 싶었는데, 괜찮다고 하십니다. "밭에 나가 일하면 괴로운 일을 다 잊을 수 있지."

할아버지는 지난해 위암으로 고생하던 막내딸을 잃었습니다. 자식을 먼저 보낸 슬픔을 달래준 것은 다른 마음이 들지 않도록 일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래도 안 되면 술을 드시는 날도 있었지만, 밭에 나가면 마음이 편해졌다고 합니다.

그러고 보니 거나하게 취한 할아버지와 골목에서 몇 번 마주친 기억이 스쳤습니다. 할아버지는 깊은 한숨과 함께 "…인생살이가 다 그렇지"라는 말을 쏟아냈습니다. 할아버지가 무거워진 분위기를 돌려놓았습니다. "밭에서 가꾼 것들을 이웃이나 마을 노인네들에게 나눠주는 즐거움도 쏠쏠하지."

할아버지는 '모범 노인'

우리 마을 '모범 노인' 유재철 할아버지는 이웃과 재미있게 사는 덕에 모범노인상을 받았답니다. 상을 받는 건 기쁜 일인가봅니다. 상을 설명하는 할아버지 얼굴에 화색이 돌았습니다.
▲ 우리 마을 '모범 노인' 유재철 할아버지는 이웃과 재미있게 사는 덕에 모범노인상을 받았답니다. 상을 받는 건 기쁜 일인가봅니다. 상을 설명하는 할아버지 얼굴에 화색이 돌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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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너미경로당에서 '유 총무님'은 맥가이버이고 홍반장입니다. 못 고치는 게 없습니다. 혼자 사는 노인들 집에 보일러가 고장 나거나, 물이 안 나오거나, 불이 안 들어오면 할아버지가 달려갑니다. 돈을 주고 고칠 만한 형편이 안 되니까 할아버지에게 도움을 청하지만, 할아버지는 '의뢰인'을 실망시킨 적이 없습니다. 전문가 못지않게 일을 해내십니다.

덕분에 할아버지는 최근 강북구청에서 모범노인상을 받았고, 지역신문에서 주는 시민문화상도 받았답니다. "봉사정신이 투철해서 주는 상이라지" 하시며 흐뭇해하십니다. 대단하다고 축하드린다고 말씀드렸더니, 이번에는 "별 거 아니고, 그냥 동네 반장이 추천한 모양"이라고 겸양을 잊지 않습니다.

고물상에서 주워온 자전거를 고쳐서 이웃에게 나눠준 것도 여러 번입니다. 할아버지는 다섯  살배기 손자 자전거나 장난감도 손수 만들어주십니다. 화창한 날 할아버지네 빌라 주차장은 작업장으로 변합니다. 할아버지 손에 들어가면 고물도 새롭게 태어납니다. 한번은 다른 사람이 버린 파라솔을 고추를 말리는 장비로 바꾸어놓으셨더라고요.

할아버지 작은 소망, 씨앗전시관

할아버지네 비닐하우스 서너 평 되는 비닐하우스에 고추를 말렸습니다. 김장하실 때 쓰겠지요.
▲ 할아버지네 비닐하우스 서너 평 되는 비닐하우스에 고추를 말렸습니다. 김장하실 때 쓰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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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아버지는 부지런하고 손재주도 뛰어납니다. 그런데 할아버지 동작을 눈여겨보신 분은 알 수 있습니다. 할아버지는 오른손을 온전히 쓰지 못하십니다. 한국전쟁, 그러니까 6・25때 오른팔에 총을 네 방이나 맞았는데, 그 덕에 팔목을 들어올리는 힘줄은 끝내 고치지 못했다고 합니다.

1990년대 중반에 이르러서야 뒤늦게 장애2등급을 받았다고 합니다. 할아버지는 오른손을 들었다가 놓으십니다. 손은 아무런 저항도 없이 떨어집니다. 어떻게 이런 손으로 밭을 일구고 이웃을 도울 수 있었을까. 할아버지 말씀이 "마음이 있으면 못할 일이 없다."

할아버지는 30여 년 전 전남 영광에서 우리 마을로 오셨습니다. 당시 건축 일을 하셨답니다. 할아버지가 사는 빌라는 물론, 516번지에 있는 해청빌라와 미진빌라 터도 닦았다 하십니다. 그렇지만 재력이 약해 공사 중간에 다른 사람에게 넘겨야 했습니다. 할아버지는 진한 아쉬움을 달래며 평생을 살아오셨습니다. 할아버지 얼굴에 깊게 패인 주름살에도 할아버지가 걸어오신 인생길이 고스란히 담겨있습니다. 주름살의 골만큼 후덕한 할아버지 인심도 깊지요.

할아버지에게는 작은 소망이 하나 있습니다. 텃밭을 하면서 기른 작물들을 전시할 수 있는 아주 작은 전시관을 세우는 겁니다. 우리나라에서 나는 작물의 씨앗을 모두 모아서 마을 아이들이 구경할 수 있도록 전시하고 싶다고 하십니다. 모으는 것은 자신 있다고 하십니다. 문제는 땅이지요.

가르멜수녀원에서 북한산으로 올라가는 쪽 작은숲속이 좋을 것 같다고 하십니다. 할아버지가 말한 땅에는 자연학습장이라는 팻말을 달았지만 실제로는 몇몇 사람들이 텃밭으로 쓰고 있습니다. 그곳이 더 많은 사람들에게, 무엇보다 우리 아이들에게 쉬고 배우는 공간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내년에는 할아버지 소원이 꼭 이루어졌으면 좋겠다고 인사를 나누고 헤어졌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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